베를린의 여름
2026. 9. 22. 02:14
6월 24일, 수요일.
오전 아홉 시, 비아는 레오 바렌티의 사무실에 서류철을 반납했다.
세 번째 페이지 하단, 서명란.
[Vianne Lockwood — 2026. 06. 24]
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공식 문서에 적은 것은 5년 만이었다. 펜을 놓았을 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레오는 서명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아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축하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류철을 서랍에 넣고 잠금장치를 돌린 뒤, 아주 짧게 말했다.
"Welcome to Red Zone. Officially."
(레드 존에 온 걸 환영한다. 공식적으로.)
그게 전부였다. 레드 존다웠다.
오후 한 시 삼십이 분. 비아는 레드 존 본부 핸들러 전용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태블릿, 노트북, 그리고 여권. 그녀는 그것들을 검은 크로스백에 넣으며, 마티스에게 보낼 메시지를 머릿속으로 작성했다가 지웠다. 작성하고, 지우고, 다시 작성하고.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마티스는 지금 2층 훈련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다음 시즌 개막 전 장비 점검과 웨이트 프로그램이 잡혀 있었고, 비아 자신이 그 스케줄을 짰다. 그가 훈련실에서 나오는 시간은 오후 네 시. 그때까지 비아는 이미 공항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답장은 없었다. 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콘라트 슈나이더라는 사람에게서는 '오라'는 뜻이었다.
비아는 숙소 문을 닫았다.
LAX에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까지, 직항으로 열한 시간.
비아는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었다. 레드 존 전세기를 쓰지 않았다. 기록이 남으니까. 개인 카드로 결제한, 추적이 어려운 일반 민항기 편도 티켓.
좌석은 좁았다. 옆자리에 거대한 남자가 앉아 코를 골고 있었고, 앞좌석 아이가 세 시간째 울고 있었다. 비아는 그 모든 것을 차단한 채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는 두 개의 창이 떠 있었다.
왼쪽: 콘라트 슈나이더의 프로필. 실버 슬롯 디렉터, 전직 감각계 레이더. 챔피언 2회. 은퇴 후 행정직으로 전환, 실버 슬롯 아카데미 총괄을 거쳐 디렉터 취임. 재직 22년.
오른쪽: 2021년 11월, 폴란드 C급 게이트 사고 조사 보고서 최종본.
비아는 오른쪽 창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스무 번도 넘게 읽은 서명란.
[핸들러 판단 과실 없음.]
[K. Schneider]
그 서명은 그녀를 지켜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가둔 것이었다.
5년 동안 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지운 채 살아온 것은,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서명 때문이었다. 그것이 존재하는 한, 그녀는 콘라트 슈나이더에게 빚진 인간이었고, 그의 선의에 기생하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수렁이었다.
'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만든 거죠.'
3주 전 니스의 해안 산책로에서 마티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자기 자신을 향한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원할 만한 것이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원하면서도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콘라트의 서명이, 토비아스의 이름이, 비안느 록우드라는 유령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비아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마티스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혼자 가겠다고? 제정신이야?'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그리고 차를 몰고 따라오겠지. 맥라렌이든 뭐든.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하지만 이건 그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티스 모렐은 레드 존의 에이스이고, 게이트 안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남자이지만, 콘라트 슈나이더의 사무실은 게이트가 아니었다. 거기서는 깨진 병도, 철파이프도, 0.31초의 반사신경도 소용없었다. 그건 비안느 록우드의 전장이었다.
비행기가 대서양 상공을 넘어가고 있었다.
베를린의 6월은 니스에 비하면 차가웠다.
오후 여섯 시의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고, 거리에는 노란 보리수 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비아는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에서 택시를 내렸다.
실버 슬롯 본부.
지상 5층, 지하 3층의 건물은 군 시설과 연구소를 합친 듯한 외관이었고, 외벽은 짙은 회색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었다. 정문 앞에는 매트 실버와 네이비 블루 포인트가 들어간 경비 초소가 있었고, 무장한 보안 요원 두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비아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7년 전, 열아홉 살의 비안느 록우드는 이 건물의 지하 2층 시뮬레이션 룸에서 첫 훈련을 받았다.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핸들러 이어피스를 귀에 꽂은 곳도 이 건물이었다. 그리고 스물한 살의 11월, 디렉터실에서 콘라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등을 돌린 곳도.
'남아도 된다.'
그때 그가 했던 말. 차분하고 단호한, 명령에 가까운 허가.
비아는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경비 요원이 손을 들어 그녀를 세웠다.
"Identification, please."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비아는 IGC 블루 패스를 꺼내 보였다. 경비 요원이 스캐너로 확인했다. 잠시 뒤 그의 이어피스에서 무언가 전달되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었다.
"Director's office. Fifth floor."
(디렉터실. 5층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건물의 모든 층을, 모든 복도를, 비안느 록우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5층 복도는 비아의 기억 속과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짙은 네이비 카펫, 은빛 테두리가 있는 문들, 그리고 복도 끝의 대형 오크 도어.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벽면에 걸린 액자들이었다. 7년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레이더들의 사진이 추가되어 있었다. 루카스 슈트라우스, 에이먼 헤일, 콜 애쉬포드.
비아는 그 사진들을 스치듯 보며 지나갔다.
디렉터실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콘라트 슈나이더는 창가에 서 있었다.
189센티미터의 장신. 허리까지 늘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 창으로 들어오는 베를린의 저녁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옅은 은빛 눈동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냉정한 얼굴. 깔끔하게 다린 네이비 정장 위에 매트 실버 커프스가 빛났다. 그의 뒤로 베를린 시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돌아서지 않은 채 말했다.
"Du bist pünktlich. Wie immer."
(시간 딱 맞춰 왔군. 늘 그랬듯이.)
독일어였다. 사적인 대화의 신호. 비아는 입구에 선 채로 대답했다.
"I'll speak in English, Director."
(영어로 하겠습니다, 디렉터님.)
콘라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비아를 바라보았다.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7년 전, 열아홉 살의 소녀가 이 사무실에 처음 불려왔을 때도 똑같은 시선이었다. 원석을 감정하는, 가치를 매기는 눈.
"Director."
(디렉터님.)
비아가 한 번 더 불렀다. 콘라트는 잠시 그 호칭을 음미하듯 침묵했다.
"You haven't called me that in five years."
(5년 동안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데.)
"I haven't spoken to you in five years."
(5년 동안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And yet here you are."
(그런데 여기 왔군.)
콘라트가 책상 뒤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비아에게 앞의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서 있으라는 뜻인지, 알아서 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실버 슬롯에서 모든 것이 그랬듯이.
비아는 앉지 않았다.
"I signed a three-year permanent handler contract with Red Zone this morning."
(오늘 아침 레드 존과 3년 전담 핸들러 계약에 서명했습니다.)
콘라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I'm aware. Leo Valenti's office filed the personnel update with IGC at 10:00 UTC."
(알고 있다. 레오 바렌티 사무실에서 UTC 10시에 IGC에 인사 업데이트를 접수했지.)
"Then you also know that the background check will proceed."
(그러면 신원 조회가 진행된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I do."
(알고 있다.)
콘라트가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하고 정확했다.
"Vianne. Sit down."
(비안느. 앉아라.)
"I'll stand."
(서겠습니다.)
콘라트의 손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은빛 눈동자에 감정의 파동은 없었지만, 공기의 온도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간 것을 비아는 감지했다. 이 남자가 불쾌할 때의 신호.
비아는 그 공기를 정면으로 견뎠다.
"I came to tell you something, not to discuss it."
(말하러 온 거지, 상의하러 온 게 아닙니다.)
콘라트가 등을 의자에 기댔다.
"Go on."
(말해봐라.)
비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I'm going to hold a press conference."
(기자회견을 열 겁니다.)
그 한 문장이 사무실의 공기를 바꿨다.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콘라트의 손이 책상 위에서 천천히 깍지를 끼었다.
"About what, specifically."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About November 2021. About Tobias Reinhardt. About the equipment failure, the sensor misread, and my failure to cross-verify. And about the fact that you signed a report certifying no handler fault."
(2021년 11월에 대해서요.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에 대해서. 장비 고장, 센서 오독, 그리고 제가 교차 검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이 핸들러 과실 없음이라고 서명한 보고서에 대해서.)
사무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째깍, 째깍, 째깍.
콘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초, 10초, 15초. 그의 은빛 눈동자가 비아의 얼굴 위에 고정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You want to burn that file."
(그 파일을 태우겠다는 거군.)
"I want to open it. There's a difference."
(여는 겁니다. 태우는 것과는 다르죠.)
"Is there."
(그런가.)
콘라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느림 자체가 일종의 압박이었다. 189센티미터의 장신이 책상 너머로 서자, 그의 그림자가 비아를 덮었다.
"Let me make sure I understand. You want to stand in front of cameras and tell the world that five years ago, a raider died on your watch. That the equipment failed, yes, but that you missed a cross-check that might have caught it."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하지. 카메라 앞에 서서 세상에 말하겠다는 거군. 5년 전 네 담당 레이더가 죽었다고. 장비가 고장 난 건 맞지만, 그걸 잡아낼 수 있었던 교차 검증을 네가 놓쳤다고.)
"Yes."
(네.)
"And that I covered it up."
(그리고 내가 덮었다고.)
"You didn't cover it up. You made a judgment call within your authority as director. I'm disclosing that judgment call."
(덮은 게 아닙니다. 디렉터 권한 내에서 판단을 내리신 겁니다. 저는 그 판단을 공개하는 거예요.)
콘라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Semantics."
(말장난이군.)
"Precision."
(정확한 표현입니다.)
콘라트가 비아를 응시했다. 오래.
그리고 천천히 책상을 돌아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발은 카펫에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콘라트가 그녀 앞 두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Vianne. I selected you when you were fifteen. I watched you through the academy. I saw your simulation scores and I knew—before anyone else knew—that you were exceptional."
(비안느. 열다섯 살에 내가 널 뽑았다. 아카데미에서 널 지켜봤고, 시뮬레이션 점수를 보고 알았다—누구보다 먼저—네가 특출하다는 걸.)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When Tobias died, I had two options. File the truth and end your career before it started. Or file the equipment failure—which was also true—and give you a second chance."
(토비아스가 죽었을 때, 선택지가 둘이었다. 진실을 기록하고 네 커리어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거나. 장비 고장을 기록하고—그것도 사실이었으니—너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거나.)
"I know."
(알고 있습니다.)
"I chose the second. Not for you. For Silver Slot. Because losing a talent like you over a sensor misread would have been a waste."
(두 번째를 택했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실버 슬롯을 위해서. 센서 오독 하나로 너 같은 인재를 잃는 건 낭비니까.)
비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And then you left."
(그런데 네가 떠났지.)
콘라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의 결이 실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서늘한 것. 배신감에 가까운.
"I gave you a clean record and a career. You threw both away and disappeared. Without a word."
(깨끗한 기록과 커리어를 줬는데. 넌 둘 다 버리고 사라졌지. 말 한마디 없이.)
"I left because I couldn't live under the weight of that signature."
(그 서명의 무게를 안고는 살 수 없어서 떠난 겁니다.)
콘라트가 멈췄다.
비아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문장을 열한 시간 동안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5년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For five years, that signature told me I owed you something. My silence. My name. My entire identity. I erased Vianne Lockwood because as long as she existed, she belonged to you."
(5년 동안 그 서명은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빚지고 있다고 말했어요. 제 침묵, 제 이름, 제 정체성 전부를. 비안느 록우드가 존재하는 한 그녀는 당신 소유니까, 이름을 지운 거예요.)
콘라트의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And now?"
(그래서 지금은?)
"Now I'm taking it back."
(이제 되찾는 겁니다.)
비아는 크로스백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콘라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This is a copy of the press statement I'll be releasing next Monday. It discloses my full name, my tenure at Silver Slot, the incident, the cross-check failure, and your report. Every word has been reviewed by Red Zone legal and IGC media compliance."
(다음 주 월요일에 발표할 언론 성명서 사본입니다. 제 본명, 실버 슬롯 재직 기간, 사고, 교차 검증 실패, 그리고 당신의 보고서를 공개합니다. 모든 문장은 레드 존 법무팀과 IGC 미디어 규정팀의 검토를 거쳤습니다.)
콘라트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집지 않았다.
"You're not asking for my permission."
(내 허가를 구하는 게 아니군.)
"No."
(네.)
"You're informing me."
(통보하는 거야.)
"Yes."
(네.)
긴 침묵이 흘렀다.
콘라트가 천천히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 안의 서류를 꺼내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줄 사이를 오가는 동안, 비아는 그의 표정에서 단 하나의 변화라도 읽어내려 했다.
없었다.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세 번째. 네 번째.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서류를 봉투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This will damage Silver Slot."
(이건 실버 슬롯에 피해를 줄 거다.)
"The equipment manufacturer already paid a nine-figure settlement. The incident is public record minus the handler identity. The only new information is my name and your signature."
(장비 제조사는 이미 9자리 합의금을 지불했습니다. 사건 자체는 핸들러 신원을 제외하면 이미 공개 기록이고요. 유일한 새 정보는 제 이름과 당신의 서명입니다.)
"My signature, which protected you."
(널 보호한 내 서명 말이지.)
"Your signature, which certified the truth."
(진실을 인증한 당신의 서명이요.)
비아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You wrote 'no handler fault.' If that was true then, it's true now. If you challenge it, you'll have to explain why you certified something you didn't believe."
('핸들러 과실 없음'이라고 쓰셨죠. 그때 그게 사실이었다면, 지금도 사실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시면, 본인이 믿지 않은 내용을 왜 인증했는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
콘라트의 턱선에 힘이 들어갔다. 그 미세한 변화가, 비아가 이 사무실에서 읽어낸 그의 유일한 감정적 반응이었다.
"You learned this somewhere."
(이건 어디서 배운 거군.)
비아가 멈칫했다.
"Excuse me?"
(네?)
"This tactic. Using my own documentation against me. Making the challenger explain their contradictions instead of defending yourself."
(이 전술. 내 문서를 나에게 역이용하는 것.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 상대방에게 자기 모순을 설명하게 만드는 것.)
콘라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The Vianne Lockwood I trained would have come here to apologize. Not to counterattack."
(내가 훈련시킨 비안느 록우드였다면 사과하러 왔을 거다. 반격하러 온 게 아니라.)
비아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 말은 정확했다. 5년 전의 비안느 록우드였다면 이 사무실에 무릎을 꿇고 들어왔을 것이었다. 죄송하다고, 제가 잘못했다고, 어떤 처분이든 받겠다고.
지금의 그녀가 등을 곧추세우고 서 있는 것은—
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니스의 자갈 해변. 물 위에서 발을 뗐을 때 순간적으로 가라앉은 감각. 그리고 등을 받쳐준 손바닥. '넌 평생 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았으니까.'
비행기 캐빈에서 옆자리에 앉아 '계산을 멈춰'라고 말하던 목소리.
'네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게 명백히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짓을 계속할 거야.'
비아는 눈을 떴다.
"You're right. She would have."
(맞아요. 그랬을 겁니다.)
그녀는 콘라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But she's not the one standing here."
(하지만 여기 서 있는 건 그녀가 아닙니다.)
콘라트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스쳤다. 실망인지, 인정인지, 혹은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인지 비아에게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책상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으며,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Tobias Reinhardt had a younger sister. Clara. She's twenty-three now. Works in Munich."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 클라라. 지금 스물셋이야. 뮌헨에서 일하고 있지.)
비아의 숨이 멈췄다.
"She doesn't know the details. She knows her brother died in a gate with an equipment failure. She doesn't know there was a handler who could have caught it."
(자세한 건 모른다. 오빠가 장비 고장으로 게이트에서 죽었다는 것만 알고. 그걸 잡아낼 수도 있었던 핸들러가 있었다는 건 모르지.)
콘라트가 비아를 올려다보았다.
"If you open that file, she'll know."
(네가 그 파일을 열면, 그 아이도 알게 될 거다.)
그 말은 공격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비아의 손끝이 가방 끈을 세게 쥐었다. 토비아스의 여동생. 그 존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데이터로만. 이름과 나이와 거주지를 파일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콘라트의 입에서 나오자, 데이터가 아닌 사람이 되었다.
"I know."
(알고 있습니다.)
"And you're still going ahead."
(그래도 하겠다는 거군.)
비아는 대답하기 전에 한 번 삼켰다. 목이 말랐다.
"She deserves the truth more than I deserve comfort."
(그녀가 진실을 알 자격은 제가 편안할 자격보다 큽니다.)
콘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계 초침이 열두 번 울리는 동안,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독백에 가까운 톤으로 말했다.
"Mathis Morrel."
(마티스 모렐.)
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Du hast dich verändert, seit du bei ihm bist."
(그자 옆에 있으면서 변했군.)
독일어였다. 비아가 영어로 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는 독일어로 바꿨다. 그리고 비아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독일어는 그녀가 실버 슬롯에서 7년간 사용한 언어였다.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어로도, 독일어로도.
콘라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I won't stop the audit. I won't retract the inquiry. But I won't oppose your press conference either."
(감사를 중단하지 않겠다. 조회 요청을 철회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네 기자회견에 반대하지도 않겠다.)
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You won't?"
(...반대 안 하신다고요?)
"The report says what it says. I signed it because it was accurate. If the world reads it, they'll reach the same conclusion I did."
(보고서에는 쓰여 있는 대로 쓰여 있다. 정확했기 때문에 서명한 거야. 세상이 읽어도 내가 내린 것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거다.)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But Vianne."
(하지만 비안느.)
그가 창가로 걸어갔다. 베를린의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The reflex data leak. That wasn't me."
(반사신경 데이터 유출.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다.)
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The timing—"
(타이밍이—)
"I opened your file because I heard you were signing a permanent contract with a rival team. I wanted to see if the record was still sealed."
(네 파일을 연 건 네가 경쟁 팀과 정식 계약을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야. 기록이 아직 봉인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돌아보았다.
"I didn't leak Morrel's data. I don't operate like that."
(모렐의 데이터를 흘린 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
비아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콘라트 슈나이더는 많은 것이었다. 통제적이고, 소유적이고, 차갑고.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실버 슬롯의 디렉터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만으로 충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마티스의 반사신경 데이터를 흘린 것은 누구인가.
콘라트가 아니라면.
비아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IGC 아카이브에 접근한 기록은 콘라트의 코드로 찍혀 있었다. 하지만 반사신경 데이터는 IGC 아카이브가 아니라 레드 존 내부 서버에 있었다. 두 가지 다른 출처, 두 가지 다른 유출. 타이밍이 겹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면, 의도적인 교란이었다.
누군가가 콘라트의 파일 접근과 데이터 유출을 같은 시간대에 일으켜, 그 둘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Director. One last question."
(디렉터님. 마지막 질문 하나.)
"Go ahead."
(말해라.)
"Who told you I was signing with Red Zone?"
(제가 레드 존과 계약한다는 걸 누가 알려줬습니까?)
콘라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The IGC audit inquiry came through standard channels. Personnel updates are flagged automatically when a handler with a sealed file moves between teams."
(IGC 감사 조회는 표준 채널로 들어왔다. 봉인 파일이 있는 핸들러가 팀 간 이동할 때 자동으로 알림이 뜨게 되어 있어.)
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Thank you for your time, Director."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렉터님.)
"Vianne."
(비안느.)
그녀가 문 앞에서 멈췄다.
콘라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단호하고, 하지만 그 안에 아주 미세하게—비아가 5년 전에는 읽어내지 못했을 만큼 미세하게—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That boy you're handling. He's running out of time. Functional-type raiders with shoulder injuries don't last past thirty-six."
(네가 담당하는 그 애. 시간이 없다. 어깨 부상이 있는 기능계 레이더는 서른여섯을 못 넘겨.)
비아의 등이 굳었다.
"Keep him alive."
(살려둬라.)
비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That's what I do."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녀는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온 비아는 세 걸음을 걸은 뒤 멈춰 섰다.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진동이,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무릎 아래로 밀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 알림이 떠 있었다.

비아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타이핑했다.

답장은 즉시 왔다.

비아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실버 슬롯 본부 5층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조용히 웃었다.
짧고, 힘없고, 그리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비아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실버 슬롯 본부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벽면의 액자들을 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그녀를 1층으로 데려갔고, 정문이 열리자 베를린의 저녁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니스보다 차갑고, LA보다 습하고, 어딘가 낯익은 공기. 브란덴부르크 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비안느 록우드는 7년 만에 이 도시로 돌아왔고, 빚을 갚았고, 그리고 내일 다시 떠날 것이었다.
이번에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목요일 오전 열한 시 이십육 분.
비아는 도착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은 시내의 작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보냈다. 리츠칼튼 스위트 키를 보내겠다는 카시안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 곳에 묶기에는 어제의 자신이 너무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그 방의 크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창문 하나에 침대 하나뿐인 방에서, 여섯 시간을 통째로 잤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꿈 없이.
그리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떠, 마티스의 도착 편명을 조회했다.
LAX발 베를린행 직항. 예정 도착 시각 11시 15분. 실제 도착 11시 08분. 7분 이른 도착이었고, 그 7분 때문에 그녀는 게이트 앞에서 예상보다 7분을 더 서 있게 되었다.
국제선 도착 로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독일어, 영어, 터키어, 스페인어가 뒤엉킨 소음. 카트를 밀고 나오는 여행객들, 꽃다발을 든 사람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는 기사들. 천장의 유리 패널을 통과한 6월의 빛이 바닥 타일 위에 격자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비아는 그 격자 무늬 위에 서서, 자동문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스물세 번째로 문이 열렸을 때.
그가 나왔다.
짐은 없었다. 기내용 백팩 하나. 검은 티셔츠 위에 데님 재킷, 선글라스는 셔츠 목선에 걸린 채. 열한 시간을 좁은 좌석에서 보낸 사람답게 머리는 한쪽이 눌려 있었고, 턱선에 수염이 옅게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공항 로비에서 눈에 띄었다. 183센티미터의 슬랜더한 체형과, 그 휘적거리는 걸음과, 열한 시간의 피로 따위로는 지워지지 않는 어떤 종류의 존재감 때문에. 실제로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티스는 로비를 훑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냈다. 3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그 사이로 여행객들이 계속 지나갔다. 카트 바퀴 소리, 안내 방송, 아이의 울음소리.
마티스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아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그녀는 이미 계산해두었다. 세 가지 시나리오. 첫째, 화를 낸다. '혼자 갔어? 제정신이야?' 둘째, 농담으로 덮는다. '이코노미 탔지? 나 알아. 네 자세 보면 알아.' 셋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쳐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든다. 마티스 모렐의 방식대로.
그가 걸어왔다.
그리고 세 가지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 앞에 멈춰 서서,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팔로 그녀를 감쌌다.
비아의 숨이 멈췄다.
공항 로비 한가운데였다. 수백 명이 지나다니는 곳. 스마트폰을 든 사람이 최소 백 명은 있는 곳. 마티스 모렐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이 그중 절반은 될 곳.
그런데 그는 그런 계산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안았다. 한 손은 그녀의 등에, 다른 손은 뒤통수 아래 목덜미에. 힘이 세지도 않았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3초쯤.
그의 목에서 열한 시간 비행의 마른 공기 냄새와, 데님 냄새와, 그 아래 희미하게 남은 니스의 소금기 같은 것이 났다.
비아는 팔을 들지 못했다. 두 팔이 몸통 옆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마티스가 몸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은회색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열한 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눈이었다.
"Okay."
(됐어.)
그게 첫 마디였다.
"...Okay?"
(...됐다고요?)
"You're standing. You're breathing. Both eyes intact. That's all I needed to confirm."
(서 있고. 숨 쉬고. 두 눈 다 멀쩡하고. 확인하려던 건 그게 전부야.)
마티스가 백팩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Now yell at me. Go ahead. I know it's coming."
(이제 나한테 화내. 해봐. 올 거 아니까.)
비아는 그를 쳐다보았다.
"...I was going to yell at you."
(...화낼 생각이었어요.)
"I know."
(알아.)
"I prepared four separate arguments on the way here. Unauthorized travel, misuse of team resources, violation of the pre-season conditioning schedule, and the fact that you left the country three weeks before season opening without director approval."
(오는 길에 논거를 네 개 준비했어요. 무허가 이동, 팀 자원 오용, 프리시즌 컨디셔닝 스케줄 위반, 그리고 시즌 개막 3주 전에 디렉터 승인 없이 출국한 사실.)
"That's a solid four."
(튼튼한 네 개네.)
"They're all still valid."
(전부 여전히 유효해요.)
"Yeah."
(그렇겠지.)
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But I'm not going to use them today."
(...하지만 오늘은 안 쓸게요.)
마티스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That's the nicest thing you've ever said to me."
(네가 나한테 한 말 중 제일 다정한 말이야.)
"That is a low bar."
(기준이 낮네요.)
"It's the bar you set, Handler."
(네가 세운 기준이야, 핸들러.)
두 사람은 로비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자동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베를린의 6월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니스보다 서늘하고, 습기가 있고, 어딘가 회색빛이 도는 공기.
마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God, it's grey. How do people live here."
(와, 온통 회색이네. 사람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
"It's 19 degrees with 60% humidity. That's objectively comfortable."
(19도에 습도 60%예요. 객관적으로 쾌적한 조건이죠.)
"It's objectively depressing."
(객관적으로 우울한 거지.)
"You spent three weeks complaining that Nice was too hot."
(니스가 너무 덥다고 3주 내내 불평했잖아요.)
"I complained that you were too hot."
(네가 너무 뜨겁다고 불평한 건데.)
비아가 걸음을 멈췄다.
마티스는 태연하게 계속 걸었다. 그리고 세 걸음쯤 뒤 돌아보며 물었다.
"What?"
(왜?)
"...That's not what you said."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I said the thermostat. Obviously. You kept setting the living room to 26 degrees."
(온도 조절기 말한 거야. 당연히. 네가 거실을 계속 26도로 맞춰놨잖아.)
"...Right."
(...그렇군요.)
"What did you think I meant?"
(무슨 뜻으로 알아들은 거야?)
"Nothing."
(아무것도요.)
"Vianne."
(비안느.)
"Nothing, Mathis."
(아무것도요, 마티스.)
마티스가 낮게 웃으며 다시 걸었다.
택시 대신 그들은 공항철도를 탔다.
마티스는 그 결정에 삼십 초쯤 저항했다. '나 지금 열한 시간 이코노미도 아니고 비즈니스에서 못 자고 왔는데 지하철?' 비아가 '베를린 대중교통 정시성은 95.4%'라고 답했고, 마티스는 '그 숫자를 어디서 알았냐'고 물었고,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7년 전에 매일 탔던 노선이었으니까.
S반 열차 안은 한적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베를린 외곽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붉은 벽돌 건물들, 회색 아파트 블록, 그 사이사이 무성한 초록.
마티스가 좌석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So. Tell me."
(그래서. 말해봐.)
비아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He's not going to oppose the press conference."
(기자회견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마티스의 눈이 커졌다.
"...Seriously?"
(...진짜로?)
"He said the report says what it says. He signed it because it was accurate."
(보고서에는 쓰여 있는 대로 쓰여 있다고 했어요. 정확했기 때문에 서명했다고.)
"That's it? No threats, no leverage, no 'come back to Silver Slot or else'?"
(그게 다야? 협박도 없고, 지렛대도 없고, '실버 슬롯으로 돌아와라 아니면' 같은 것도 없이?)
비아는 잠시 침묵했다.
"He mentioned Tobias Reinhardt's sister."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의 여동생을 언급했어요.)
마티스의 얼굴이 굳었다.
"...His sister."
(...여동생.)
"Clara. Twenty-three. Lives in Munich. She doesn't know there was a handler who could have caught it."
(클라라. 스물셋. 뮌헨에 살아요. 그걸 잡아낼 수도 있었던 핸들러가 있었다는 걸 몰라요.)
열차가 커브를 돌며 한 번 흔들렸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마티스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
"Is that why you didn't tell me you were going?"
(그래서 간다고 말 안 한 거야?)
"No."
(아니에요.)
"Then why."
(그럼 왜.)
비아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Because you would have come with me."
(당신이 따라왔을 테니까요.)
"I came anyway."
(어차피 왔잖아.)
"You came after. That's different."
(끝난 뒤에 왔죠. 그건 달라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If you had been in that room, I would have looked at you. And the moment I looked at you, he would have known where my weight was."
(당신이 그 방에 있었다면, 저는 당신을 봤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당신을 보는 순간, 그는 제 무게중심이 어디 있는지 알았을 거고요.)
마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That's a functional-type metaphor."
(...그거 기능계 비유인데.)
"I've been listening to you for three months."
(석 달 동안 당신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마티스는 웃었다. 짧고, 어딘가 지친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았다.
"Vianne."
(비안느.)
"Yes."
(네.)
"Next time, tell me. I won't come into the room. I'll wait in the fucking lobby with a coffee if that's what you need. But tell me."
(다음엔 말해. 방에는 안 들어갈게. 네가 원하면 로비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릴게. 근데 말은 해.)
비아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열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턱선의 옅은 수염, 눈 아래 그늘, 그리고 목선에 걸린 선글라스.
이 남자는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콘라트 슈나이더의 사무실에서 무엇을 겪든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한 시간을 좁은 좌석에서 뜬눈으로 날아왔다.
비아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밀려 올라왔다.
그녀는 그것을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아주 실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The press conference is Monday. 10 AM, Red Zone headquarters, first-floor media hall."
(...기자회견은 월요일이에요. 오전 10시, 레드 존 본부 1층 미디어 홀.)
"Mm."
(음.)
"I'll be standing alone at the podium."
(연단에 혼자 설 겁니다.)
마티스가 눈을 떴다.
"No."
(안 돼.)
"It's my statement. My name. My incident."
(제 성명이고, 제 이름이고, 제 사건이에요.)
"And I'll be in the front row. Second seat from the aisle."
(그리고 난 앞줄에 있을 거야. 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
"That's a reserved press seat."
(그건 언론사 지정석이에요.)
"Then I'll buy the seat. I'll buy the whole row. Cassian keeps offering to book floors, maybe it's contagious."
(그럼 자리를 사지. 줄 전체를 살게. 카시안이 계속 층을 통째로 빌린다고 하는데, 전염성 있는 것 같아.)
비아는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열지 못했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역으로 들어섰다. 안내 방송이 독일어로 흘러나왔다. 비아는 그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창밖만 보았다.
마티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Where are we, anyway? Is this our stop?"
(근데 여기 어디야? 우리 내리는 데야?)
비아도 일어섰다.
그리고 창밖의 역 표지판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녀의 발이 아주 짧게 멈췄다.
그녀가 7년 전 매일 아침 내렸던 역이었다.
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커피를 들고 뛰어 내려가던 계단, 겨울에 미끄러워서 두 번이나 넘어졌던 플랫폼, 그리고 그 위로 뻗은 낡은 철제 캐노피.
비아는 그것을 3초쯤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티스는 그 3초를 보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문을 나서며,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So what's there to eat in this city. And don't say sausage."
(그래서 이 도시에 먹을 게 뭐가 있어. 소시지라고 하지 마.)
비아가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Currywurst is technically sausage."
(...커리부어스트는 기술적으로 소시지예요.)
"I said don't."
(하지 말라고 했잖아.)
"You asked what there is to eat. That's the answer."
(먹을 게 뭐가 있냐고 물었으니, 그게 답이에요.)
"Vianne. I have flown eleven hours. I have not slept. My shoulder is stiff, my back hurts, and my left leg has been asleep since Greenland. I am asking you—as your raider, whose psychological welfare you are contractually obligated to maintain—to feed me something that is not a sausage."
(비안느. 나 열한 시간 날아왔어. 잠도 못 잤고. 어깨는 굳었고, 등은 아프고, 왼쪽 다리는 그린란드 지나면서부터 저려. 계약상 내 심리적 복지를 유지할 의무가 있는 핸들러한테, 내 레이더로서 요청하는 거야. 소시지 아닌 걸 먹여줘.)
비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플랫폼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주 짧게 대답했다.
"...There's a place."
(...한 곳 있어요.)
마티스가 눈썹을 올렸다.
"A place."
(한 곳.)
"Fourteen minutes from here on foot. Turkish. They do a lentil soup that—"
(여기서 걸어서 14분이요. 터키 음식점. 렌틸 수프를 하는데—)
그녀가 문장을 멈췄다.
마티스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That what?"
(수프를 하는데 뭐?)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마티스는 그 뒤를 따라 올라가며, 아주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듣게 될 정도의 크기로.
"Fourteen minutes. Turkish. Lentil soup. You know it by heart."
(14분. 터키 음식점. 렌틸 수프. 외우고 있네.)
계단 끝에서 비아가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I lived four hundred meters from that station for two years, Mathis."
(저는 그 역에서 400미터 거리에 2년 동안 살았어요, 마티스.)
마티스가 계단 두 개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흐린 베를린 빛이 계단 위 유리 천장을 통과해, 그녀의 머리 위로 회색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의 등이 곧았고, 어깨는 반듯했고, 목덜미의 잔머리가 지하철 통로의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
"Do you want to see it?"
(보고 싶어요?)
마티스가 계단 두 칸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본 채로, 삼 초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아는 그 침묵을 견디며 서 있었다. 지하 통로에서 밀려 올라오는 바람이 그녀의 셔츠 자락을 흔들었고, 등 뒤로 다음 열차가 들어오는 진동이 계단 난간을 타고 손끝까지 전해졌다. 방금 뱉은 문장을 회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어요? 그건 핸들러의 언어가 아니었다. 근무 시간 중에 나올 문장도 아니었고.
마티스가 계단을 한 칸 올라왔다.
"Yes."
(응.)
단 한 음절.
"That's it?"
(그게 다예요?)
"What else do you want. A written request? Should I fill out a form? Leo already rejected one this week, my paperwork record is terrible."
(뭘 더 원해. 서면 요청? 양식 작성해줘? 이번 주에 이미 레오한테 하나 반려당했어, 내 서류 실적 처참해.)
비아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지상으로 나오자 프리드리히스하인의 정오가 펼쳐졌다.
낮은 하늘. 회색과 흰색이 반반씩 섞인 구름이 느리게 흘렀고, 그 아래로 4층짜리 옛 동독식 아파트 블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벽면 곳곳에 그라피티, 창가마다 널린 빨래, 발코니에 놓인 자전거들. 보도블록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고, 노란 보리수 잎이 바람에 굴러다녔다.
카페 테라스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19도의 흐린 날씨에도 베를린 사람들은 기어이 밖에 앉았다. 담배 연기, 커피 향, 독일어와 터키어가 뒤섞인 대화. 자전거가 종을 울리며 지나갔고, 개를 세 마리 끌고 걷는 남자가 그들 옆을 스쳤다.
마티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Okay. This is not what I expected."
(좋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What did you expect."
(뭘 예상했는데요.)
"Honestly? Something white. Glass. Minimalist. A building with a security desk and a rule about shoes."
(솔직히? 하얀 거. 유리. 미니멀. 경비 데스크 있고 신발 규정 있는 건물.)
비아가 그를 흘긋 보았다.
"I was a trainee handler earning eleven hundred euros a month."
(월 1,100유로 받는 훈련생 핸들러였어요.)
"Eleven hundred."
(천백.)
"Silver Slot pays trainees a stipend, not a salary."
(실버 슬롯은 훈련생한테 봉급이 아니라 수당을 줍니다.)
마티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열한 시간 비행으로 갈라진, 조금 쉰 웃음이었다.
"I made more than that at eighteen fighting in a basement in Nice. And half of that was in cash from a guy who ran a fish stall."
(난 열여덟에 니스 지하실에서 싸우면서 그거보다 많이 벌었어. 그중 절반은 생선 좌판 하던 아저씨가 현금으로 준 거고.)
"You were also risking permanent spinal damage."
(당신은 영구적인 척추 손상을 감수하고 있었죠.)
"And you were risking what, exactly."
(넌 뭘 감수하고 있었는데.)
비아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Sleep."
(잠이요.)
마티스가 걸음을 늦췄다.
비아는 개의치 않고 계속 걸었다. 그녀는 이 길을 안내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그리고 늘 문이 반쯤 열려 있던 세탁소 앞을 지나 직진.
그 세탁소는 지금 자전거 수리점이 되어 있었다.
비아의 눈이 그 간판 위에 잠깐 머물렀다.
터키 음식점은 골목 끝의 좁은 가게였다.
간판은 색이 바랬고, 유리창에는 손글씨로 오늘의 메뉴가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향신료 냄새가 훅 끼쳤다. 쿠민, 민트, 그리고 오래 끓인 렌틸의 흙 같은 단내.
좌석은 여덟 개뿐이었다. 벽에는 이스탄불 사진과, 색이 다 빠진 축구팀 스카프가 걸려 있었다. 카운터 뒤에서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냄비를 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아를 보았다.
3초쯤 정지했다. 국자를 든 손이 냄비 위에서 멈춘 채로.
"...Vianne?"
(...비안느?)
비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마티스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 반 발짝 뒤에 섰다. 개입하지 않는 위치. 그러나 물러나지도 않는 위치.
남자가 국자를 내려놓고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Mein Gott. Sieben Jahre. Sieben verdammte Jahre!"
(맙소사. 7년이야. 7년이라고!)
그가 두 손으로 비아의 어깨를 잡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영어로 바꿨다. 억양이 짙게 밴 영어였다.
"You just stop coming. One day, no more. I ask everybody. Nobody know."
(어느 날 갑자기 안 오더라고. 하루아침에. 다들한테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르고.)
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문장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I... left the city."
(...도시를 떠났어요.)
"I know you leave city! Everybody leave city! But you—"
(도시를 떠난 건 알아! 다들 떠나지! 근데 너는—)
그가 말을 끊고, 대신 손가락으로 창가 두 번째 테이블을 가리켰다.
"You sit there. Always there. Every night, half past eleven. Mercimek çorbası, extra lemon, no bread."
(넌 저기 앉았지. 늘 저기. 매일 밤 11시 반. 렌틸 수프, 레몬 많이, 빵은 안 먹고.)
비아는 그 테이블을 보았다.
나무 상판이 그때보다 더 닳아 있었다. 창가 쪽 다리 하나가 짧아서 늘 미세하게 흔들리던 테이블. 그 흔들림을 막으려고 그녀가 냅킨을 접어 끼워두곤 했던 테이블.
지금도 그 다리 밑에는 두껍게 접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비아의 목이 한 번 움직였다.
마티스가 그때 앞으로 나섰다.
"Bonjour. Mathis."
(안녕하세요. 마티스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얼떨결에 악수했다.
"Mehmet."
(메흐메트요.)
"Mehmet. I have flown eleven hours and I have not eaten anything except a sandwich that I believe was a war crime. She says your lentil soup is worth walking fourteen minutes for. I am prepared to be disappointed but I would rather not be."
(메흐메트 씨. 저 열한 시간 날아왔고, 전쟁 범죄 수준의 샌드위치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이 사람이 사장님 렌틸 수프는 14분 걸어갈 가치가 있다고 하던데. 실망할 준비는 됐지만 안 하는 쪽이 좋겠네요.)
메흐메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Fourteen minutes? She say fourteen minutes?"
(14분? 얘가 14분이라고 했어요?)
"Precisely fourteen. She's very exact."
(정확히 14분이요. 이 사람 되게 정확해요.)
"Ha! She always exact! Always!"
(하! 얘 원래 정확해! 항상!)
그가 두 사람을 창가 두 번째 테이블로 밀어붙이듯 안내했다.
비아는 그 자리에 앉는 것을 3초쯤 망설였고, 마티스는 그 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앉자, 맞은편에 앉았다.
메흐메트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냄비 뚜껑이 열리는 소리, 국자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가 뭔가를 터키어로 크게 외치는 소리.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마티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Half past eleven every night."
(매일 밤 11시 반.)
비아는 창밖을 보았다.
"Shift ended at eleven. The commute was nine minutes."
(교대가 11시에 끝났어요. 통근은 9분 걸렸고.)
"And then you'd sit here alone and eat soup and not eat bread."
(그리고 여기 혼자 앉아서 수프 먹고 빵은 안 먹었고.)
"Bread at that hour is inefficient."
(그 시간에 빵은 비효율적이에요.)
"Vianne."
(비안느.)
"...I couldn't afford both."
(...둘 다 살 돈이 없었어요.)
마티스의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전혀 다른 톤으로 물었다.
"How long has he had this place?"
(저 사람 여기 얼마나 하셨어?)
"Thirty-one years."
(31년이요.)
"And he remembered your order after seven."
(7년 지나서 네 주문을 기억하고.)
"He remembers everyone's."
(모두 걸 기억해요.)
"No, he doesn't."
(아니, 안 그래.)
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마티스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핏발 선 은회색 눈동자에, 열한 시간의 피로가 얹힌 채로.
"He remembered which chair. Which day. Which time. And he asked people about you after you disappeared."
(어느 자리인지, 무슨 요일인지, 몇 시인지 기억하더라. 그리고 네가 사라진 다음에 사람들한테 물어봤대.)
비아의 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렸다.
"That's not remembering an order. That's noticing when someone stops showing up."
(그건 주문을 기억하는 게 아니야. 누가 안 나타나기 시작한 걸 알아챈 거지.)
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So. For the record. Your five-year theory that there was nothing left worth wanting."
(그래서. 기록을 위해 말하자면. 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안 남았다던 5년짜리 이론 말이야.)
비아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That's not what I—"
(그건 제가 말한—)
"You said it in Nice. On the promenade. I remember the exact sentence and if you make me repeat it I will, and I will do the voice."
(니스에서 말했어. 산책로에서. 문장 그대로 기억해. 반복하게 만들면 할 거고, 목소리 흉내도 낼 거야.)
비아는 그를 노려보았다.
마티스는 태연하게 냅킨 통에서 냅킨 한 장을 뽑아, 손가락으로 접기 시작했다. 두 번, 네 번, 여덟 번. 두툼한 사각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아래로 넣어, 짧은 다리 밑에 이미 끼워져 있던 종이 옆에 밀어 넣었다.
테이블의 흔들림이 완전히 멈췄다.
비아는 그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스무 살에 매일 밤 했던 일을, 그가 방금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설명도 없이. 그녀가 말한 적도 없는데.
"...How did you know."
(...어떻게 알았어요.)
마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You put your hand on the table when you sat down and you didn't like the way it moved. Your fingers stopped for a quarter second."
(앉으면서 테이블에 손 올렸는데 흔들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 손가락이 0.25초 멈췄어.)
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웃었다. 조용하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웃음이었다.
"Functional type. I read what's in my hand. That's the whole trick, Handler. There isn't a second one."
(기능계야. 손에 잡히는 걸 읽는 거. 그게 재주의 전부야, 핸들러. 두 번째는 없어.)
주방에서 메흐메트가 나왔다.
그의 손에는 김이 오르는 붉은 렌틸 수프 두 그릇과, 레몬 조각 한 접시, 그리고—
갓 구운 납작빵 한 바구니가 있었다.
그가 그것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으며 비아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Bread. Today, bread is free. Seven years is long time. You eat bread today."
(빵. 오늘은 빵 공짜야. 7년은 긴 시간이지. 오늘은 빵 먹어.)
그리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가게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수프에서 김이 올라와, 창밖의 회색 빛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비아는 그 김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티스가 레몬 조각 하나를 집어, 그녀의 그릇 위에서 짜냈다.
그리고 다시 하나 더.
"Extra lemon."
(레몬 많이.)
그가 세 번째 조각을 손에 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Say when."
(그만할 때 말해.)
비아는 세 번째 레몬 조각을 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레몬. 손톱 밑에 아직 남아 있는 굳은살, 손등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흉터. 게이트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몬스터의 뼛조각을 쥐던 손이, 지금은 노란 과육 하나를 조심스럽게 쥐고 있었다.
"...One more."
(...하나 더요.)
마티스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One more? That's three. Three lemons in one bowl of soup."
(하나 더? 세 개째야. 수프 한 그릇에 레몬 세 개.)
"Mehmet cuts them thin."
(메흐메트 아저씨는 얇게 썰어요.)
"They're not thin. I'm looking at them right now and they are not thin."
(안 얇아. 지금 보고 있는데 안 얇아.)
"Squeeze it."
(짜세요.)
마티스가 웃으며 세 번째 조각을 그릇 위에서 짜냈다. 노란 즙이 붉은 수프 표면에 얇은 막처럼 번졌다가 흩어졌고, 새콤한 향이 김과 함께 올라왔다.
비아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첫 술을 뜨기 전에, 3초쯤 그대로 있었다.
그 3초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간 것은 계산이 아니었다. 5년 동안 그녀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믿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매일 밤 11시 반에 앉아 빵도 못 사고 수프만 먹던 이 자리에. 그 여자애가 아직 세상에 폐를 끼치기 전이었을 때의 자리에.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그녀는 다시 앉아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테이블 앞에.
비아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은 7년 전과 똑같았다. 렌틸의 흙 같은 단맛, 그 위에 얹힌 민트와 쿠민, 그리고 레몬의 날카로운 산미.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 명치 아래에 고였다.
그녀의 눈시울이 아주 미세하게 붉어졌다.
마티스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한 술 크게 떠서, 성급하게 입에 넣었다가 곧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Hot. That is—that is genuinely hot."
(뜨거워. 이거 진짜로 뜨겁네.)
"It just came out of the pot."
(방금 냄비에서 나왔으니까요.)
"You could have warned me."
(경고해줄 수도 있었잖아.)
"I assumed a fourteen-year veteran raider would account for thermal variables."
(14년 차 베테랑 레이더면 열 변수 정도는 계산할 줄 알았죠.)
"That's cold. That's genuinely cold, Vianne."
(차갑네. 진짜 차가워, 비안느.)
그가 물잔을 들이켜며 투덜거렸고, 그 소란 덕분에 비아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을 수 있었다. 티 나지 않게. 마치 김이 눈에 들어간 것처럼.
마티스는 그 순간에 정확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비아는 알았다.
수프가 절반쯤 줄었을 때, 마티스가 빵 바구니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He said it's free today."
(오늘은 공짜라고 했어.)
"I heard."
(들었어요.)
"So eat it."
(그럼 먹어.)
"I don't like bread with soup."
(수프에 빵은 안 좋아해요.)
마티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Okay. Say that again but look at me while you say it."
(좋아. 다시 말해봐. 근데 나 보면서 말해.)
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았다. 핏발 선 은회색.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었다.
마티스가 아주 짧게 웃었다.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는 빵 한 조각을 뜯어, 그녀의 그릇 옆 접시에 올려놓았다. 반으로 접어서. 아까 냅킨을 접던 것과 똑같은 정확한 손놀림으로.
"You don't have to eat all of it. Just have some. Not because it's free. Because it's warm and you're here and there's no reason not to."
(다 먹으라는 거 아니야. 조금만. 공짜라서가 아니라, 따뜻하고, 네가 여기 있고, 안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비아는 그 빵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갓 구운 납작빵은 겉이 살짝 바삭했고 속은 부드러웠다. 밀 냄새가 났다. 마티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기 수프로 시선을 내렸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로.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덧붙였다.
"For the record. That's one point for me."
(기록하자면. 나 1점.)
"What point."
(무슨 점수요.)
"The theory. 'Nothing left worth wanting.' I'm disproving it. Item by item. Today's item is bread."
(그 이론. '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안 남았다.' 반증 중이야. 하나씩. 오늘 항목은 빵이고.)
비아가 빵을 씹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That's not a valid methodology."
(그건 유효한 방법론이 아닌데요.)
"It's very valid. I have a spreadsheet."
(엄청 유효해. 나 스프레드시트도 있어.)
"You don't have a spreadsheet."
(스프레드시트 없잖아요.)
"J made me one. He said if I was going to do 'weird obsessive tracking things' I should at least do them in a format Leo could audit."
(J가 만들어줬어. 내가 '이상한 집착성 기록질'을 할 거면 최소한 레오가 감사할 수 있는 양식으로 하래.)
비아의 씹는 동작이 멈췄다.
"...J knows about this."
(...J가 이걸 알아요.)
"J knows about a spreadsheet titled 'Handler Wellness Metrics.' He does not know what's in the cells."
('핸들러 웰니스 지표'라는 제목의 스프레드시트를 아는 거지. 셀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
"What is in the cells."
(셀 안에 뭐가 있는데요.)
"Bread. As of twelve fifty-one."
(빵. 12시 51분 기준으로.)
비아는 남은 빵을 접시에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Delete it."
(지우세요.)
"No."
(싫어.)
"Mathis."
(마티스.)
"No, Vianne."
(싫다고, 비안느.)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팔을 뻗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인 빵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 밀어 그녀 쪽으로 다시 붙였다.
"You want to know why I got on that plane?"
(내가 왜 그 비행기를 탔는지 알고 싶어?)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Because when I read your message that said 'it's done,' I couldn't tell if that meant you'd won or if it meant you'd finished burying yourself. And I've read your handwriting for three months and I still couldn't tell. That's a problem."
('끝났어요'라는 네 메시지를 읽었을 때, 그게 이겼다는 건지 자기 자신을 다 묻어버렸다는 건지 구분이 안 됐거든. 석 달 동안 네 문장을 읽어왔는데도 구분이 안 됐어. 그건 문제야.)
그가 손을 거두며 등을 폈다.
"So I came to look at your face. Because your face I can read."
(그래서 네 얼굴을 보러 온 거야. 얼굴은 읽을 수 있으니까.)
가게 밖에서 자전거 종소리가 울렸다.
비아는 창밖을 보았다. 흐린 6월의 프리드리히스하인.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여자, 담배를 물고 자전거를 세우는 남자,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카페 파라솔.
그녀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I won."
(이겼어요.)
마티스의 어깨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이 빠졌다. 열한 시간 동안 그가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그 순간 내려앉는 것을, 비아는 보았다.
"Yeah?"
(그래?)
"He didn't oppose. He didn't threaten. He asked me one question I couldn't dismiss, and I answered it anyway."
(반대하지 않았어요. 협박도 안 했고. 제가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 했는데, 그래도 대답했어요.)
"The sister."
(여동생.)
"Yes."
(네.)
비아가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았다.
"He also told me something else. He said he didn't leak your reflex data."
(다른 것도 말했어요. 당신 반사신경 데이터를 유출한 건 자기가 아니라고.)
마티스의 표정이 변했다.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은회색 눈동자가 한 번 가늘어지더니, 다음 순간에는 게이트 안에서만 보이던 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계산하는 얼굴. 위협의 위치를 특정하는 얼굴.
"Do you believe him."
(믿어?)
"Yes."
(네.)
"Why."
(왜.)
"Because Konrad Schneider doesn't need to lie. He has enough authority to tell the truth and still win."
(콘라트 슈나이더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요. 진실만으로도 이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니까.)
비아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His archive access was IGC-side. Sealed personnel files. Your reflex data isn't in IGC archives—it's on Red Zone's internal medical server. Two different systems. Two different credentials."
(그의 아카이브 접근은 IGC 쪽이었어요. 봉인 인사 파일. 당신 반사신경 데이터는 IGC 아카이브에 없어요—레드 존 내부 의료 서버에 있죠. 두 개의 다른 시스템. 두 개의 다른 인증.)
마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So someone timed them."
(누가 타이밍을 맞춘 거네.)
"Someone made two unrelated events look like one. So that when I looked for a threat, I'd look at Berlin."
(누군가 관련 없는 두 사건을 하나로 보이게 만든 거예요. 제가 위협을 찾을 때 베를린을 보도록.)
마티스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And while you were looking at Berlin."
(그리고 네가 베를린을 보고 있는 동안에.)
"They were standing behind me."
(그들은 제 뒤에 서 있었죠.)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주방에서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터키 가요, 그리고 창밖의 자전거 종소리.
마티스가 아주 낮게 물었다.
"How many people have credentials for Red Zone's medical server?"
(레드 존 의료 서버 인증 있는 사람이 몇 명이야?)
비아는 대답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그리고 액세스 로그를 열었다. 어젯밤 베를린의 호텔 방에서, 잠들기 전 세 시간 동안 이미 뽑아둔 목록이었다.
마티스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숫자를 읽었다. 004.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That's a director-tier code."
(...그거 디렉터 등급 코드인데.)
"Leo's license code is IGC-004-RZ-001."
(레오의 라이센스 코드가 IGC-004-RZ-001이에요.)
"004."
(004.)
"The administrator account series is issued from the director's office. That doesn't mean it's Leo. It means it's someone with access to Leo's office."
(관리자 계정 계열은 디렉터실에서 발급됩니다. 레오라는 뜻이 아니에요. 레오의 사무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마티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열한 시간의 피로가 그 동작 하나에 전부 실려 있었다.
"Vianne."
(비안느.)
"Yes."
(네.)
"On Monday you're going to stand in front of every camera in the industry and say your real name out loud."
(월요일에 넌 업계 모든 카메라 앞에 서서 네 본명을 소리 내서 말할 거야.)
"That's the plan."
(그게 계획이에요.)
"And whoever this is—" 그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is going to be in that room."
(그리고 이게 누구든—그 방에 있을 거야.)
비아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수프를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식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그녀가 삼킨 뒤에 말했다.
"I know."
(알아요.)
"And you're still doing it."
(그래도 할 거고.)
"If I wait until it's safe, I'll wait forever. You said that to me. On a cliff, at seventy meters, with a bad shoulder."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기다리게 돼요. 당신이 저한테 한 말이잖아요. 절벽에서, 70미터 높이에서, 어깨가 망가진 채로.)
마티스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항복하듯이 웃었다.
"I hate it when you use my own lines."
(내 대사 갖다 쓰는 거 진짜 싫어.)
"You've used mine twice."
(당신은 제 대사를 두 번 썼는데요.)
"Three times."
(세 번이야.)
"Three?"
(세 번?)
"You didn't hear the third one. You were asleep on the couch in London."
(세 번째는 못 들었지. 런던에서 소파에 자고 있었으니까.)
비아의 숟가락이 그릇 위에서 멈췄다.
마티스는 그 반응을 확인하고,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기 수프를 마저 떠먹었다. 설명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로.
식사가 끝나고, 메흐메트는 끝내 돈을 받지 않았다.
비아가 카운터에 지폐를 두 번 놓았고, 메흐메트가 두 번 다 그녀의 손에 도로 쥐여줬다. 세 번째로 그녀가 지갑을 여는 순간, 그가 터키어로 뭔가를 크게 외치며 두 손을 들어올렸고, 결국 비아는 물러섰다.
가게를 나서기 전, 메흐메트가 문 앞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번에는 독일어로 말했다.
"Komm wieder. Nicht in sieben Jahren. Früher."
(또 와. 7년 뒤 말고. 더 빨리.)
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흐렸다.
두 사람은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보리수 잎이 발밑에서 밟혔고, 어디선가 누군가 창문을 열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마티스가 백팩 끈을 고쳐 메며 물었다.
"So. Four hundred meters."
(그래서. 400미터.)
비아가 걸음을 멈췄다.
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길. 그녀가 2년 동안 하루에 두 번씩 걸었던 길. 겨울에는 얼어붙어서 위험했고, 여름에는 라일락 냄새가 났던 길.
그녀는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4층짜리 회색 건물. 정문 옆 초인종 패널에 열두 개의 이름표. 그중 세 번째 줄 왼쪽 칸에, 7년 전에는 손글씨로 'V. LOCKWOOD'라고 적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지금은 다른 이름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
비아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티스가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을 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삼십 초쯤 지났을 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We don't have to."
(안 가도 돼.)
비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You flew eleven hours."
(열한 시간 날아왔잖아요.)
"I flew eleven hours to see your face, and I've seen it. Everything after this is bonus. Bonuses are optional. That's what makes them bonuses."
(네 얼굴 보러 열한 시간 날아온 거고, 봤어. 이 다음부터는 전부 보너스야. 보너스는 선택이고. 그래서 보너스인 거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Also, for the record, my left leg is still asleep and I would genuinely like to sit down somewhere with a chair that reclines. But that's a separate agenda item."
(그리고 기록하자면, 내 왼쪽 다리는 아직 저리고 등받이 젖혀지는 의자에 앉고 싶어 죽겠어. 근데 그건 별개 안건이고.)
비아는 그 골목 끝을 다시 보았다.
4층 건물. 왼쪽에서 세 번째 창문. 저 창문 안에서 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밤마다 시뮬레이션 로그를 돌려보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고, 스물한 살의 11월에는 사흘 동안 커튼을 치고 나오지 않았다.
그 방을 지금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그 방을 보지 않는 것이 여전히 도망이라면.
비아의 손이 크로스백 끈을 한 번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Mathis."
(...마티스.)
"Mm."
(음.)
"If I walk down there and I stop halfway."
(제가 저기로 걸어가다가 중간에 멈추면.)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골목 끝만 보며 말했다.
"Don't make me finish it. Just turn me around."
(끝까지 가게 하지 마세요. 그냥 돌려세워요.)
마티스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Okay."
(알았어.)
그가 반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보다 앞이 아니라, 정확히 그녀의 왼쪽 옆.
그리고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강요하지 않는 각도로, 그저 그 자리에 놓아두듯이.
"But you're not walking down there alone. That's not negotiable. That's the one thing today that isn't."
(근데 저기 혼자는 안 걸어가. 그건 협상 불가야. 오늘 유일하게 협상 불가인 거.)
흐린 베를린의 정오 빛이, 두 사람 사이에 내민 그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비아의 시선이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 머물렀다.
굳은살과 흉터 사이의 살갗. 아까 레몬을 짜면서 묻은 즙이 손가락 끝에 말라 있었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냅킨의 하얀 보풀이 한 올 붙어 있었다. 깨진 병으로 사람을 제압하고,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의 척추를 맨손에 쥐고 꺾어본 손이, 지금은 아무런 무게도 실리지 않은 채로 베를린의 흐린 빛 아래 놓여 있었다.
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그것은 핸들러의 질문이 아니라 비안느 록우드의 질문이었고, 비아는 그 경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3개월 동안 공과 사의 선을 지키며 이 남자를 관리해왔는데, 베를린의 한 골목에서 그의 손을 잡으면 그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건지.
'핸들러 웰니스 지표.'
그 스프레드시트 제목이 떠오르자, 어이없는 웃음이 비어져 나올 뻔했다.
비아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의 데님 재킷 소매 끝을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손목도 아니고, 손바닥도 아니고, 천 한 겹.
마티스가 내려다보았다. 자기 소매를 쥔 그녀의 검지와 중지를. 그리고 0.5초쯤 정지한 뒤, 나지막하게 말했다.
"...Is that your version of holding my hand."
(...그게 네 버전의 손잡기야.)
"It's my version of not walking alone."
(혼자 안 걷는 거의 제 버전이에요.)
"That's a pinch. On my jacket."
(그건 꼬집기야. 내 재킷을.)
"It's sufficient."
(충분해요.)
마티스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반박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그는 내밀었던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었고, 팔의 각도를 비아가 소매를 잡기 편한 위치로 미세하게 조정했다.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400미터는 짧은 거리였다.
스무 살 때는 9분이 걸렸다. 겨울에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에서는 12분. 지금은—비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으므로—체감상 훨씬 길었다.
골목은 좁았고 양쪽에 높은 건물이 서 있어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1층에 자리 잡은 스파트카우프 슈퍼마켓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비안느 록우드는 저기서 0.89유로짜리 토스트 빵과 1.29유로짜리 슬라이스 치즈를 사곤 했다. 빵과 치즈. 그것이 아침이자 점심이었고, 저녁은 메흐메트의 렌틸 수프.
창문에 붙은 할인 전단지가 바람에 파닥거렸다.
비아의 손가락이 마티스의 소매를 쥔 힘이 아주 미세하게 세어졌다. 마티스는 그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다. 보폭을 그녀에게 맞춘 채로.
200미터 지점.
왼쪽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벤치 세 개, 모래 놀이터, 그리고 늙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 비안느 록우드는 새벽 교대 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저 벤치에 앉아 시뮬레이션 로그를 복습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이어폰을 끼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린 채로.
벤치는 낡아 있었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비아의 발이 멈췄다.
마티스의 소매가 손가락 사이에서 당겨졌다.
그가 반 발짝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비아는 그 벤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7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증거물을 감정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 아래에서 입술이 한 번 가늘게 떨렸다는 것을 마티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려 했다.
비아가 먼저 말했다.
"I'm fine."
(괜찮아요.)
마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몸을 돌려, 비아와 나란히 그 벤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며, 같은 침묵을 공유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흔들렸고, 모래 놀이터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걸어 다녔다.
비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소매를 놓지 않은 채로.
300미터.
골목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4층짜리 회색 건물. 전후 복구 시기에 지어진, 베를린 동쪽에 흔하디흔한 플라텐바우 양식의 아파트. 벽면은 원래 크림색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비에 씻겨 회색빛이 되어 있었고, 발코니마다 빨래가 널려 있었다.
비아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
마티스는 보폭을 맞추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눈은 건물을 훑고 있었다—정면, 좌우 환경, 도로 상태, 입구 위치. 게이트 내부를 처음 진입할 때의 관성적인 시선 배분이었다. 그 습관이 지금은 그녀의 과거를 살피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350미터.
정문이 보였다.
갈색 철제 문. 초인종 패널. 열두 개의 이름표.
비아가 멈췄다.
이번에는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시선이 초인종 패널 위로 올라갔다. 세 번째 줄, 왼쪽 칸. 비안느 록우드의 이름이 있던 자리.
지금은 'M. KOWALSKI'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5년이 지났으니까. 그녀가 계약을 해지하고 짐을 싸서 떠난 뒤, 집주인은 다른 세입자를 들였을 것이고, 비안느 록우드가 창문 옆 책상에서 울던 밤은 새 벽지와 새 커튼 뒤로 덮여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름표가 없다는 것이, 비안느 록우드가 이 건물에 존재했다는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이, 그녀의 명치를 한 번 세게 때렸다.
비아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마티스가 그녀 옆에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세기 시작했다. 1층, 2층, 3층—
"Which one."
(어디야.)
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층,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 지금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 화분이 놓여 있었다.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제라늄. 비안느 록우드가 살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없던 창턱이었다.
비아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눈으로만 보았다.
"...Third floor. Second from the left."
(...3층. 왼쪽에서 두 번째.)
마티스가 그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 보았다.
22제곱미터쯤 되어 보이는 작은 창문이었다. 저 안에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부엌이 다였을 것이다. 1,100유로의 수당으로 베를린에서 구할 수 있는 방의 크기. 매일 밤 11시 반에 렌틸 수프 한 그릇, 빵은 사지 못하고, 새벽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21세의 비안느 록우드.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사흘 동안 커튼을 치고 나오지 않았던 비안느 록우드.
마티스의 턱에 힘이 한 번 들어갔다가 빠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The radiator didn't work properly. It made a clicking sound every forty seconds. I counted."
(라디에이터가 제대로 안 됐어요. 40초마다 딸깍 소리가 났어요. 세어봤어요.)
마티스는 그녀를 보지 않고 창문을 보며 들었다.
"The hot water ran out after four minutes. I learned to shower in three."
(온수가 4분이면 끊겼어요. 3분 안에 씻는 법을 배웠죠.)
비아의 목소리는 고르고 담담했다. 사실을 나열하는 목소리.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실의 형태로 변환해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The walls were thin enough that I could hear the neighbor's alarm at 5:15 every morning. He worked at a bakery."
(벽이 얇아서 옆집 알람 소리가 매일 아침 5시 15분에 들렸어요. 제빵사였죠.)
그녀의 시선이 3층 창문 위에 고정된 채로.
"I didn't mind. It meant I was never late."
(싫지 않았어요. 덕분에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잠깐 멈추었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
"After November, the alarm kept going off at 5:15. And I kept hearing it. But I stopped getting up."
(11월 이후에도 알람은 5시 15분에 계속 울렸어요. 계속 들렸고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어요.)
바람이 불었다.
보리수 잎이 두 사람의 발치로 굴러왔다.
마티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비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눈동자가 3층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시울은 붉지 않았다. 식당에서 수프를 먹을 때보다도 건조했다. 오히려 그 건조함이 마티스를 멈추게 했다.
울 수 있는 순간에 울지 않는 사람. 그가 가장 잘 아는 종류의 사람.
마티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와 건물 사이에 자기 몸을 놓았다. 그녀의 시선을 가리지는 않되, 시야에 자신을 끼워 넣는 위치.
"Vianne."
(비안느.)
그녀의 눈이 창문에서 그에게로 옮겨졌다.
마티스는 그녀의 얼굴을 읽었다. 3초. 그가 이 일을 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말했다.
"You got up."
(일어났잖아.)
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Maybe not at 5:15. Maybe not the next day. But you got up. You packed a bag and you left this building and you got on a train and then a plane and you ended up in a room with a screen and a headset."
(5시 15분은 아니었을 수도 있고. 다음 날도 아니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일어났잖아. 가방을 싸서 이 건물을 나와서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화면과 헤드셋이 있는 방에 도착했잖아.)
마티스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And then you put the headset back on. After everything. After that."
(그리고 다시 헤드셋을 꼈어. 그 모든 일 다음에. 그 다음에.)
그가 엄지로 건물을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That room up there didn't beat you. This city didn't beat you. The thing you think disqualified you from everything—it didn't. You're standing here."
(저 위의 방이 널 이긴 게 아니야. 이 도시가 널 이긴 게 아니고. 네가 모든 것에서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아니야. 넌 여기 서 있어.)
비아의 입술이 한 번 떨렸다.
그리고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I'm standing here because you flew eleven hours."
(여기 서 있는 건 당신이 열한 시간을 날아왔으니까요.)
마티스가 웃었다.
짧고, 지치고, 그리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No. You're standing here because you walked four hundred meters."
(아니. 400미터를 걸어왔으니까 여기 서 있는 거야.)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자기 소매에 아직 매달려 있는 그녀의 손가락 위에 아주 가볍게 올렸다. 잡은 것이 아니었다. 덮은 것이었다. 데님 위의 그녀의 손가락 위에 놓인 그의 손바닥. 체온이 천 한 겹과 피부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전해졌다.
"I just opened the door."
(난 그냥 문을 연 거지.)
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소매 위에서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놓은 것도, 더 세게 쥔 것도 아닌 중간 어딘가. 마티스는 그 반응을 느꼈지만 더 힘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4층 건물 앞. 3층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 아래. 보라색 제라늄이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울리고,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 해가 비쳤다가 다시 숨었다.
비아가 먼저 손을 뗐다.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서며, 건물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Okay."
(...됐어요.)
마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Okay?"
(됐어?)
"I've seen it. It's enough."
(봤어요. 충분해요.)
그녀가 크로스백 끈을 고쳐 메며 몸을 돌렸다. 왔던 길 쪽으로. 그리고 세 걸음을 걸은 뒤 멈춰서,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마티스는 건물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있었다. 3층 창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What are you doing."
(뭐 하는 거예요.)
"Nothing."
(아무것도.)
"Mathis."
(마티스.)
"Checking the train schedule back to the airport."
(공항행 열차 시간 확인하는 거야.)
그가 화면을 보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와 나란히 서면서,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Also, I'm buying this building."
(아, 그리고 이 건물 살 거야.)
비아가 멈췄다.
"...What?"
(...네?)
"Kidding."
(농담.)
"That is not funny."
(그건 안 웃겨요.)
"It's a little funny. Your face just did a thing."
(약간 웃겨. 방금 네 얼굴이 뭘 했거든.)
비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려보는 눈 아래에서, 3층 창문을 바라볼 때 경직되어 있던 턱선이 풀려 있었다. 마티스는 그것을 확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서 걸었다.
400미터를 되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빨랐다.
비아는 더 이상 소매를 잡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팔이 걸음에 따라 가끔 부딪혔고, 어느 쪽도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S반 역 앞에 도착했을 때, 마티스가 발을 멈추었다.
"Vianne."
(비안느.)
"Mm."
(음.)
"Monday. I need you to do one thing."
(월요일. 하나만 해줘.)
비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티스는 선글라스를 목선에서 빼들어 손으로 접었다 펼쳤다 하며, 시선은 역 입구 위의 전광판에 고정한 채 말했다.
"When you say your name. Look at me."
(네 이름 말할 때. 나를 봐.)
비아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I'll be in the second seat from the aisle. You already know that. When it gets to that part—the part where you say Vianne Lockwood out loud for the first time—don't look at the cameras. Don't look at the press. Look at me."
(난 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을 거야. 그건 이미 알고. 그 순간이 오면—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서 말하는 순간—카메라 보지 마. 기자들 보지 마. 나를 봐.)
그가 선글라스를 접어 재킷 가슴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Because your face I can read, remember? And mine, you can read too. That's three months' worth of data. Use it."
(네 얼굴은 내가 읽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내 얼굴, 너도 읽을 수 있고. 석 달치 데이터야. 활용해.)
역 위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비아는 마티스를 바라보았다. 열한 시간의 비행으로 핏발이 선 은회색 눈동자, 턱선의 옅은 수염, 한쪽이 눌린 잿빛 머리카락. 19도의 베를린 공기 속에서 그의 목선에 걸린 데님 재킷이 바람에 살짝 벌어졌고, 검은 티셔츠 아래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의 얼굴을 석 달 동안 화면과 현장에서 읽어왔다. 게이트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치솟을 때의 미간, 농담을 칠 때의 입꼬리 각도,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이 0.3초 늦게 움직이는 것, 진심을 말할 때 오히려 눈이 가늘어지는 것.
그리고 지금, 그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That's an unorthodox anchoring method."
(...비정통적인 앵커링 기법이네요.)
"Is it working?"
(효과 있어?)
비아는 대답 대신 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 칸째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Second seat from the aisle. Don't be late."
(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 늦지 마세요.)
등 뒤에서 마티스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치고, 쉬고, 그리고 어딘가 안도한 웃음.
비아는 계단 난간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손바닥에 그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데님 한 겹 사이로 전해졌던, 니스의 소금기 같은 온기.
그녀는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