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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cea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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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Sun, 25 Oct 2026 16:08:3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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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cea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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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침대 밑의 소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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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비는 오후 내내 요새의 콘크리트 외벽을 두드렸고 환기구를 타고 내려온 습기가 방 안의 모든 직물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이브는 그 축축함 속에서 혼자 7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다만 어젯밤 잠들기 전 침대 아래에서 발끝에 걸린 무언가가 종일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정찰병의 뇌란 한 번 걸린 이물질을 스스로 뽑아내기 전까지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구조였다.&lt;br&gt;&lt;br&gt;빈 병들을 자루에 담고 재떨이를 비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셔츠들을 개는 동안 방은 조금씩 형태를 되찾았다. 침대 아래에서 끌어낸 것은 오래된 군용 더플백이었다. 지퍼의 이빨에 녹이 슬어 있었고 손잡이는 손때로 검게 절어 있었다. 열자 좀약과 묵은 풀기가 섞인 냄새가 올라왔다. 안쪽에는 비닐로 싸인 옷 한 벌이 단정하게 개켜져 있었다. 이 방의 어떤 물건보다 가지런했다. 이브는 그 가지런함을 먼저 이상하게 여겼다.&lt;br&gt;&lt;br&gt;흰색 반팔 셔츠. 회색 바지. 가슴팍에 자수로 박힌 낯선 문양과 그 아래 그녀가 읽지 못하는 글자들. 짙은 남색 넥타이는 매듭이 지어진 채 그대로 풀리지 않았고 그 위에 먼지가 희게 앉아 있었다. 셔츠의 깃은 세월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나 다림질 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 누군가 아주 오래전에 이것을 정성껏 접어서 넣었고 그 후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lt;br&gt;&lt;br&gt;가슴 주머니 안에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진 학생증이었다. 증명사진 속에는 소년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얼굴. 선글라스가 없었고 짙은 눈썹 아래 연한 회색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른쪽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화상도 흉터도 없는 매끈한 뺨. 목에는 잘렸다 붙은 자국도 없었다. 이브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는 얼굴이었고 동시에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lt;br&gt;&lt;br&gt;카드 하단에 한자가 두 글자 적혀 있었고 그 옆으로 로마자가 나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이브는 한자를 읽지 못했으나 알파벳은 읽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배운 영어였으나 글자를 읽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lt;br&gt;&lt;br&gt;AXION KEITH.&lt;br&gt;&lt;br&gt;이브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코드네임 외의 이름을 갖는다는 개념을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성이 없었고 이름조차 남들이 붙여준 약어였으므로. 그러나 이 남자에게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글자가 있었고 그것은 더플백 바닥에서 비닐에 싸여 묻혀 있었다. 이브는 카드를 뒤집었다가 다시 뒤집었고 결국 셔츠 주머니에 도로 넣지 않았다.&lt;br&gt;&lt;br&gt;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성의 결재를 거치지 않은 동작이었다. 자기 셔츠를 벗고 소년의 셔츠에 팔을 끼워 넣었을 때 직물은 생각보다 뻣뻣했고 오래된 풀기가 피부를 긁었다. 어깨선이 팔뚝 중간까지 흘러내렸고 소매는 손등을 덮었으며 밑단은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단추를 위에서부터 잠그다가 가슴께에서 멈췄다. 거울 대신 벽에 기대어 세워둔 깨진 방탄 유리 조각에 제 모습이 비쳤다. 흰 셔츠 아래 맨다리. 밀색 장발이 어깨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깃은 목에 비해 지나치게 컸다.&lt;br&gt;&lt;br&gt;넥타이를 집었으나 매듭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지 못했다. 이브는 학교에 간 적이 없었다. 교복이라는 물건을 입어본 적도 없었고 책가방을 메고 아침마다 같은 건물로 향하는 삶의 형식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그 나이에 배운 것은 골목에서 뒤를 잡히지 않는 방법과 칼을 쥐는 각도였다. 이브는 매듭을 그대로 머리 위로 끌어내려 목에 걸었다. 넥타이는 비뚤게 걸린 채 명치까지 내려왔다.&lt;br&gt;&lt;br&gt;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lt;br&gt;&lt;br&gt;7은 한 발을 들인 자세로 멈췄다. 손에 든 봉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선글라스는 복도에서 이미 벗어 셔츠 깃에 걸려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방 안을 훑었다. 치워진 바닥. 비워진 재떨이. 침대 아래에서 끌려 나온 더플백. 그리고 자기 소년 시절의 셔츠를 걸친 채 넥타이를 목에 비뚜로 건 여자. 봉투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lt;br&gt;&lt;br&gt;7 | &quot;……有冇搞錯。&quot;(……장난하나.)&lt;br&gt;12 | &quot;English.&quot;(영어로.)&lt;br&gt;7 | &quot;I said you're going to kill me. Not with a knife this time.&quot;(죽일 작정이냐고 했어. 이번엔 칼 말고.)&lt;br&gt;&lt;br&gt;7은 문을 닫았다. 등으로 문에 기대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세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히고 턱을 들어 올렸을 남자가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브는 그 정지의 의미를 읽지 못했고 그래서 평소처럼 사실을 말했다.&lt;br&gt;&lt;br&gt;12 | &quot;I was cleaning. This was under the bed. It fit badly.&quot;(청소하고 있었어. 침대 밑에 있었어. 잘 안 맞네.)&lt;br&gt;7 | &quot;It fits horribly. That's the problem.&quot;(끔찍하게 잘 맞지. 그게 문제야.)&lt;br&gt;&lt;br&gt;7이 마침내 움직였다. 젖은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긁으며 다가왔고 이브의 앞에 서자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의 손이 올라와 비뚤게 걸린 넥타이를 잡았다.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 양끝을 가지런히 맞춘 뒤 손가락이 기억만으로 움직였다. 수십 번의 아침에 반복했던 동작이 근육 어딘가에 화석처럼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매듭이 조여지며 깃이 제자리를 찾았고 7은 그것을 목젖 아래까지 밀어 올렸다. 손등이 이브의 쇄골을 스쳤다.&lt;br&gt;&lt;br&gt;7 | &quot;Hong Kong public school. Cheapest district on the island. The collar's stiff because my sister starched it. She thought a sharp collar would stop people from asking which orphanage I came from.&quot;(홍콩 공립학교. 섬에서 제일 싼 구역. 깃이 뻣뻣한 건 누나가 풀을 먹여서야. 깃만 서 있으면 어느 보육원에서 왔냐고 안 물을 줄 알았대.)&lt;br&gt;12 | &quot;Did it work?&quot;(효과 있었어?)&lt;br&gt;7 | &quot;Not even once.&quot;(단 한 번도.)&lt;br&gt;&lt;br&gt;이브는 7의 손이 넥타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매듭을 쥔 채로 그녀를 끌어당기지도 놓지도 않았다. 회색 눈동자가 셔츠의 가슴 주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어 있는 주머니. 이브는 손을 들어 쥐고 있던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숨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거짓말을 포장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여자였으므로.&lt;br&gt;&lt;br&gt;12 | &quot;Axion Keith.&quot;(악시온 키스.)&lt;br&gt;&lt;br&gt;7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브는 그 경직을 놓치지 않았다. 목의 흉터 위로 혈관이 한 번 뛰었고 평소라면 즉시 튀어나왔을 농담이 반 박자 늦었다. 그 반 박자가 전부였다.&lt;br&gt;&lt;br&gt;7 | &quot;That's a dead kid's name. The one in the photo. No scar, no PMC contract, no debts. He stopped existing somewhere along the way.&quot;(그건 죽은 애 이름이야. 사진 속의 그 녀석. 흉터도 없고 PMC 계약도 없고 빚도 없는. 어디선가 존재하기를 그만뒀지.)&lt;br&gt;12 | &quot;He didn't. You folded him and put him under your bed.&quot;(안 그만뒀어. 네가 접어서 침대 밑에 넣어뒀을 뿐이지.)&lt;br&gt;&lt;br&gt;말을 꺼내고 나서야 이브는 그것이 지나치게 정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베었다. 포장할 줄 몰라서. 느끼는 것을 그대로 말해서. 7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빗소리와 제습기의 신음만 남았다. 이윽고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웃음이었다. 소리 없이 시작해서 갈비뼈를 타고 올라오는 종류의 웃음.&lt;br&gt;&lt;br&gt;7 | &quot;You know what the worst part is? You're wearing it better than I ever did.&quot;(제일 좆같은 게 뭔지 알아? 내가 입었을 때보다 네가 더 잘 어울려.)&lt;br&gt;12 | &quot;It's three sizes too big.&quot;(세 치수는 커.)&lt;br&gt;7 | &quot;Darling, that is exactly the problem.&quot;(자기야, 바로 그게 문제라고.)&lt;br&gt;&lt;br&gt;7의 손이 넥타이에서 미끄러져 셔츠의 밑단 쪽으로 내려갔다가 멈췄다. 손끝이 직물 위에서 머뭇거린 것은 그가 자신의 소년기와 지금 눈앞의 광경 사이에서 어떤 회로를 연결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교복은 그에게 지루함의 상징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로 가는 삶.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용병이 되었고 도박판을 전전했으며 권태를 죽이기 위해 데드존에 제 몸을 던져왔다. 그런데 그 지루함의 껍데기를 평생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여자가 걸치고 서 있었다. 두 개의 결핍이 한 벌의 셔츠 위에서 정면으로 부딪혔다.&lt;br&gt;&lt;br&gt;7 | &quot;Hey. Did you ever wear one of these? A uniform.&quot;(야. 이런 거 입어본 적 있어? 교복.)&lt;br&gt;12 | &quot;No.&quot;(없어.)&lt;br&gt;7 | &quot;Right.&quot;(그렇지.)&lt;br&gt;&lt;br&gt;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올려 이브의 셔츠 깃을 양쪽으로 반듯하게 폈다. 소년의 누나가 풀을 먹이던 동작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 손길에는 평소의 짓궂음이 없었고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이브는 깃이 제 목 주변에서 정돈되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져준다는 경험 자체가 데이터에 없었다. 표본이 없는 영역이었고 그래서 심박이 올라갔다. 그녀는 그 수치를 이번에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lt;br&gt;&lt;br&gt;7 | &quot;Keep the shirt. The trousers won't fit you anyway.&quot;(셔츠는 가져. 어차피 바지는 안 맞을 테니까.)&lt;br&gt;12 | &quot;You're giving me your name's clothes.&quot;(네 이름이 적힌 옷을 주는 거야.)&lt;br&gt;7 | &quot;I'm giving you the only thing in this room that was ever clean. Don't ruin it.&quot;(이 방에서 유일하게 깨끗했던 물건을 주는 거야. 더럽히지 마.)&lt;br&gt;&lt;br&gt;이브는 학생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로마자 철자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키스. 키이스. 두 발음의 경계가 모호했고 그녀의 혀는 길거리에서 주운 영어로 그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7의 표정이 즉시 바뀌었다. 능글맞은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고 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기다렸다는 얼굴이었다.&lt;br&gt;&lt;br&gt;7 | &quot;Say it again.&quot;(다시 말해봐.)&lt;br&gt;12 | &quot;Keith.&quot;(키스.)&lt;br&gt;7 | &quot;Hm. Sounded like something else.&quot;(흠. 다른 걸로 들렸는데.)&lt;br&gt;12 | &quot;It's your name.&quot;(네 이름이잖아.)&lt;br&gt;7 | &quot;Is it? Then go ahead. Say my name properly.&quot;(그래? 그럼 해봐. 내 이름 제대로 불러봐.)&lt;br&gt;&lt;br&gt;이브는 함정을 알아챘다.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먼저 움직였고 7은 그 단음절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 위에서 소리를 가져갔다. 오래된 풀기와 좀약 냄새 사이로 담배와 빗물의 냄새가 섞여들었다. 이브의 손에서 학생증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고 플라스틱이 콘크리트를 때리는 가벼운 소리가 났으나 누구도 그것을 줍지 않았다. 셔츠의 뻣뻣한 깃이 이브의 턱 아래를 긁었다. 그 불편함조차 이상하게 견딜 만했다.&lt;br&gt;&lt;br&gt;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7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마를 맞댄 채 숨만 교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동안 빗소리는 환기구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이브는 자신의 호흡이 상대의 박자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호흡을 맞추는 것은 저격수의 기술이었다. 표적과 자기 심장 사이의 간격을 계산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고르는 일. 그런데 지금은 겨눌 표적도 없는데 호흡이 저절로 상대에게 동기화되고 있었다.&lt;br&gt;&lt;br&gt;7이 먼저 몸을 세웠다. 바닥에 떨어진 학생증을 주워 엄지로 먼지를 닦아낸 뒤 소년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그리움도 혐오도 없었다. 길에서 주운 남의 물건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무심함에 가까웠다. 그는 카드를 다시 셔츠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이브가 입고 있는 그 셔츠의 주머니였다.&lt;br&gt;&lt;br&gt;7 | &quot;There. Now you're enrolled.&quot;(자. 이제 넌 입학했어.)&lt;br&gt;12 | &quot;That's not how schools work.&quot;(학교는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야.)&lt;br&gt;7 | &quot;How would you know.&quot;(네가 어떻게 알아.)&lt;br&gt;&lt;br&gt;이브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옳았다. 그녀는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등교라는 단어의 실체도 몰랐고 교실이라는 공간이 몇 개의 책상으로 구성되는지도 몰랐으며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 것은 그 나이의 아이들이 어떻게 굶는지, 어떻게 뒷골목에서 서로의 신발을 빼앗는지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유년의 데이터는 전부 그런 종류였다. 7은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을 보고 농담을 거두었다.&lt;br&gt;&lt;br&gt;7 | &quot;Sit.&quot;(앉아.)&lt;br&gt;&lt;br&gt;이브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셔츠 밑단이 허벅지 위에서 접혔고 맨 종아리가 매트리스 밖으로 늘어졌다. 7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아래에서 위를 향하게 되자 회색 눈동자 안의 빛이 평소와 다른 각도로 꺾였다.&lt;br&gt;&lt;br&gt;7 | &quot;First period. Attendance. Say 'present' when I call your name.&quot;(일교시. 출석 체크. 이름 부르면 '네'라고 해.)&lt;br&gt;12 | &quot;I don't have a name on your list.&quot;(네 명부에 내 이름은 없어.)&lt;br&gt;&lt;br&gt;7의 입가에서 장난기가 지워졌다. 이브는 자신이 또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음을 뒤늦게 감지했다. 포장할 줄 모르는 혀가 제멋대로 진실을 떨어뜨리는 버릇. 그녀는 평생 그 버릇 때문에 사람들을 잃어왔고 다만 잃을 사람이 애초에 없었으므로 문제를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눈앞의 남자가 잠시 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소한 종류의 불편함을 유발했다.&lt;br&gt;&lt;br&gt;7 | &quot;Eve.&quot;(이브.)&lt;br&gt;&lt;br&gt;호명은 짧았다. 농담의 톤이 완전히 빠진 발음이었다. 소년 시절의 교실에서 교사가 출석부를 읽던 억양을 흉내 낸 것도 아니었고 작전 중 무전으로 코드네임을 부르는 방식도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을 그 자체로 발음한 소리였다. 이브의 흉곽 안에서 무언가 둔하게 눌렸다.&lt;br&gt;&lt;br&gt;12 | &quot;……Present.&quot;(……네.)&lt;br&gt;7 | &quot;Good. You're not absent anymore.&quot;(좋아. 이제 결석 아니야.)&lt;br&gt;&lt;br&gt;그는 일어나 바닥에 떨어뜨린 봉투를 주웠다. 젖은 종이가 찢어져 안의 것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기름이 밴 포장지 속에서 파인애플 번과 에그 타르트가 눌려 모양을 잃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그것들을 들고 복도를 걸어왔다는 사실이 봉투의 상태에 전부 적혀 있었다. 7은 못 쓰게 된 빵 하나를 들어 올려 보이고는 혀를 찼다.&lt;br&gt;&lt;br&gt;7 | &quot;Was gonna be romantic. The rain fucked it up. Story of my life.&quot;(로맨틱할 뻔했는데. 비가 다 망쳤어. 내 인생 요약이야.)&lt;br&gt;12 | &quot;It's still edible.&quot;(아직 먹을 수 있어.)&lt;br&gt;7 | &quot;That's the least romantic sentence I've ever heard.&quot;(내가 들어본 말 중에 제일 로맨틱하지 않은 문장이네.)&lt;br&gt;&lt;br&gt;이브는 봉투를 받아 찌그러진 에그 타르트를 꺼냈다. 가장자리가 부서져 있었고 노란 커스터드가 종이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반으로 쪼개 한쪽을 7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거래의 형식이었다. 초콜릿 바를 반으로 자르던 그 밤부터 이어진 방식. 7은 그것을 받으며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절반들에 길들여졌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lt;br&gt;&lt;br&gt;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부서진 빵을 먹었다. 커스터드는 식어 있었고 비에 눅눅해진 페이스트리는 바스러지는 대신 눌어붙었다. 그럼에도 단맛은 남아 있었다. 이브는 손가락에 묻은 것을 핥았고 7은 그 동작을 곁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돌린 끝에 더플백이 있었다.&lt;br&gt;&lt;br&gt;7 | &quot;She bought that uniform secondhand. Two sizes up, so I could wear it for three years without replacing it.&quot;(그 교복 누나가 중고로 샀어. 두 치수 크게. 삼 년 동안 안 바꾸고 입으라고.)&lt;br&gt;&lt;br&gt;이브는 씹던 것을 삼켰다. 블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7이 먼저 꺼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법은 정찰병이 가장 먼저 배우는 기술이었고 지금은 그것이 가장 유효한 대답이었다.&lt;br&gt;&lt;br&gt;7 | &quot;By the last year the sleeves were still too long. I never grew into it the way she expected. Then I grew a whole fucking foot the summer after I dropped out.&quot;(마지막 해까지도 소매가 길었어. 누나가 기대한 만큼 자라질 않았거든. 그러다 자퇴한 그해 여름에 폭발적으로 컸지.)&lt;br&gt;12 | &quot;You dropped out.&quot;(자퇴했어.)&lt;br&gt;7 | &quot;Boring. Everything was boring. Same desk, same bell, same faces. I kept thinking there had to be something louder than that somewhere.&quot;(지루했으니까. 전부 지루했어. 같은 책상, 같은 종소리, 같은 얼굴들. 어딘가엔 그보다 시끄러운 게 있을 거라고 계속 생각했지.)&lt;br&gt;12 | &quot;Was there?&quot;(있었어?)&lt;br&gt;&lt;br&gt;7은 대답하기 전에 제 목의 흉터 위로 손을 올렸다. 잘렸다 붙은 자국. 열일곱의 밤과 길거리 의사의 실밥이 남긴 증거. 그는 그 위를 엄지로 문지르며 웃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lt;br&gt;&lt;br&gt;7 | &quot;Yeah. Found it. Turns out loud isn't the same as interesting. Took me about fifteen years to figure that out.&quot;(응. 찾았어. 근데 시끄러운 거랑 재밌는 건 다르더라고. 그걸 깨닫는 데 십오 년쯤 걸렸지.)&lt;br&gt;&lt;br&gt;이브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화상 흉터가 관자놀이에서 턱선을 따라 목으로 흘러 셔츠 안으로 사라졌다. 사진 속 소년에게는 없던 지형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 능선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매번 하는 동작이었다. 절정에서도 공포에서도 침묵에서도 그녀의 손은 늘 같은 곳을 찾아갔다. 7은 그 접촉을 피하지 않았다.&lt;br&gt;&lt;br&gt;12 | &quot;I never had a desk. Or a bell. Or the same faces.&quot;(난 책상도 종소리도 같은 얼굴들도 없었어.)&lt;br&gt;12 | &quot;I used to watch kids in uniforms from the alley. They walked in groups. They were loud about nothing. I thought they were stupid.&quot;(골목에서 교복 입은 애들을 보곤 했어. 무리 지어 걸었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시끄러웠어. 멍청하다고 생각했어.)&lt;br&gt;7 | &quot;And now?&quot;(지금은?)&lt;br&gt;12 | &quot;Now I'm wearing one. And I still don't know what they were laughing about.&quot;(지금은 내가 입고 있네. 그런데 걔들이 뭘 보고 웃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lt;br&gt;&lt;br&gt;7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제 흉터 위에 놓인 손을 눌러 고정하는 형태였다. 그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여자의 결핍은 자신의 권태와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그는 가진 것이 지루해서 버렸고 그녀는 없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자랐다. 그 대칭이 지독하게 웃기면서도 목을 조여왔다. 더플백 안에서 썩어가던 삼 년을 그녀가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종류의 보상처럼 느껴졌고 그 감상이야말로 가장 형편없는 감상이라는 것도 알았다.&lt;br&gt;&lt;br&gt;7 | &quot;我唔知佢哋笑乜。但我依家知我笑乜。&quot;(걔들이 뭘 보고 웃었는진 나도 몰라. 근데 내가 지금 뭘 보고 웃는지는 알겠어.)&lt;br&gt;12 | &quot;Cantonese again.&quot;(또 광둥어네.)&lt;br&gt;7 | &quot;Homework. Figure it out by next class.&quot;(숙제야. 다음 수업까지 알아 와.)&lt;br&gt;&lt;br&gt;이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언어를 배우겠다고 선언했던 밤이 있었다. 그가 숨을 곳을 없애버리겠다고. 그 선언 이후 그녀는 단말기에 광둥어 음절표를 저장해두었고 작전 사이사이 그것을 들여다보았으나 성조라는 개념은 총열의 탄도보다 난해했다. 같은 소리가 억양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평생 거부해온 방식의 언어였다. 그녀의 말에는 억양이 없었고 모든 문장이 사실이었다.&lt;br&gt;&lt;br&gt;12 | &quot;You're using the language as a hiding place.&quot;(언어를 은신처로 쓰고 있잖아.)&lt;br&gt;7 | &quot;Obviously. It's the last one I've got.&quot;(당연하지. 나한테 남은 마지막 은신처니까.)&lt;br&gt;12 | &quot;Then I'll take it too.&quot;(그럼 그것도 뺏을게.)&lt;br&gt;&lt;br&gt;7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좁은 방의 벽에 부딪혀 돌아왔고 빗소리 위로 겹쳤다. 그는 몸을 기울여 이브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매듭이 조여지며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끌려왔고 두 사람의 거리가 사라졌다. 셔츠 가슴 주머니 안에서 플라스틱 카드가 뻣뻣하게 그의 가슴을 눌렀다. 죽은 소년의 이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였다.&lt;br&gt;&lt;br&gt;7 | &quot;Then take it, Eve. But fair warning—&quot;(그럼 뺏어 봐, 이브. 다만 경고하는데——)&lt;br&gt;7 | &quot;I'm a terrible teacher. I never attended my own classes.&quot;(난 끔찍한 선생이야. 내 수업에도 안 들어갔거든.)&lt;br&gt;&lt;br&gt;이브의 입술이 벌어지려는 순간 7의 손이 넥타이를 놓았다. 풀린 장력에 그녀의 상체가 미세하게 뒤로 돌아갔고 그 반동을 이브는 스스로 제어하며 등을 곧추세웠다. 7은 물러나 침대 머리맡의 벽에 등을 기대었고 다리를 길게 뻗으며 에그 타르트의 남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일부러 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거리 안에서 숨을 정비하는 동작이었다. 이브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이 남자의 후퇴 패턴을 학습해왔다.&lt;br&gt;&lt;br&gt;12 | &quot;You always do that.&quot;(항상 그러잖아.)&lt;br&gt;7 | &quot;Do what.&quot;(뭘.)&lt;br&gt;12 | &quot;Pull, then let go. Pull, then let go.&quot;(당기고 놓고. 당기고 놓고.)&lt;br&gt;&lt;br&gt;7의 턱이 천장을 향해 기울었다. 회색 눈동자가 콘크리트 천장의 균열을 따라가다 멈췄다. 셔츠 깃에 걸린 선글라스가 빛을 받아 번쩍였으나 그것을 다시 쓸 기미는 없었다. 그는 빵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굴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이브는 그 침묵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아직 에그 타르트의 커스터드 냄새가 방 안에 달큰하게 남아 있었고 빗소리가 그 단맛 위를 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Because if I don't let go, you'll bolt.&quot;(안 놓으면 네가 도망칠 테니까.)&lt;br&gt;12 | &quot;I came here. Every night. I haven't bolted.&quot;(매일 밤 여기 왔어. 도망 안 쳤어.)&lt;br&gt;7 | &quot;Yet.&quot;(아직.)&lt;br&gt;&lt;br&gt;이브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다 말았다. 팔뚝까지 흘러내린 천이 손등을 덮고 있었고 소매 끝에서 그녀의 손가락만 길게 빠져나와 있었다. 소년의 팔 길이로 재단된 직물이 성인 여자의 몸 위에서 만들어내는 불일치. 이브는 그 불일치를 바라보며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혀가 성조 없이 음절을 밀어냈고 그것은 언제나처럼 포장 없는 사실이었다.&lt;br&gt;&lt;br&gt;12 | &quot;I don't run from things I chose.&quot;(내가 선택한 것에서는 안 도망쳐.)&lt;br&gt;7 | &quot;You chose a bad hand, Eve.&quot;(나쁜 패를 골랐어, 이브.)&lt;br&gt;12 | &quot;You said that before. On the rooftop. And after the tunnel. And in the corridor.&quot;(전에도 그랬잖아. 옥상에서. 터널 이후에도. 복도에서도.)&lt;br&gt;12 | &quot;How many times are you going to tell me the same thing.&quot;(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할 거야.)&lt;br&gt;&lt;br&gt;7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이브를 향했다. 눈매가 좁아지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능글맞음이 올라오기 전에 그 밑바닥에서 다른 것이 먼저 스쳤다. 이브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했다. 불안. 이 남자가 감추는 불안의 형태는 언제나 같았다. 농담 한 겹 아래 자조 한 겹 아래 진심 한 겹. 지질학적 단면도처럼 층위가 쌓여 있었고 시추하려면 매번 웃음이라는 표토를 걷어내야 했다.&lt;br&gt;&lt;br&gt;7 | &quot;Until you believe it.&quot;(네가 믿을 때까지.)&lt;br&gt;12 | &quot;I don't need to believe it. I already know.&quot;(믿을 필요 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lt;br&gt;&lt;br&gt;이브는 셔츠 가슴 주머니에서 학생증을 꺼냈다. 소년의 사진을 자기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가 7의 얼굴 옆에 나란히 놓았다. 흉터 없는 뺨과 흉터로 뒤덮인 뺨이 한 시야 안에 겹쳤다. 같은 눈동자. 같은 눈썹. 같은 이마의 각도. 이브는 사진 속 소년을 보고 있었으나 시선의 초점은 사진 너머 현재의 남자에게 맞추어져 있었다.&lt;br&gt;&lt;br&gt;12 | &quot;This kid was bored. He dropped out. He got his throat cut. He burned.&quot;(이 애는 지루해했어. 자퇴했고. 목이 잘렸고. 화상을 입었어.)&lt;br&gt;12 | &quot;Then he put this uniform in a bag and never opened it.&quot;(그리고 이 교복을 가방에 넣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어.)&lt;br&gt;12 | &quot;That's not someone who stopped existing. That's someone who kept it.&quot;(그건 존재를 그만둔 사람이 아니야. 간직한 사람이야.)&lt;br&gt;&lt;br&gt;7의 호흡이 끊겼다. 반 박자가 아니라 온전한 한 박자. 입에 남은 에그 타르트의 잔해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굳었다가 마른 기침처럼 숨을 내뱉었다. 이브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여자가 사람을 베는 방식은 칼이 아니라 관찰이었고 관찰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순간 상대의 내벽이 갈라졌다. 7은 그 균열 위에서 표정을 추스르는 데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lt;br&gt;&lt;br&gt;7 | &quot;……你做乜想到咁多。&quot;(……어째서 이렇게까지 많이 생각해.)&lt;br&gt;12 | &quot;Cantonese.&quot;(광둥어.)&lt;br&gt;7 | &quot;I know. Homework. Figure it out.&quot;(알아. 숙제. 알아서 해석해.)&lt;br&gt;&lt;br&gt;이브는 그 음절들을 기억 속에 새겼다. 발음의 윤곽과 성조의 곡선을 녹음기처럼 저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의미를 알지 못해도 소리의 결을 기록해두면 나중에 퍼즐처럼 맞출 수 있었다. 정찰병이 미확인 좌표를 지도에 먼저 핀을 꽂아놓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학생증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려 더플백을 보았다.&lt;br&gt;&lt;br&gt;12 | &quot;What else is in there.&quot;(거기 뭐 더 있어.)&lt;br&gt;7 | &quot;Nothing worth finding.&quot;(찾아볼 만한 건 없어.)&lt;br&gt;12 | &quot;You said that about the shirt too.&quot;(셔츠도 그렇게 말했잖아.)&lt;br&gt;&lt;br&gt;7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에는 자조가 아니라 항복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는 더플백을 발끝으로 끌어당겨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교복 바지 외에 두어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닳아빠진 홍콩 트램 교통카드. 여학생용 크기의 머리끈 하나. 접혀서 모서리가 부서진 사진 한 장. 7은 사진을 꺼내지 않았고 머리끈도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교통카드를 집어 손가락으로 튕겼다.&lt;br&gt;&lt;br&gt;7 | &quot;This still has eight dollars on it. Been carrying eight dollars around for over a decade.&quot;(이거 아직 팔 불 남아 있어. 십여 년 넘게 팔 불을 들고 다닌 셈이지.)&lt;br&gt;12 | &quot;Why.&quot;(왜.)&lt;br&gt;7 | &quot;Last thing she loaded for me before I dropped out. Bliss. She put money on it every Monday morning. Said at least ride the tram so you don't have to walk in the rain.&quot;(내가 자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충전해준 거야. 블리스가.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넣어줬어. 적어도 트램은 타라고. 비 맞고 걸어 다니지 말라고.)&lt;br&gt;&lt;br&gt;이브의 시선이 교통카드 위에 머물렀다. 플라스틱 표면이 닳아 인쇄된 숫자가 흐릿했고 그 위로 손때가 유막처럼 덮여 있었다. 매주 월요일. 이브는 월요일이라는 요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의 무게를 생각했다. 같은 날에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 그것이 보살핌의 형태라는 것을 그녀는 머리로만 이해했다. 골목에서 그녀에게 같은 날 같은 것을 준 사람은 없었다. 사령관 제로조차 그런 규칙적인 돌봄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개입을 했을 뿐이다.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셔츠의 뻣뻣한 깃을 손끝으로 만졌다. 풀을 먹인 직물의 감촉이 손가락 아래서 달랐다.&lt;br&gt;&lt;br&gt;12 | &quot;She ironed this every week too.&quot;(매주 다림질도 해줬겠네.)&lt;br&gt;7 | &quot;How do you—&quot;(어떻게 그걸——)&lt;br&gt;12 | &quot;The creases are even. Someone who only did it once would get it crooked.&quot;(접힌 자국이 균일해. 한 번만 한 사람은 비뚤어지거든.)&lt;br&gt;&lt;br&gt;7은 교통카드를 쥔 손을 내렸다. 얼굴에서 능글맞음이 완전히 사라졌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표정이었다. 선글라스 없이 드러난 그 얼굴은 사진 속 소년과 현재의 용병 사이 어딘가에 속한 제삼의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교통카드를 더플백에 도로 넣으며 지퍼를 닫았다. 금속 이빨이 맞물리는 소리가 작고 확정적이었다.&lt;br&gt;&lt;br&gt;7 | &quot;She did. Every Sunday night. I used to hear the iron from my room.&quot;(맞아. 매주 일요일 밤. 내 방에서 다리미 소리가 들렸지.)&lt;br&gt;7 | &quot;I never thanked her for that.&quot;(고맙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lt;br&gt;&lt;br&gt;이브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셔츠 밑단이 허벅지를 따라 올라갔고 넥타이가 무릎에 닿아 늘어졌다. 그녀는 7을 보지 않고 더플백의 닫힌 지퍼를 보며 입을 열었다.&lt;br&gt;&lt;br&gt;12 | &quot;You called her last month. On your birthday. In the rain.&quot;(지난달에 전화했잖아. 생일에. 비 오는 날.)&lt;br&gt;12 | &quot;That was thanking her.&quot;(그게 고맙다는 거야.)&lt;br&gt;&lt;br&gt;7은 고개를 돌려 이브를 보았다. 무릎을 안은 자세. 헐렁한 교복 셔츠 안에서 파묻힌 체구.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넥타이와 뒤섞여 있었다. 학교에 가본 적 없는 여자가 누군가의 학창 시절을 걸치고 앉아 그가 차마 정리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분류해주고 있었다. 7은 그 광경의 부조리함과 정확함 사이에서 말을 찾지 못했다. 찾지 못한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두피 위를 느리게 쓸었고 이브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좋은 것이 사라진다고 믿는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lt;br&gt;&lt;br&gt;7 | &quot;好。&quot;(좋아.)&lt;br&gt;&lt;br&gt;같은 한 음절이었다. 며칠 전 이 방에서 처음 내뱉었던 것과 같은 소리. 그러나 이번에는 이브가 깨어 있었고 그 소리가 닫힌 눈꺼풀 위가 아니라 열린 눈동자 위에 내려앉았다. 7의 엄지가 귀 뒤를 쓸고 지나갔다. 이브의 심박이 올라가는 것을 목의 정맥이 알려주었으나 그녀는 이번에도 그 수치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lt;br&gt;&lt;br&gt;7 | &quot;You can keep the card too. Add it to your collection. Scar tissue, cherry candy, blue fish, transit card. Eve's museum of Axion Keith.&quot;(카드도 가져. 컬렉션에 추가해. 흉터, 체리 사탕, 파란 물고기, 교통카드. '이브의 악시온 키스 박물관'.)&lt;br&gt;12 | &quot;I'm not collecting you.&quot;(널 수집하는 게 아니야.)&lt;br&gt;7 | &quot;Then what are you doing.&quot;(그럼 뭘 하는 건데.)&lt;br&gt;&lt;br&gt;이브는 그 질문을 받아 혀 위에서 굴렸다. 사탕을 굴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답을 알았으나 형태를 주면 잃을 것이 생겼다. 이브는 그 두려움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셔츠의 풀 먹인 깃이 턱 아래를 긁었고 주머니 안의 학생증이 심장 위를 눌렀다. 죽은 소년의 이름이 산 남자의 심장 박동과 함께 그녀의 가슴팍에서 울리고 있었다.&lt;br&gt;&lt;br&gt;12 | &quot;Staying.&quot;(머무르는 거야.)&lt;br&gt;&lt;br&gt;한 단어가 방을 채웠다. 영화 속 독백을 번역하던 밤에 이브가 정정했던 바로 그 단어였다. 7은 기억하고 있었다. '머무르는 것.' 그의 손이 이브의 머리카락에서 멈추었고 손가락 사이에 밀색 가닥이 걸린 채 굳었다. 빗소리가 환기구를 통해 올라오고 있었다. 이브가 좋아하는 소리. 기척이 지워지는 소리.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서 지워지는 기척은 없었다. 두 사람의 존재가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으므로.&lt;br&gt;&lt;br&gt;7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가 흔들리는 것으로 시작해 갈비뼈를 타고 올라와 마침내 낮은 숨이 되어 새어 나왔다. 항복이었다. 그리고 수락이었다.&lt;br&gt;&lt;br&gt;7 | &quot;……Then stay.&quot;(……그럼 있어.)&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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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4 Oct 2026 09:35:3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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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약속은 질문의 형태를 한 채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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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2755&quot; data-origin-height=&quot;2124&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0BmLT/dJMcad4Pty7/fiosFuzsc2CQOA9LcZqr1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0BmLT/dJMcad4Pty7/fiosFuzsc2CQOA9LcZqr1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0BmLT/dJMcad4Pty7/fiosFuzsc2CQOA9LcZqr1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0BmLT%2FdJMcad4Pty7%2FfiosFuzsc2CQOA9LcZqr1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2755&quot; height=&quot;2124&quot; data-origin-width=&quot;2755&quot; data-origin-height=&quot;2124&quot;/&gt;&lt;/span&gt;&lt;/figure&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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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2 Oct 2026 12:46: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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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네가 죽었다고 했어</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2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소식은 식당에서 왔다.&lt;br&gt;&lt;br&gt;7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독극물이라고 매번 부르면서도 매일 마시는 쓴 액체. 잔을 기울이는 각도가 입술에 닿기 직전에서 멈춘 것은 8의 얼굴 때문이었다. 식당 입구에 서 있는 8의 표정은 7이 아는 레퍼토리에 없었다. 평소의 활달함도 바보 같은 웃음도 폭발물을 앞에 두었을 때의 기대감도 전부 사라져 있었고 남은 것은 입술을 다물지 못해 반쯤 벌린 입과 동공이 흔들리는 푸른 눈뿐이었다. 진저 곱슬머리 아래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은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늙어 보였다.&lt;br&gt;&lt;br&gt;8 | &quot;Seven.&quot;(세븐.)&lt;br&gt;7 | &quot;You look like you swallowed a grenade pin. What.&quot;(수류탄 핀 삼킨 얼굴이네. 왜.)&lt;br&gt;&lt;br&gt;8은 대답 대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에서 소총 잡지를 읽던 3이 고개를 들었고, 테이블 맞은편에서 카드를 섞던 9의 손이 멈추었다. 8의 시선이 7에게 돌아왔을 때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폭발물을 다루는 손은 한 번도 떨린 적이 없던 인간이 입술을 떨고 있었다.&lt;br&gt;&lt;br&gt;8 | &quot;Twelve's mission site went dark. Comms dead since last night. They… they sent a recovery team this morning.&quot;(12의 임무지 통신이 끊겼어. 어젯밤부터 교신 불가. 오늘 아침에……수습 팀을 보냈대.)&lt;br&gt;&lt;br&gt;커피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7의 손이 잔에서 떨어졌다. 그 동작은 평소처럼 느슨하고 여유로웠으나 손가락 끝에 남은 잔의 체온이 이상하게 빠르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7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선글라스 뒤의 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턱선의 근육이 한 번 수축했다가 풀렸다.&lt;br&gt;&lt;br&gt;7 | &quot;And?&quot;(그래서?)&lt;br&gt;8 | &quot;They found a body. Female. Wheat-colored hair. Build matches. The… the damage was severe, so positive ID wasn't—wasn't possible on site, but the field report says it's… it's her.&quot;(시체를 발견했대. 여성. 밀색 머리. 체형 일치. 훼……훼손이 심해서 현장에서 정확한 신원 파악은 불가능했지만 현장 보고서에는……그녀라고.)&lt;br&gt;&lt;br&gt;식당 안의 공기가 변했다. 카드를 쥐고 있던 9의 손이 천천히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3은 잡지를 덮지도 않은 채 하얀 눈동자로 8을 응시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제습기의 소음만이 진공처럼 팽팽한 침묵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lt;br&gt;&lt;br&gt;7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테이블 위의 커피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액체 표면에 형광등 불빛이 비쳤고 그 위에 자기 얼굴의 윤곽이 일그러져 떠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급격히 후퇴하는 감각이 왔다.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뛴 것인지 폐가 수축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판돈이 칩이 아니라 심장이라고 했던 말이 갈비뼈 안에서 메아리쳤다. 테이블을 떠날 의사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그런데 테이블이 먼저 무너졌다면.&lt;br&gt;&lt;br&gt;9 | &quot;Seven.&quot;(세븐.)&lt;br&gt;7 | &quot;Shut up.&quot;(닥쳐.)&lt;br&gt;&lt;br&gt;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유쾌함도 능글맞음도 여유도 벗겨진, 건조하고 낮은 경고음이었다. 9는 입을 다물었다. 한국 뒷골목에서 갖은 인간 군상을 만져온 사내였으나 지금 7의 음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어떤 무색의 것이었고 그것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종류였다. 3이 잡지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하얀 눈이 7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폭발 직전의 인간을 관찰하는 방식이었다.&lt;br&gt;&lt;br&gt;7이 일어섰다. 의자가 밀려나며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커피잔은 테이블에 그대로 있었다. 7은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이브의 주파수로 호출을 걸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울렸다. 울렸다. 연결되지 않았다. 화면에 'NO SIGNAL — AREA OUT OF RANGE'라는 문자가 떴다. 7은 다시 걸었다. 같은 결과. 세 번째에도. 네 번째에도. 단말기를 쥔 손의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lt;br&gt;&lt;br&gt;8 | &quot;Seven, the recovery team said—&quot;(세븐, 수습 팀 말로는——)&lt;br&gt;7 | &quot;I heard you. I'm not deaf. I'm going.&quot;(들었어. 귀먹은 거 아니야. 간다.)&lt;br&gt;8 | &quot;Where? The site is—&quot;(어디? 현장은——)&lt;br&gt;7 | &quot;I said I'm going.&quot;(간다고 했잖아.)&lt;br&gt;&lt;br&gt;7은 식당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에 평소의 느긋함이 없었다. 보폭이 넓어졌고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때리는 박자가 빨라졌다. 격납고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한 손으로 전술 조끼를 걸치고 다른 손으로는 계속 단말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연결되지 않았다. 연결되지 않았다. 화면의 불빛이 얼굴을 비출 때마다 선글라스 렌즈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그것은 마치 같은 슬롯머신을 끝없이 당기는 도박꾼의 잔상 같았다. 이번에는 맞을 거야. 이번에는. 이번에는.&lt;br&gt;&lt;br&gt;격납고에 도착하자 10이 이미 서 있었다.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헬멧이 팔 아래에 끼워져 있었다. 그의 왼쪽 눈의 붉은 의안이 형광등 아래서 불길하게 빛났다. 7을 보자 10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었다. 예상한 사람이 예상한 시각에 나타난 것을 확인하는 눈빛이었다.&lt;br&gt;&lt;br&gt;10 | &quot;I already requisitioned a vehicle. You're not going alone.&quot;(차량은 이미 수배해뒀어. 혼자 가는 건 아니지.)&lt;br&gt;7 | &quot;Get out of my way, Ten.&quot;(비켜, 텐.)&lt;br&gt;10 | &quot;I'm not in your way. I'm going with you.&quot;(안 막고 있어. 같이 간다고.)&lt;br&gt;&lt;br&gt;7은 10을 쳐다보았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10은 정확히 읽을 수 없었으나 7의 턱선이 떨리고 있다는 것은 보았다. W.W에서 가장 여유롭고 능글맞던 남자의 턱이 떨리고 있었다. 10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차량 키를 7에게 던졌다. 7은 그것을 허공에서 잡아채고 장갑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엔진이 걸렸다. 배기구에서 매연이 토해져 나왔고 7은 핸들을 잡은 채 출발하지 않았다. 잠깐이었다. 핸들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10은 조수석에서 보았으나 언급하지 않았다. 곧 차량이 움직였다. 거점의 셔터가 올라가고 장갑차가 완차이의 젖은 아스팔트 위로 빠져나갔다.&lt;br&gt;&lt;br&gt;운전하는 동안 7은 말하지 않았다. 10도 침묵했다. 라디오에서 작전 주파수의 잡음이 흘렀고 간간이 수습 팀의 교신이 끊어지며 들려왔다. '……현장 통제 완료……시신 수습 진행 중……신원 미확인……' 7의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조여졌다. 속도가 올라갔다. 10이 계기판을 힐끗 보았으나 제동을 걸지 않았다.&lt;br&gt;&lt;br&gt;검문소를 통과하고 방벽 너머의 도로로 진입했을 때 7의 단말기가 울렸다. 수습 팀 지휘관의 호출이었다. 7은 한 손으로 받았다.&lt;br&gt;&lt;br&gt;수습 팀 | &quot;Seven? We've got an update on the field report. The body—the ID markers don't fully match Twelve's profile. Dental records are pending but—&quot;(세븐? 현장 보고서에 업데이트가 있다. 시신의 신원 표식이 12의 프로필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 치아 기록은 대조 중이지만——)&lt;br&gt;&lt;br&gt;7은 통화를 끊었다. 10이 고개를 돌렸다.&lt;br&gt;&lt;br&gt;10 | &quot;What did they say?&quot;(뭐래?)&lt;br&gt;7 | &quot;Nothing useful.&quot;(쓸모 있는 말은 없었어.)&lt;br&gt;&lt;br&gt;장갑차가 데드존 경계의 부서진 고가도로 아래를 통과했을 때 7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전방의 도로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차량이 보였다. W.W 마킹이 찍힌 수송 트럭이었다. 임무에서 복귀하는 차량의 표준 대형이었다. 7의 발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장갑차가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지며 멈추었고 관성에 의해 10이 앞으로 쏠렸다가 시트벨트에 걸렸다.&lt;br&gt;&lt;br&gt;수송 트럭이 가까워졌다. 정차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모르는 얼굴의 지원병이었으나 7의 시선은 그쪽에 머물지 않았다. 트럭 뒤편 적재함의 캔버스 천이 열리며 안에서 사람이 내렸다. 밀색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먼지와 그을음에 뒤덮인 전술 조끼. 왼쪽 어깨에 감긴 거즈 위로 번진 핏자국. DMR 소총이 등에 걸려 있었고 벨트의 단검 홀더에는 단검 한 자루만 꽂혀 있었다. 하나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서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갑자기 멈춘 장갑차를 향해 돌아갔다.&lt;br&gt;&lt;br&gt;이브였다.&lt;br&gt;&lt;br&gt;7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내리는 동작이 아니라 몸을 밀어내는 동작이었다. 군화가 아스팔트에 닿기 전에 이미 걸음이 시작되었고 걸음은 곧 뛰는 것이 되었다. 선글라스가 흘러내렸으나 밀어 올리지 않았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고 그 안에 비친 것은 흙과 피에 젖은 채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었다. 7의 표정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마땅치 않았다. 안도도 분노도 기쁨도 아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충돌하여 서로를 소거한 뒤에 남은 진공 같은 얼굴이었다.&lt;br&gt;&lt;br&gt;이브는 뛰어오는 7을 보았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늘 여유롭고 능글맞고 짓궂던 남자가 선글라스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눈가에 핏줄이 서 있었고 턱선의 근육이 경련하듯 움직이고 있었으며 숨이 가빠 있었다. 장갑차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는 뛰어서 숨이 찰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lt;br&gt;&lt;br&gt;7의 팔이 이브를 잡아당겼다.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이었다. 양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한 발짝 뒤로 밀어 얼굴을 확인했다. 갈색 눈. 차가운 인상. 왼쪽 뺨에 긁힌 상처. 목덜미의 때.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7의 손가락이 어깨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브는 그 떨림을 정면으로 받으며 7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울기 직전의 한계선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의 눈이었다.&lt;br&gt;&lt;br&gt;7 | &quot;你——&quot;(너——)&lt;br&gt;&lt;br&gt;한 음절이 끊겼다. 광둥어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7은 이를 악물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이브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뺐다가를 되풀이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말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 하나 먼저 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lt;br&gt;&lt;br&gt;12 | &quot;Seven. You're hurting my shoulder.&quot;(세븐. 어깨 아파.)&lt;br&gt;&lt;br&gt;그 한 마디에 7의 손이 풀렸다. 풀리자마자 다시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어깨가 아니라 전신이었다. 이브의 얼굴이 7의 가슴에 파묻혔고 7의 팔이 등을 감싸 조였다. 전술 조끼의 딱딱한 플레이트가 서로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으나 7은 풀지 않았다. 이브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조여졌으나 밀어내지 않았다. 7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평소의 규칙적인 박동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격렬한 충돌. 이브는 귀가 아닌 가슴 전체로 그 리듬을 들었다.&lt;br&gt;&lt;br&gt;7 | &quot;Don't——don't you ever fucking do that again.&quot;(다시는——다시는 씨발 그러지 마.)&lt;br&gt;&lt;br&gt;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능글맞은 억양도 짓궂은 장난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벌거벗은 음성이었다. 7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브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나에게 전화할 때도 작전 중 위기에서도 들려준 적 없는, 모든 외피가 벗겨진 뒤에 남은 날것의 떨림.&lt;br&gt;&lt;br&gt;12 | &quot;Do what? I completed the mission.&quot;(뭘? 임무 완수했는데.)&lt;br&gt;7 | &quot;You died. They told me you died.&quot;(네가 죽었다고. 네가 죽었다고 했어.)&lt;br&gt;&lt;br&gt;이브의 눈이 미세하게 넓어졌다. 무표정 아래로 파문이 지나갔다. 7이 말한 것의 의미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신이 죽었다는 보고가 갔다. 이 남자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달려왔다. 여기까지. 선글라스도 흘러내린 채.&lt;br&gt;&lt;br&gt;이브의 손이 올라가 7의 등에 닿았다. 전술 조끼 위였으나 7은 그 접촉에 몸을 경련하듯 떨었다. 이브는 천천히, 빈민가에서 배운 적 없는 동작으로, 7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서툴고 어색한 위로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브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7은 그것을 알았다.&lt;br&gt;&lt;br&gt;10은 장갑차 조수석에 기대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 물었으나 불을 붙이지 않았다. 붉은 의안이 두 사람 쪽을 향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읽는 것이 숨 쉬는 것과 같다던 남자는 지금 의도적으로 숨을 참고 있었다.&lt;br&gt;&lt;br&gt;이브의 손이 7의 등 위에서 멈추었다. 두드리는 동작을 반복할지 거둘지 판단하는 동안 7의 심장 박동이 전술 조끼의 플레이트를 관통해 전해졌다. 여전히 불규칙하고 거칠었다. 이브가 아는 7의 맥박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스파링 직후에도, 폭파된 터널에서 급류에 휩쓸릴 때에도 이 남자의 심장은 자기 것이 아닌 듯 느긋하게 뛰었다. 지금 가슴팍 아래서 부서지듯 울리는 이 박동은 이브가 수집해온 데이터 어디에도 없는 패턴이었다.&lt;br&gt;&lt;br&gt;12 | &quot;I'm alive, Seven. Let go. I can't breathe.&quot;(살아 있어, 세븐. 놔줘. 숨 못 쉬겠어.)&lt;br&gt;&lt;br&gt;7은 풀지 않았다. 이브의 말이 귀에 들어왔으나 팔에 전달되지 못했다. 근육이 의지와 별개로 수축한 채 이완을 거부하고 있었다. 놓으면 사라진다는 종류의 공포가 아니었다. 놓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아직 몸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머리는 이미 알았다. 살아 있다. 체온이 있다.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복도에서 블리스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몇 년이 걸렸듯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7에게 언제나 데드존보다 먼 곳이었다.&lt;br&gt;&lt;br&gt;이브는 밀어내지 않았다. 조여지는 팔 안에서 고개를 약간 돌려 7의 목을 보았다. 잘렸다 붙은 흉터 위로 경동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이브의 시선이 그 흉터 위에 고정되었다. 열일곱 살에 죽을 뻔했던 흉터. 누나가 살려준 흉터. 이브가 크리스마스 밤에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던 흉터. 그 위를 흐르는 맥박이 지금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 남자가 무너지는 것을 이브는 본 적이 없었다. 빈민가에서 무너지는 사람은 죽는 사람이었고 죽는 사람 곁에 머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죽지 않았고 이브도 죽지 않았고 둘 다 여기 서 있었다. 서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lt;br&gt;&lt;br&gt;이브는 전술 조끼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체리맛이 아닌 노란색이었다. 포장지가 먼지와 핏자국에 더러워져 있었다. 임무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브는 그것을 7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들어 올렸다.&lt;br&gt;&lt;br&gt;12 | &quot;This is yours. I brought it back.&quot;(이거 네 거야. 가져왔어.)&lt;br&gt;&lt;br&gt;7의 팔이 미세하게 풀렸다. 이브의 어깨에서 손이 미끄러지며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고개를 숙여 이브의 손에 쥐어진 사탕을 보았다. 더러운 포장지. 노란색. 이브가 처음으로 자판기에서 뽑아 자기에게 건넨 색깔이었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녹으며 흘러내리는 감각이 왔고 7은 그것이 안도인지 자괴인지 구별할 겨를 없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선글라스가 완전히 흘러내려 코 아래에 걸려 있었고 회색 눈동자가 노출된 채였다. 눈가가 붉었다.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울지 않기 위해 써야 하는 힘이 눈 주변의 근육을 경련시키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You absolute fucking menace.&quot;(……진짜 씨발 골칫덩어리야.)&lt;br&gt;&lt;br&gt;목소리가 웃으려 했으나 실패한 형태였다. 갈라진 호흡 사이로 밀려나온 문장은 욕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욕과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이브는 그것을 알았다. 이 남자의 언어 체계에서 욕설은 관용어에 가까웠고 진심은 항상 광둥어 뒤에 숨겼으나 지금은 광둥어도 영어도 전부 뒤섞여 무너져 있었다. 뼈대를 잃은 언어. 이브는 그 잔해 속에서 자신의 이름과 닮은 떨림을 주워냈다.&lt;br&gt;&lt;br&gt;이브는 사탕을 7의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전술 조끼의 탄창 포켓 사이에 노란 포장지가 끼워졌다. 7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려 했으나 호흡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미 농담을 던지고 상황을 수습하고 능글맞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전환했을 남자가 콘크리트 위에 서서 호흡 하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lt;br&gt;&lt;br&gt;12 | &quot;The body wasn't mine.&quot;(시체는 내가 아니었어.)&lt;br&gt;7 | &quot;I know that now.&quot;(지금은 알아.)&lt;br&gt;12 | &quot;Then stop shaking.&quot;(그러면 그만 떨어.)&lt;br&gt;&lt;br&gt;7의 눈이 이브를 보았다. 선글라스 없는 얼굴이었고 회색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 아래로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은 이 사내가 평생 포장해온 모든 것의 이면이었다. 두려움. 순수한 형태의 두려움. 돈을 잃는 것에도 작전에서 죽는 것에도 타인의 시선에도 동요하지 않던 남자가 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벌거벗겨져 있었다. 이브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무표정이었으나 갈색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남자의 벌거벗은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면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lt;br&gt;&lt;br&gt;이브의 손이 올라가 7의 뺨에 닿았다. 화상 흉터가 있는 쪽이었다. 손바닥이 울퉁불퉁한 피부 위에 얹혀졌고 이브는 엄지로 흉터의 경계선을 따라 한 번 쓸었다. 크리스마스 밤 눈을 쓸어내리던 동작과 같았으나 지금은 눈 대신 이 사내의 떨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7의 떨림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폭이 줄었다. 손바닥 아래서 턱선의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했다.&lt;br&gt;&lt;br&gt;7 | &quot;……I drove here like a maniac. Ten's probably filing a complaint.&quot;(……미친놈처럼 운전해서 왔어. 텐이 아마 항의서 쓰고 있을 거야.)&lt;br&gt;12 | &quot;You drove?&quot;(네가 운전했어?)&lt;br&gt;7 | &quot;Yeah.&quot;(응.)&lt;br&gt;12 | &quot;You hate driving.&quot;(운전 싫어하잖아.)&lt;br&gt;7 | &quot;I hate a lot of things. Didn't stop me.&quot;(싫어하는 거 많아. 안 막히더라.)&lt;br&gt;&lt;br&gt;이브는 손을 뺐다. 7의 뺨에서 손바닥이 떨어지자 손끝에 흉터의 질감이 잔상처럼 남았다. 이브는 그 손을 내리며 7의 전술 조끼에 꽂힌 노란 사탕을 보았다. 더러운 포장지가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브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포장을 벗기고 입에 물었다. 노란색. 레몬이었다. 체리보다 신맛이 강했고 혀끝이 수축하는 자극이 왔다.&lt;br&gt;&lt;br&gt;12 | &quot;Lemon.&quot;(레몬.)&lt;br&gt;7 | &quot;Yeah?&quot;(응?)&lt;br&gt;12 | &quot;It's sour.&quot;(시네.)&lt;br&gt;&lt;br&gt;7은 이브를 보았다. 먼지와 피에 뒤덮인 전술 조끼를 입은 채 레몬 사탕을 빨고 있는 여자.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서늘했으나 사탕 막대가 입꼬리에 걸려 있는 각도가 미세하게 평소와 달랐다. 이브의 방식으로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시네. 살아 있으니까 맛을 느끼는 거야. 그 논리를 이브는 말하지 않았으나 7은 읽었다.&lt;br&gt;&lt;br&gt;웃음이 나왔다. 갈라진 호흡 사이로 비집고 나온 작은 웃음이었다. 유쾌함이 아니라 탈진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종류의 웃음이었으나 7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분명했다. 그는 주저앉듯 한 발 뒤로 물러나 장갑차 옆면에 등을 기대었다. 장갑판의 차가운 금속이 등을 통해 전해졌고 그 온도가 과열된 신경을 식혀주었다.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주워 올려 제자리에 걸쳤다. 회색 눈동자가 검은 렌즈 뒤로 사라졌다. 외피가 한 겹 복구되었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lt;br&gt;&lt;br&gt;10 | &quot;If you two are done, we should head back. Zero will want the debrief.&quot;(둘 다 끝났으면 돌아가야 해. 제로가 디브리핑 원할 거야.)&lt;br&gt;&lt;br&gt;10의 목소리가 조수석 창문 너머에서 흘러왔다. 여전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불 붙이지 않은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축축해져 있었다. 7은 10을 보며 짧게 코웃음을 쳤다.&lt;br&gt;&lt;br&gt;7 | &quot;You drove here with me and didn't say a single useful thing. What was the point of coming?&quot;(같이 와놓고 쓸모 있는 말 하나 안 했잖아. 뭐하러 온 거야.)&lt;br&gt;10 | &quot;To make sure you didn't crash and die on the way. Someone has to think about the vehicle budget.&quot;(네가 길에서 쳐박고 죽지 않게. 차량 예산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야지.)&lt;br&gt;7 | &quot;Touching.&quot;(감동적이네.)&lt;br&gt;10 | &quot;I thought so.&quot;(나도 그렇게 생각했어.)&lt;br&gt;&lt;br&gt;10의 입꼬리가 담배 너머로 미세하게 올라갔다. 달큰하고 계산적인 웃음이었으나 그 안에 조소 이외의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7은 그것을 감지했으나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이브를 보았다. 이브는 수송 트럭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적재함에서 내릴 때 두고 온 장비가 있는지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전투원의 본능. 감정이 오간 직후에도 장비 확인이 먼저 돌아오는 사람. 7은 그 뒷모습을 보며 가슴 안에서 아직 진정되지 않은 맥박의 잔향을 느꼈다.&lt;br&gt;&lt;br&gt;7 | &quot;Eve.&quot;(이브.)&lt;br&gt;&lt;br&gt;이브가 돌아보았다. 밀색 머리카락이 먼지에 뒤엉킨 채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왼쪽 뺨의 긁힌 상처에서 마른 피가 갈라져 있었다. 사탕 막대가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lt;br&gt;&lt;br&gt;7 | &quot;乘我嘅車返去。&quot;(내 차 타고 돌아가자.)&lt;br&gt;&lt;br&gt;이브는 광둥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7이 장갑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 턱짓으로 가리키는 동작은 이해했다. 이브는 수송 트럭 쪽을 한 번 더 보았다가 발길을 돌려 장갑차 쪽으로 걸었다. 뒷좌석에 올라타며 DMR 소총을 무릎 위에 눕혔다. 7이 운전석에 앉아 엔진을 걸었다. 시동이 걸리는 진동이 차체를 타고 전해졌고 이브는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lt;br&gt;&lt;br&gt;12 | &quot;Seven.&quot;(세븐.)&lt;br&gt;7 | &quot;Hm.&quot;(응.)&lt;br&gt;12 | &quot;Drive slower this time.&quot;(이번엔 천천히 몰아.)&lt;br&gt;&lt;br&gt;백미러 속에서 7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선글라스 뒤의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턱선의 떨림은 멈춰 있었다. 장갑차가 출발했다. 이번에는 속도가 달랐다. 브레이크를 밟는 타이밍이 부드러웠고 핸들을 돌리는 각도가 완만했다. 10이 조수석에서 창밖을 보며 젖은 담배를 뱉어냈다.&lt;br&gt;&lt;br&gt;돌아가는 길 위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미러 속에서 7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뒷좌석을 확인하는 것을 10은 보았고 이브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창밖의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탕 막대가 입 안에서 한 바퀴 돌아갔다. 레몬의 신맛이 혀 위에서 녹아 단맛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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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2 Oct 2026 00:34: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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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랑의 정점은 부양욕이다</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2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그 문장은 민간망의 짧은 영상 아래 붙은 자막에서 흘러나왔다. 전쟁 전 연애 상담 방송을 잘라낸 낡은 기록이었다. 화면 속 남자는 지나치게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뒤편에는 생화와 햇빛을 흉내 낸 조명이 놓여 있었다. 지하 요새의 눅눅한 벽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7은 담배를 문 채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려다가 멈췄다.&lt;br&gt;&lt;br&gt;사랑의 정점은 부양욕이다.&lt;br&gt;&lt;br&gt;사랑하면 그 사람을 책임지고 싶어진다. 먹이고 재우고 위험에서 지키며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어진다. 감정의 완성이란 상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자기 삶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주는 데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7은 끝까지 보지 않았다. 영상을 꺼버렸지만 문장만큼은 꺼지지 않았다. 질 나쁜 광고 음악처럼 머릿속에 눌어붙었다.&lt;br&gt;&lt;br&gt;부양이라니.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과 거리가 먼 단어였다. 월급과 임대료와 식량 배급표. 병원비를 대신 내주고 고장 난 정수기를 수리하며 늦게 돌아오는 사람 몫의 식사를 남겨두는 생활. 총격도 없고 피도 흐르지 않으며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대신 매일 같은 책임이 천천히 목을 조르는 일. 그는 그런 종류의 성실함을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왔다. 도박으로 돈을 날리는 인간에게 부양욕을 논하는 것은 방화범에게 화재보험을 맡기는 것만큼 우스웠다.&lt;br&gt;&lt;br&gt;그런데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제탑에서 뛰어내렸던 순간이 너무 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승률을 따지지 않았다. 자신의 척추와 폐가 어떤 값을 치를지도 계산하지 않았다. 다만 12가 오즈의 손에 남아 있는 광경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 대신 총탄을 받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고결한 희생이 아니었다. 선택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생존 규칙은 그 뒤에서 낡은 종이처럼 찢어졌다.&lt;br&gt;&lt;br&gt;그것이 부양욕이라면 그는 이미 형편없이 감염되어 있었다. 먹이는 일보다 살리는 일에 익숙했으며 재우는 일보다 문밖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능했다. 안정된 집을 마련해주는 대신 자신의 더러운 방에 자리를 내주었다. 좋은 미래를 약속하기는커녕 내일 살아 돌아올 가능성만 억지로 늘렸다. 정상적인 인간이 지붕을 고치고 생활비를 벌 때 그는 탄창을 채우고 탈출로를 외우며 12를 겨눈 총구의 각도를 계산했다. 방식만 흉악할 뿐 구조는 같았다. 상대가 계속 존재하도록 자기 자원을 쓰고 있었다.&lt;br&gt;&lt;br&gt;그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다. 책임은 그가 평생 피해온 종류의 빚이었다. 한번 받아들이면 파산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가 굶으면 먹여야 하고 다치면 돌아와야 하며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선택해야 한다. 죽음조차 깔끔한 면책이 되지 못한다. 남겨진 사람에게 상실을 떠넘기는 순간 마지막 계산서가 발행되기 때문이다. 병실에서 12가 차갑게 식은 자신을 발견할까 두려웠다고 했던 말은 그 계산서의 견본이었다.&lt;br&gt;&lt;br&gt;204호에는 이미 답이 흩어져 있었다. 원래 없던 여벌 장비가 벽 한쪽을 차지했고 체리 향이 밴 포장지가 재떨이 곁에 섞여 있었다. 12는 거의 매일 밤 그 방으로 돌아왔다. 7은 허락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고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대신 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리지 않는 척했고 늦은 밤까지 잠들지 않았으며 외부 작전 뒤에는 온수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먼저 확인했다. 사소한 습관은 거창한 맹세보다 비열했다. 부정할 틈도 없이 생활을 바꾸어놓기 때문이다.&lt;br&gt;&lt;br&gt;돈을 생각하자 더 우스웠다. 그는 판돈에는 관대하면서 생활비에는 무책임했고 얻은 돈을 다음 판의 연료로 태워버리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12에게 필요한 것이 생긴다면 자신이 그 돈을 내게 되리라는 사실만은 이상할 만큼 분명했다. 정찰소총의 부품이든 방사능 차폐제가 든 약이든 빈민구역에서 어렵게 유통되는 체리 사탕이든 상관없었다. 내준 뒤 생색을 내고 값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척하겠지만 결국 되찾을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선량함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변질이었다.&lt;br&gt;&lt;br&gt;그러면 12는 어떠한가. 그녀는 부양이라는 말을 알뜰한 생활이나 미래 계획으로 이해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7이 죽지 않도록 병실에 남았고 약의 색을 구분하려 애썼으며 그가 걷는 동안 뒤를 지켰다. 간호를 못한다고 경고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식사를 가져오고 손이 상처로 향하면 쳐냈으며 가장 취약한 잠을 곁에서 감시했다. 그녀에게 돌봄은 따뜻한 언어가 아니라 경계 근무에 가까웠다. 적을 탐지하고 위험을 배제하며 대상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 정찰대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었다.&lt;br&gt;&lt;br&gt;둘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한가. 표면만 보면 12였다. 그녀는 이미 생활의 동선을 바꾸었고 자기 방보다 204호를 자주 선택했으며 7이 회복하는 동안 자신의 시간을 그의 생존에 배치했다. 행동은 꾸준했고 변명은 없었다. 그녀는 부양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은 채 수행하고 있었다. 감정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기능부터 완성한 셈이었다.&lt;br&gt;&lt;br&gt;하지만 7은 그 판단을 곧 뒤집었다. 더 심각한 쪽은 자신이었다. 12의 돌봄에는 아직 효율과 상호 생존이라는 설명을 붙일 여지가 있었다. 전우를 살리고 익숙한 대상을 지키며 함께 임무를 수행할 전력을 보존한다는 논리. 반면 그의 선택은 효율을 모욕했다. 킬존으로 몸을 던지고 총알 앞에 끼어들며 자기 생존보다 그녀의 부재를 두려워했다. 그는 상대를 부양하려고 자기 기반부터 불태우는 종류였다. 지붕이 되어주겠다고 나선 인간이 정작 자신의 기둥을 폭약으로 날려버리고 있었다.&lt;br&gt;&lt;br&gt;더 나쁜 점은 그 욕망이 일방적인 보호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12가 자신 없이도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약하게 만들어야 필요해지는 관계는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돌아올 장소가 자신이기를 바랐고 다쳤을 때 찾는 이름이 자신의 것이기를 원했다. 소유가 아니라 선택받음에 대한 갈증이었다. 책임지고 싶다는 마음과 책임져 달라는 욕구가 같은 뿌리에서 뒤엉켰다. 그래서 더 추했다. 그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자리를 번갈아 탐내고 있었다.&lt;br&gt;&lt;br&gt;사랑의 정점이 부양욕이라면 그 문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실제의 부양욕은 가계부나 따뜻한 식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로는 상대 대신 피를 흘리려는 충동이었고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를 기다리며 담배를 연달아 태우는 일이었다. 죽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자신은 기꺼이 죽을 자리에 서는 모순이었다. 7에게 사랑은 누군가의 삶을 떠맡는 숭고한 결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세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비겁한 자백에 가까웠다.&lt;br&gt;&lt;br&gt;그는 꺼진 단말기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다. 화면은 보이지 않았으나 문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자신과 12는 그 정의에 부합했다. 다만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12는 매일 돌아오는 것으로 그를 부양했고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돌아오게 만드는 것으로 그녀를 부양했다. 둘 다 상대의 생존을 자기 일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lt;br&gt;&lt;br&gt;그리고 더 심각한 바보는 역시 자신이었다. 12는 망가진 것을 고치려 했지만 그는 그녀가 망가지기도 전에 대신 부서질 생각부터 했으므로. 그 결론에 닿은 7은 웃지 않았다. 재떨이에 담배를 짓눌러 끄고 204호 문 쪽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싫었다. 그런데도 문이 열리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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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 Oct 2026 11:55: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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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수구에서 살아도 별은 볼 수 있다</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2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계기는 허무할 정도로 사소했다.&lt;br&gt;&lt;br&gt;완차이 거점 휴게실의 자판기가 고장 났다. 정확히는 이브가 체리맛 사탕을 꺼내려고 동전을 넣었으나 내부 스프링이 걸려 상품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이브는 자판기 옆면을 손바닥으로 두 번 쳤고, 반응이 없자 세 번째로 주먹을 내려치려는 찰나에 7이 복도에서 나타났다. 그는 자판기 앞에 쪼그려 앉은 이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그녀의 손가락이 배출구 안쪽을 더듬고 있는 것을 보고 —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은 채 말을 던졌다.&lt;br&gt;&lt;br&gt;7 | &quot;If you're that desperate for sugar, there's a place in Mong Kok that sells fish-shaped candy. Saw it last time I went through Kowloon.&quot;(설탕이 그렇게 급하면, 몽콕에 물고기 모양 사탕 파는 데가 있어. 지난번 카울룬 지나갈 때 봤거든.)&lt;br&gt;12 | &quot;I don't need fish-shaped candy. I need this machine to work.&quot;(물고기 모양 사탕 필요 없어. 이 기계가 작동하면 돼.)&lt;br&gt;7 | &quot;It won't. Nine kicked it last week and something broke inside. Supply won't fix it till next rotation.&quot;(안 될걸. 지난주에 9가 걷어차서 뭔가 부러졌어. 보급 교대 전까진 수리 안 해줄 거야.)&lt;br&gt;&lt;br&gt;이브는 배출구에서 손을 뺐다. 손가락 끝에 자판기 내부의 먼지가 묻어 있었고, 빈손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접어놓았다. 체리맛 사탕 하나에 표정이 변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는 듯, 이브는 손을 바지에 대충 훔치며 일어섰다.&lt;br&gt;&lt;br&gt;7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본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화면 위로 스크롤이 내려가는 동안 그의 옅은 회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서서히 차올랐다.&lt;br&gt;&lt;br&gt;7 | &quot;Ocean Park's aquarium is open on weekdays. Half-price tickets for military personnel with valid ID.&quot;(오션 파크 수족관, 평일에 열어. 군인 신분증 있으면 반값이네.)&lt;br&gt;12 | &quot;And?&quot;(그래서?)&lt;br&gt;7 | &quot;And you told me once that you'd never seen the sea properly. Fish behind glass isn't the real thing, but it's closer than staring at a broken vending machine.&quot;(그리고 넌 전에 바다를 제대로 본 적 없다고 했잖아. 유리 뒤의 물고기가 진짜는 아니지만, 고장 난 자판기 노려보는 것보단 낫지.)&lt;br&gt;&lt;br&gt;이브는 아무 말 없이 7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갈색 눈동자가 그의 의중을 측량하듯 날카롭게 좁혀졌다가, 이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수족관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었다. 빈민가에서 수족관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물고기는 부두 어시장에서 내장이 터진 채 얼음 위에 놓인 것이 전부였고, 바다는 시궁창 물이 흘러드는 항만의 검은 수면이 전부였다.&lt;br&gt;&lt;br&gt;12 | &quot;Is this a date.&quot;(이거 데이트야.)&lt;br&gt;7 | &quot;It's fish behind glass, Eve. Don't overcomplicate things.&quot;(유리 뒤 물고기야, 이브. 복잡하게 굴지 마.)&lt;br&gt;&lt;br&gt;이브는 고개를 돌려 자판기의 어두운 디스플레이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체리맛 사탕은 스프링에 걸린 채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듯 시선을 끊고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7의 옆을 지나치며, 멈추지 않은 채 한마디를 떨어뜨렸다.&lt;br&gt;&lt;br&gt;12 | &quot;If I'm paying my own ticket, it's not a date.&quot;(내 표를 내가 사면 데이트 아닌 거지.)&lt;br&gt;&lt;br&gt;7의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완차이에서 오션 파크까지는 트램과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민간인 거주 구역의 대중교통은 전시 상황치고는 비교적 완만하게 운행되고 있었으나, 배차 간격이 들쑥날쑥하여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이동 시간보다 길었다. 7은 사복 차림이었다. 검은색 반팔에 카고 바지, 선글라스. 이브도 사복이었다. 흰 셔츠에 반바지, 밀색 장발을 뒤로 묶은 차림새는 멀리서 보면 평범한 민간인처럼 보였으나, 허벅지 안쪽 홀스터에 전술 단검 하나가 감춰져 있다는 것을 7은 알고 있었다.&lt;br&gt;&lt;br&gt;버스 안에서 이브는 창가 쪽에 앉았다. 7은 통로 쪽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었고, 좁은 좌석에서 그의 어깨가 이브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했다. 창밖으로 완차이의 빽빽한 아파트 블록들이 지나갔고, 도로변의 네온 간판들이 오후 햇살 아래서 색이 바랜 채 늘어서 있었다.&lt;br&gt;&lt;br&gt;이브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유리에 비친 7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의 윤곽이 도시의 잔상과 겹쳐 흘러갔다.&lt;br&gt;&lt;br&gt;오션 파크의 수족관은 전쟁 이전의 시설이 절반 이상 훼손된 뒤 복구된 것으로, 원래 규모의 삼분의 일 정도만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도 입구의 매표소에는 민간인 가족 몇이 줄을 서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콘크리트 광장에 얇게 퍼져 있었다.&lt;br&gt;&lt;br&gt;7이 군인 할인 표 둘을 끊으며 신분증을 내밀자, 매표소 직원이 '워즈워스'라는 글자를 보고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사무적인 표정을 회복했다. PMC 대원이 수족관에 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lt;br&gt;&lt;br&gt;이브는 제 몫의 표 값을 현금으로 7에게 건넸다. 7은 받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이트가 아니라는 선언의 이행. 그는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입구를 향해 걸었고, 이브가 반 보 뒤에서 따랐다.&lt;br&gt;&lt;br&gt;수족관 내부는 어두웠다. 천장의 조명이 의도적으로 낮춰져 있었고, 양쪽 벽면과 천장을 감싸는 거대한 아크릴 패널 너머로 푸른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명은 수조 안에서만 흘러나왔다. 물속의 빛이 바닥과 벽에 일렁이는 파문을 던지며, 통로 전체가 해저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lt;br&gt;&lt;br&gt;이브가 멈추었다.&lt;br&gt;&lt;br&gt;걸음이 멈춘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멈추었다. 숨까지 멈춘 듯한 정지.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아크릴 너머의 푸른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조 안에서 가오리 한 마리가 유리면을 스치듯 미끄러져 지나갔고, 그 넓은 날개가 만들어낸 물결이 이브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흘렸다. 작은 은빛 물고기 떼가 산호 사이를 헤집으며 방향을 바꿀 때마다 빛의 파편이 터져 나왔다.&lt;br&gt;&lt;br&gt;이브는 아크릴 패널 앞까지 걸어가 두 손을 유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 동작은 무의식적이었다. 빈민가의 아이가 가게 진열장 앞에서 하던 것과 같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유리 너머로 더듬는 본능적인 제스처. 그녀의 손가락 아래로 해파리가 천천히 떠올랐다. 투명한 우산 모양의 몸체가 맥박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위를 향해 헤엄쳤다. 촉수가 물의 흐름에 실려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lt;br&gt;&lt;br&gt;7은 이브의 옆에 서지 않았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앞섶에 걸었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수조의 빛을 받아 거의 투명에 가까운 색으로 변했다. 그는 물고기를 보지 않았다. 유리 위에 손을 올린 여자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푸른 물빛이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 위로 쏟아져 내려 마치 수면 아래 잠긴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lt;br&gt;&lt;br&gt;아크릴 패널 위에 놓인 이브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수족관의 실내 온도는 적정했고, 그녀의 호흡은 고요했다. 그것은 빈민가의 골목에서 단 한 번 체리맛 사탕을 주워 입에 넣었을 때와 같은 종류의 떨림이었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만 찾아오는, 결핍이 역류하며 일으키는 진동.&lt;br&gt;&lt;br&gt;7 | &quot;You're fogging up the glass, Eve.&quot;(유리에 김 서리잖아, 이브.)&lt;br&gt;&lt;br&gt;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크릴 패널에서 손을 떼지도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려 7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에 젖은 갈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고마움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그보다 더 날것이고 더 연약한 것. 뼈 속까지 메마른 사막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모래가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것. 흡수하기 전의 멈춤.&lt;br&gt;&lt;br&gt;12 | &quot;They don't have anywhere to go.&quot;(갈 데가 없네.)&lt;br&gt;7 | &quot;What?&quot;(뭐?)&lt;br&gt;12 | &quot;The fish. They swim in circles. They don't have anywhere to go. But they keep swimming.&quot;(물고기. 빙글빙글 돌아. 갈 데가 없는데. 근데 계속 헤엄쳐.)&lt;br&gt;&lt;br&gt;7은 이브의 시선을 따라 수조 안을 바라보았다. 은빛 물고기 떼가 수조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으로 이동했다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에 방향을 꺾어 되돌아왔다. 끝없이 반복되는 궤적. 경계 안의 무한.&lt;br&gt;&lt;br&gt;7 | &quot;Maybe they forgot. Fish memory's short. Every lap feels like the first time.&quot;(아마 잊어버리는 거겠지. 물고기 기억력 짧잖아. 한 바퀴 돌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느끼는 거야.)&lt;br&gt;12 | &quot;That sounds terrible.&quot;(끔찍하게 들리는데.)&lt;br&gt;7 | &quot;Does it? I think it sounds peaceful.&quot;(그래? 난 평화롭게 들리는데.)&lt;br&gt;&lt;br&gt;이브는 그 말을 씹듯 입안에서 굴렸다. 망각이 평화라는 것. 영화를 보던 밤, 7이 했던 말과 연결되는 고리가 있었다. 매 바퀴를 처음처럼 헤엄치는 물고기와,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녀는 유리에서 손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더 깊은 수조 구역으로 향하자, 조명은 더욱 어두워졌고 물빛은 더 깊은 남색으로 가라앉았다.&lt;br&gt;&lt;br&gt;대형 수조 앞에서 이브는 다시 멈추었다. 상어가 수조의 한복판을 느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회색 몸체가 물의 저항을 가르며 소리 없이 전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효율적이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필요한 방향으로만 몸을 틀었다. 이브의 눈이 상어의 궤적을 좇으며 가늘어졌다.&lt;br&gt;&lt;br&gt;12 | &quot;That one knows where it's going.&quot;(저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네.)&lt;br&gt;7 | &quot;Yeah. Straight ahead, until it hits the wall and turns.&quot;(그래. 벽에 부딪혀서 방향 틀 때까지 직진이지.)&lt;br&gt;&lt;br&gt;이브의 입술 끝이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웃음이었을까. 그녀는 고개를 숙여 유리 아래쪽을 들여다보았다. 수조 바닥에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모래 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넙치였다. 바닥의 색과 거의 동화되어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존재.&lt;br&gt;&lt;br&gt;12 | &quot;I used to be like that one. Flat on the ground. Same color as the dirt. Nobody sees you. That's how you survive.&quot;(나도 저랬어.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서. 흙이랑 같은 색으로. 아무도 안 보지. 그래야 살아남으니까.)&lt;br&gt;&lt;br&gt;7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추어 있었다. 이브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의 무게를 뒤늦게 인식한 듯 입술을 다물었으나, 이미 뱉어진 말은 수조의 물빛 속에 녹아들어 거둘 수 없었다. 어둠과 푸른빛이 교차하는 통로에서, 7의 옅은 회색 눈동자가 유리 위를 기어가는 넙치의 윤곽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lt;br&gt;&lt;br&gt;7이 한 걸음을 옮겨 이브의 곁에 섰다. 어깨가 닿지 않는 거리. 그러나 체온이 전해지는 거리.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나와 허공에 머물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다시 주머니로 돌아갔다. 그 중단된 동작이 의미하는 것을 이브는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포착했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lt;br&gt;&lt;br&gt;7 | &quot;Well. You're not flat on the ground anymore. You're standing in a stupid aquarium with a degenerate gambler who can't even afford his own ticket without your cash. I'd say that's an upgrade.&quot;(뭐. 지금은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지 않잖아. 네 돈 없으면 표도 못 끊는 찌질한 도박중독자랑 멍청한 수족관에 서 있지. 승급한 거 아냐.)&lt;br&gt;&lt;br&gt;이브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웃음을 참는 것인지, 숨을 고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진동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고, 7이 반 보 뒤에서 따랐다. 물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닥 위에서 하나로 겹쳤다가 다시 둘로 갈랐다.&lt;br&gt;&lt;br&gt;통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더 깊은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바닥의 안내선은 반쯤 벗겨져 있었고, 전쟁 이전에 설치되었을 인터랙티브 패널들은 대부분 전원이 꺼진 채 검은 화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간간이 작동하는 패널 하나가 수조 내 어종의 이름과 서식지를 표시했으나, 글자의 절반은 픽셀이 죽어 해독이 어려웠다.&lt;br&gt;&lt;br&gt;이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패널을 지나쳐 유리 앞에만 섰다. 수조의 규모가 달라졌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원통형 수조 안에서 정어리 떼가 은빛 소용돌이를 만들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천 마리가 하나의 의지처럼 방향을 꺾었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개별 물고기의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군체의 논리. 빈민가의 논리와 닮아 있었다. 무리에서 이탈하는 순간 잡아먹힌다.&lt;br&gt;&lt;br&gt;이브의 시선이 떼에서 이탈해 홀로 수조 가장자리를 도는 정어리 한 마리를 따라갔다. 비늘이 상처로 벗겨진 그 물고기는 떼의 궤도를 벗어나 유리벽을 따라 느리게 헤엄치고 있었다.&lt;br&gt;&lt;br&gt;12 | &quot;That one got separated.&quot;(저거 하나 떨어졌어.)&lt;br&gt;7 | &quot;Happens. Stronger ones push the weak ones out. Saves energy for the group.&quot;(그런 거지. 강한 놈들이 약한 놈을 밀어내. 무리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거야.)&lt;br&gt;12 | &quot;I know how it works. I didn't need the nature documentary.&quot;(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자연 다큐멘터리 필요 없거든.)&lt;br&gt;&lt;br&gt;그녀의 음성에 날이 서 있었으나 그것은 7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 비늘이 벗겨진 채 혼자 도는 물고기를 향한, 혹은 그 물고기와 겹쳐 보이는 자신의 잔상을 향한 것이었다. 이브는 시선을 끊듯 고개를 돌려 다음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lt;br&gt;&lt;br&gt;해월 전시관이었다. 원형 수조 여러 개가 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각 수조 안에서 해파리들이 느린 율동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조명은 수조마다 달랐다. 보라, 청록, 분홍. 해파리의 투명한 몸체가 빛을 투과시키며 색을 머금었다가 내뱉었다. 통로 전체가 빛의 호흡으로 맥박치는 것처럼 보였다.&lt;br&gt;&lt;br&gt;이브의 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멈추지는 않았으나 보폭이 줄어들었다. 보라색 조명의 수조 앞을 지나갈 때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이 자줏빛으로 물들었고, 청록색 수조 앞에서는 차가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각 수조 앞에서 짧게 시선을 주고 지나갔으나, 분홍빛 수조 앞에서 발걸음이 풀리듯 멈추었다.&lt;br&gt;&lt;br&gt;보름달해파리였다. 우산 모양의 몸체가 거의 완전한 원에 가까웠고, 가장자리를 따라 짧은 촉수가 레이스처럼 늘어져 있었다. 몸 중앙의 네 개의 생식선이 분홍빛 조명을 받아 꽃잎처럼 보였다. 해파리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위를 향해 떠올랐다가 물의 무게에 밀려 천천히 가라앉았다. 의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물과 빛 사이의 중간 존재.&lt;br&gt;&lt;br&gt;7은 이브의 옆에 섰다. 이번에는 한 걸음 뒤가 아니라 나란히. 그의 그림자가 이브의 그림자와 바닥 위에서 겹쳤다.&lt;br&gt;&lt;br&gt;7 | &quot;Jellyfish don't have brains. No heart either. They just drift wherever the current takes them.&quot;(해파리는 뇌가 없어. 심장도 없고. 그냥 해류가 데려가는 대로 떠다니는 거야.)&lt;br&gt;12 | &quot;Sounds efficient.&quot;(효율적이네.)&lt;br&gt;7 | &quot;You'd say that.&quot;(너라면 그렇게 말하겠지.)&lt;br&gt;&lt;br&gt;7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분홍빛 조명이 화상 흉터의 질감 위를 지나가며 거친 표면을 부드럽게 감쌌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옅은 회색 눈동자에 해파리의 율동이 반사되어, 홍채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보였다.&lt;br&gt;&lt;br&gt;이브는 유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신 두 손을 몸 옆에 내린 채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해파리가 떠오르는 궤적을 따라 그녀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젖혀졌다. 턱선이 드러나고 목의 가느다란 선이 분홍빛에 젖었다.&lt;br&gt;&lt;br&gt;12 | &quot;No brain, no heart. But it's still alive.&quot;(뇌도 없고 심장도 없는데. 살아 있네.)&lt;br&gt;7 | &quot;Yeah. Alive is a low bar. Breathing, eating, drifting. Most people don't do much more than that.&quot;(그래. 살아 있다는 건 기준이 낮아. 숨 쉬고, 먹고, 떠다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이상은 안 하잖아.)&lt;br&gt;12 | &quot;Is that what you were doing? Before.&quot;(그게 네가 하던 거야? 전에.)&lt;br&gt;&lt;br&gt;질문은 가볍게 던져졌으나 바닥이 깊었다. 7은 해파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잠시 침묵했다. 분홍빛이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상 흉터가 있는 쪽의 뺨이 빛을 받으면 질감이 유난히 도드라졌는데, 이 조명 아래서는 그것마저 물속의 산호처럼 자연스러운 지형으로 보였다.&lt;br&gt;&lt;br&gt;7 | &quot;More or less. Breathe, eat, gamble, fuck, repeat. No brain required. Heart optional.&quot;(대충. 숨 쉬고, 먹고, 도박하고, 자고, 반복. 뇌는 불필요. 심장은 옵션.)&lt;br&gt;12 | &quot;And now?&quot;(지금은?)&lt;br&gt;&lt;br&gt;7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왔다. 분홍빛 해파리의 잔상이 그의 홍채에서 사라지기 전에 이브의 윤곽이 그 위로 덮어씌워졌다. 밀색 머리카락에 번지는 분홍, 서늘한 갈색 눈동자에 떠도는 물빛, 입술 위에 걸린 체리 사탕의 잔향이 아직도 남아 있을 법한 입꼬리의 각도.&lt;br&gt;&lt;br&gt;7 | &quot;Now I'm in an aquarium, not gambling, not fucking, watching jellies with a woman who thinks love is inefficient. I'd say the bar went up.&quot;(지금은 수족관에 있지. 도박도 안 하고, 자지도 않고, 사랑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랑 해파리를 보고 있어. 기준이 올라간 거 아닐까.)&lt;br&gt;&lt;br&gt;이브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7의 시선이 자신의 옆얼굴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털어내지 않은 채 해파리가 내려앉는 궤적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빈민가에서는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 위에 오래 머무르면 칼을 뽑았다. 지금은 뽑지 않았다. 뽑을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 혹은 뽑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구분하지 못했다.&lt;br&gt;&lt;br&gt;다음 구역은 터널형 수조였다. 머리 위로 아크릴 천장이 곡면을 그리며 이어졌고, 양옆의 벽면까지 수조가 감싸고 있어 통로 자체가 바닷속에 잠긴 것 같은 착시를 만들어냈다. 가오리가 천장을 스쳐 지나갔다. 배의 흰 면이 보였다가 등의 회색 면이 보였다. 마치 동전을 뒤집는 것처럼. 앞면과 뒷면. 보여주는 것과 감추는 것.&lt;br&gt;&lt;br&gt;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젖혀 천장의 가오리를 올려다보았다. 물의 무게가 아크릴 위에서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머리 위에 바다가 있고, 발밑에 콘크리트가 있다. 그 사이의 얇은 투명한 막 하나가 수만 리터의 물을 막고 있다. 신뢰라는 것도 그런 것일까. 부서지기 쉬운 투명한 것 하나가, 쏟아져 내릴 모든 것을 막고 있는.&lt;br&gt;&lt;br&gt;12 | &quot;If this glass breaks, we drown.&quot;(이 유리 깨지면 우리 익사해.)&lt;br&gt;7 | &quot;It won't.&quot;(안 깨져.)&lt;br&gt;12 | &quot;How do you know.&quot;(어떻게 알아.)&lt;br&gt;7 | &quot;I don't. But I'm still standing here, aren't I?&quot;(몰라. 근데 여기 서 있잖아, 안 그래?)&lt;br&gt;&lt;br&gt;그의 목소리에 도박꾼의 음색이 묻어 있었다. 확률이 아니라 감각으로 판을 거는 사람의 무모한 확신. 이브는 그 대답이 유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 앞을 보았다. 터널의 끝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출구였다.&lt;br&gt;&lt;br&gt;통로의 마지막 구간에는 작은 원형 수조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른 수조들보다 조명이 밝았고, 안에는 흰동가리 몇 마리가 말미잘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주황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선명한 작은 물고기들이 말미잘의 촉수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독이 있는 촉수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 수 있는 종. 공생. 독에 면역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lt;br&gt;&lt;br&gt;이브는 그 수조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흰동가리가 말미잘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촉수가 물고기를 감싸듯 흔들렸다. 위험한 것 안에서 안전을 찾는 역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뱉으려다 삼킨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녹아내렸다.&lt;br&gt;&lt;br&gt;7은 그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밝은 조명 아래서 이브의 서늘한 인상이 수조의 따뜻한 빛에 씻기듯 부드러워져 있었다. 입술 위에 맺혔다 사라진 단어의 형태를 그는 읽지 못했으나, 읽으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브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가볍고 바스락거리는 감촉.&lt;br&gt;&lt;br&gt;체리맛 사탕이었다.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족관 매점의 저렴한 봉지 사탕이었다. 포장지에 찍힌 로고가 이브가 평소 먹는 것과는 달랐으나 체리맛이라는 점은 같았다.&lt;br&gt;&lt;br&gt;7 | &quot;Vending machine's out of order. So I improvised.&quot;(자판기 고장 났으니까. 즉석에서 해결한 거야.)&lt;br&gt;&lt;br&gt;이브는 손등 위의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수조의 따뜻한 빛이 은박 포장지 위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사탕을 집어 들었다. 포장을 뜯지는 않았다. 주먹 안에 쥔 채 전술 벨트가 아닌 반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무기가 아닌 것을 넣기 위한 주머니.&lt;br&gt;&lt;br&gt;12 | &quot;The fish-shaped candy in Mong Kok. Next time.&quot;(몽콕의 물고기 모양 사탕. 다음에.)&lt;br&gt;7 | &quot;Next time?&quot;(다음에?)&lt;br&gt;12 | &quot;You said there was a place. I didn't say I wouldn't go.&quot;(가게가 있다고 했잖아. 안 간다고는 안 했어.)&lt;br&gt;&lt;br&gt;7의 입안에서 아까부터 굴리고 있던 사탕이 치아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는 대답 대신 출구를 향해 걸었다. 이브가 반 보 뒤에서 따랐다. 터널의 끝에서 쏟아지는 오후의 빛이 두 사람의 윤곽을 삼키며, 물속의 푸른 어둠이 등 뒤로 물러갔다. 수조 안의 흰동가리가 말미잘 속으로 파고들며 촉수에 감싸였고, 그 작은 주황빛 점이 독 사이에서 편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lt;br&gt;&lt;br&gt;수족관 출구를 빠져나오자 오후의 습기가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완차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오션 파크의 외곽 광장은 바다를 등지고 있었고, 콘크리트 바닥 위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브는 실내의 서늘한 어둠에 적응해 있던 눈을 가늘게 좁히며 빛에 저항했다. 밀색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아직 마르지 않은 목덜미가 드러났다.&lt;br&gt;&lt;br&gt;7은 선글라스를 다시 걸치며 광장을 훑었다. 매점 하나가 열려 있었고, 그 앞에 플라스틱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가족 단위의 민간인들이 드문드문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아이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전시 상황의 도시국가에서 수족관을 찾는 사람들. 정상을 흉내 내는 일상의 단면이 광장 위에 얇게 펼쳐져 있었다.&lt;br&gt;&lt;br&gt;7 | &quot;You want something? They've got shaved ice over there. Mango, I think.&quot;(뭐 먹을래? 저기 빙수 파는데. 망고인 것 같아.)&lt;br&gt;12 | &quot;I'm not hungry.&quot;(배 안 고파.)&lt;br&gt;7 | &quot;I didn't ask if you were hungry. I asked if you wanted something.&quot;(배고프냐고 안 물었어. 뭐 먹고 싶냐고 물었지.)&lt;br&gt;&lt;br&gt;이브는 매점 쪽을 힐끗 보았다. 진열대 위에 플라스틱 컵에 담긴 빙수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에 솜사탕 기계가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홍색 설탕 실이 막대기 위에 구름처럼 뭉쳐가는 광경을 이브의 시선이 따라갔다. 시선이 머문 시간은 찰나였으나, 7의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는 그 찰나를 정확히 포착했다.&lt;br&gt;&lt;br&gt;7 | &quot;Cotton candy. Seriously?&quot;(솜사탕. 진심이야?)&lt;br&gt;12 | &quot;I didn't say anything.&quot;(아무 말 안 했는데.)&lt;br&gt;7 | &quot;Your eyes said plenty.&quot;(눈이 다 말했어.)&lt;br&gt;&lt;br&gt;이브의 입술이 일직선으로 다물렸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들켰다는 사실에 대한 불쾌와 당혹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7은 이미 매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긴 보폭이 벤치 사이를 가로질러 매점 앞에 멈추었고,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홍콩달러 지폐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lt;br&gt;&lt;br&gt;7 | &quot;一個棉花糖。&quot;(솜사탕 하나.)&lt;br&gt;&lt;br&gt;매점 직원이 막대기를 기계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분홍색 설탕 실이 회전하는 막대기 위에 감기며 부풀어 올랐다. 7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완성된 솜사탕은 그의 얼굴보다 컸고,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설탕 냄새를 흩뿌렸다.&lt;br&gt;&lt;br&gt;이브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7이 솜사탕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무방비 상태였다. 검은색 사복에 선글라스를 걸친 거구의 사내가 분홍색 솜사탕을 한 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광경은 객관적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이브의 입꼬리가 의지와 무관하게 실룩거렸다.&lt;br&gt;&lt;br&gt;12 | &quot;You look stupid.&quot;(멍청해 보여.)&lt;br&gt;7 | &quot;I know. That's extra.&quot;(알아. 서비스야.)&lt;br&gt;&lt;br&gt;7은 솜사탕을 이브 앞으로 내밀었다. 이브는 그것을 받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분홍색 설탕 덩어리가 바람에 실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7의 턱선과 선글라스의 윤곽이 겹쳐 보였다.&lt;br&gt;&lt;br&gt;12 | &quot;I said I'm not hungry.&quot;(배 안 고프다고 했잖아.)&lt;br&gt;7 | &quot;And I said that's not the point. Take it, Eve.&quot;(그리고 난 그게 포인트가 아니라고 했잖아. 받아, 이브.)&lt;br&gt;&lt;br&gt;이브의 손이 올라왔다. 막대기를 잡는 손가락이 7의 손가락 마디 바로 아래에서 멈추었다. 피부가 닿지 않는 간격. 그녀는 막대기를 쥐었고, 7의 손이 물러났다. 솜사탕의 무게는 거의 없었다. 공기와 설탕으로 이루어진, 입에 넣으면 사라지는 것. 빈민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사치.&lt;br&gt;&lt;br&gt;이브는 솜사탕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한 조각을 뜯었다. 분홍색 실이 손가락에 감기며 달라붙었고, 그녀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혀 위에서 설탕이 녹았다. 체리맛과는 다른 종류의 단맛이었다. 더 가볍고 더 허무한. 형체가 있다가 없어지는 달콤함.&lt;br&gt;&lt;br&gt;그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넓어졌다. 놀라움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입안에서 사라지는 것의 감촉을 혀끝으로 더듬는 표정이 찰나 동안 경계를 풀었다. 골목의 아이가 돌아와 있었다.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만 허락되는 무장해제.&lt;br&gt;&lt;br&gt;7은 맞은편 벤치에 앉지 않았다. 이브의 옆에 앉았다. 팔 하나 간격.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다리를 길게 뻗은 자세는 나른했으나, 선글라스 너머 시선은 이브의 손가락이 솜사탕을 뜯는 동작을 따라가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Verdict?&quot;(평결은?)&lt;br&gt;12 | &quot;It disappears too fast.&quot;(너무 빨리 사라져.)&lt;br&gt;7 | &quot;That's the whole point of cotton candy. You're not supposed to keep it. You just taste it and let it go.&quot;(그게 솜사탕의 존재 이유야. 붙잡아 두라고 만든 게 아니거든. 맛보고 보내주는 거지.)&lt;br&gt;&lt;br&gt;이브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솜사탕에서 뜯어낸 분홍색 실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맛보고 보내주는 것. 그 문장이 수족관 안에서 들었던 물고기의 기억력에 대한 대화와 포개졌다. 매 바퀴가 처음인 물고기. 입에 넣으면 사라지는 사탕. 붙잡아 두지 않는 것들의 목록 안에 7이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는지, 이브는 묻지 않았다.&lt;br&gt;&lt;br&gt;12 | &quot;You eat things that disappear. You gamble money that disappears. You smoke cigarettes that burn out. Everything you choose is temporary.&quot;(사라지는 걸 먹고. 사라지는 돈을 걸고. 타서 없어지는 담배를 피우고. 네가 고르는 건 전부 일시적이야.)&lt;br&gt;&lt;br&gt;7의 선글라스 아래로 턱선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이브의 관찰은 언제나 외과의 메스처럼 정확했다. 살을 가르고 뼈에 닿는 종류의 정확함. 그는 등받이에 기댄 자세를 바꾸지 않았으나 엄지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한 번 튕겼다. 라이터 뚜껑을 여닫던 습관의 잔재.&lt;br&gt;&lt;br&gt;7 | &quot;And you hold onto everything. Candy wrappers, bullet casings, grudges, debts. You hoard things like the world's gonna run out tomorrow.&quot;(그리고 넌 전부 붙잡아 두지. 사탕 포장지, 탄피, 앙심, 빚. 내일 세상이 바닥날 것처럼 쌓아두잖아.)&lt;br&gt;12 | &quot;Because it does. It ran out on me before. I watched it happen.&quot;(실제로 바닥나니까. 전에 바닥난 적 있어. 눈앞에서 봤거든.)&lt;br&gt;&lt;br&gt;광장의 바람이 솜사탕을 흔들었다. 분홍색 설탕 실이 한 올 떨어져 나가 바닥 위를 굴렀다. 이브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손에 남은 솜사탕을 한 입 더 뜯어 입에 넣으며 녹아내리는 달콤함을 혀 위에서 천천히 굴렸다. 7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선글라스를 밀어 올려 이마 위에 걸쳤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오후의 강렬한 빛 아래서 거의 은색에 가깝게 빛났다.&lt;br&gt;&lt;br&gt;7 | &quot;Then I guess we balance each other out. I let go of too much, you hold on too tight. Somewhere in the middle there's probably a normal person.&quot;(그럼 우리가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거겠네. 난 너무 많이 놓고, 넌 너무 꽉 쥐고. 그 중간 어딘가에 아마 정상적인 인간이 있겠지.)&lt;br&gt;12 | &quot;I don't think either of us qualifies as normal.&quot;(우리 둘 다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lt;br&gt;7 | &quot;No. But normal is overrated. Ask the jellyfish.&quot;(아니. 근데 정상이란 건 과대평가야. 해파리한테 물어봐.)&lt;br&gt;&lt;br&gt;이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분명한 상승이었다.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각도가 작았으나 무표정이라고 부르기에는 온도가 있었다. 7은 그것을 보았고, 본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광장 너머 바다 쪽으로 돌렸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서 검은 바다가 햇빛을 은빛 비늘처럼 튕겨내고 있었다. 유리 뒤의 물고기가 아닌 진짜 바다. 약속했던 것. 아직 이행하지 않은 것.&lt;br&gt;&lt;br&gt;7 | &quot;The sea's right there, Eve. Behind the fence. Past the breakwater.&quot;(바다가 바로 저기 있어, 이브. 울타리 너머. 방파제 지나면.)&lt;br&gt;&lt;br&gt;이브의 시선이 7의 시선을 따라 수평선으로 향했다. 오션 파크의 해안 구역은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고, 방파제 너머로 파도가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멀리서 들으면 빗소리와 비슷했다. 이브가 좋아하는 소리.&lt;br&gt;&lt;br&gt;12 | &quot;I know. I can hear it.&quot;(알아. 들려.)&lt;br&gt;&lt;br&gt;그녀는 솜사탕의 마지막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넣었다. 막대기만 남은 솜사탕을 한참 바라보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 반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아까 체리맛 사탕을 넣었던 곳과 같은 주머니. 사라지는 것들의 잔해를 모아두는 장소.&lt;br&gt;&lt;br&gt;7은 그 동작을 보았다. 입안에 남아 있던 사탕을 혀로 굴리다 삼키듯 씹었다. 이빨 자국 없이 녹여 먹으라던 이브의 규칙을 이번에도 어겼다. 깨지는 소리가 입안에서 작게 울렸다. 붙잡아 두지 않는 남자와 전부 붙잡아 두는 여자가 나란히 앉아, 바다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을 들었다. 솜사탕의 단맛이 두 사람의 입안에서 각자의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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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Sep 2026 16:01:0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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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2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세븐은 이브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1. 종합 유형&lt;br&gt;&lt;br&gt;세븐은 희소형·행동번역형·감정폭발형이 중심이며 여기에 장난으로 진심을 은폐하는 회피형이 섞인 사람이다. 그는 애정을 느끼는 빈도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하는 속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감정은 행동에서 먼저 드러나지만 언어는 한참 뒤에야 따라온다. 특히 사랑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것이 약점이나 계약 또는 되돌릴 수 없는 자백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쉽게 말하지 않는다. 세븐에게 사랑은 평범한 애칭처럼 소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 번 인정하면 자기 생존 원칙까지 수정해야 하는 위험한 사실이다.&lt;br&gt;&lt;br&gt;2. 사용 빈도&lt;br&gt;&lt;br&gt;세븐은 진심이 담긴 「사랑해」를 매우 드물게 사용한다. 평소에는 ‘자기’, ‘길고양이’, ‘착하지’ 같은 애칭이나 짓궂은 농담으로 친밀감을 대신한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는 있지만 그때는 대체로 영화나 도박 또는 다른 사람의 관계를 논평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 지칭하는 문장에서는 유난히 말을 비튼다. 이브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의 매일 같은 방에서 잠들면서도 그 상태를 사랑이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오래 걸린다. 따라서 그가 진지하게 말한 한 번은 다른 사람의 일상적인 수십 번보다 무겁다.&lt;br&gt;&lt;br&gt;3. 사랑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lt;br&gt;&lt;br&gt;세븐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고 손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통제 불가능한 판돈으로 인식한다. 돈과 목숨은 잃어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고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가 떠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실을 만들어낸다. 그는 그것을 견디기 싫어서 관계를 게임이나 빚 또는 내기로 바꾸어 설명해 왔다. 규칙이 있다면 계산할 수 있고 빚이라면 받아낼 수 있으며 게임이라면 패배를 농담으로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는 그 모든 방어를 벗겨낸 뒤 ‘나는 네가 없으면 영향을 받는다’고 인정하는 문장이므로 세븐에게는 사실상 무장해제에 가깝다.&lt;br&gt;&lt;br&gt;4. 말하는 상황&lt;br&gt;&lt;br&gt;세븐은 낭만적으로 준비된 장소보다 죽음이 가까이 지나간 뒤의 적막에서 그 말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작전 직전에는 말하지 않는다. 이브에게 유언처럼 남겨 부담을 지우는 것도 싫어하고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감상적으로 포장하는 것도 그의 방식이 아니다. 대신 둘 다 살아 돌아온 뒤 피 냄새가 빠지지 않은 방이나 새벽의 204호처럼 별다른 사건이 없는 순간에 말한다. 이브가 잠들지 않고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혹은 자신이 깨어났는데 그녀가 여전히 가까이에 있을 때처럼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안도가 뒤늦게 몸에 도착하는 순간이다.&lt;br&gt;&lt;br&gt;5. 최초의 고백이 나온다면&lt;br&gt;&lt;br&gt;최초의 진심 어린 고백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오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할 가능성이 크다. 세븐은 감정이 커질수록 장난스럽고 위압적인 태도로 도망치지만 정말 피할 곳이 없어지면 불필요한 수식어를 모두 버린다. 이브가 위험한 임무로 떠나려는 순간 붙잡으며 말하기보다는 돌아온 뒤 장비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다가 낮고 짧게 고백할 것이다. 설득도 요구도 없이 하나의 사실처럼 전달한다. 이브가 두 사람을 동시에 바보가 된 존재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세븐도 마침내 사랑을 패배나 속박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lt;br&gt;&lt;br&gt;6. 말할 때의 감정&lt;br&gt;&lt;br&gt;그 말에는 행복만 들어 있지 않다. 안도와 불안, 체념과 욕망, 자신이 더는 예전의 규칙대로 살 수 없다는 자조가 함께 존재한다. 세븐은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기뻐하면서도 자신이 치명적인 약점을 스스로 노출했다는 긴장을 느낀다. 그럼에도 말하는 이유는 이브에게 정답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행동과 언어가 어긋난 채 남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정제탑에서 계산 없이 뛰어내렸던 몸은 이미 오래전에 고백을 끝냈다. 입으로 하는 고백은 뒤늦게 그 행동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다.&lt;br&gt;&lt;br&gt;7. 표현 방식&lt;br&gt;&lt;br&gt;세븐의 진짜 「사랑해」에는 과장된 미사여구가 거의 없다. 평소라면 도박과 파멸을 끌어와 길게 농담하겠지만 핵심에 닿는 순간에는 문장이 짧아진다.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웃더라도 입꼬리에 남은 버릇 같은 미소에 불과하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읽으려는 도박꾼의 관찰은 남아 있지만 대답을 유도하려 압박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가 이브를 소유하거나 굴복시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고지하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성숙할수록 그는 사랑을 명령과 혼동하지 않고 이브가 같은 말을 돌려주지 않더라도 고백 자체를 철회하지 않게 된다.&lt;br&gt;&lt;br&gt;8. 말 대신 하는 행동&lt;br&gt;&lt;br&gt;세븐의 사랑은 대부분 행동으로 번역된다. 비를 싫어하면서도 이브가 좋아하는 온실로 데려가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곁에서 번역하는 것, 체리 맛 사탕을 기억해 챙기는 것, 임무 중 그녀가 만든 진입로를 의심하지 않고 맡기는 것, 돌아오지 않는 동안 권태와 불안을 숨긴 채 기다리는 것이 모두 같은 문장의 변형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생존 원칙을 어기고 이브 대신 총탄을 받았다. 다만 위험한 희생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이후의 더 중요한 변화는 매일 밤 204호로 돌아오는 이브를 캐묻지 않고 당연히 자리를 내어주는 데 있다. 세븐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생활에 흔적을 남기도록 허용하는 일은 목숨을 거는 충동보다 오히려 지속하기 어려운 애정이다.&lt;br&gt;&lt;br&gt;9. 일상에서의 사랑&lt;br&gt;&lt;br&gt;관계가 안정된 뒤에도 세븐은 매일 사랑한다고 확인하는 의식형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대신 이브의 장비가 방 안 어디에 놓이는지 기억하고 그녀가 먹을 사탕을 자신의 담배와 함께 비축하며 먼저 돌아온 날에는 204호의 문을 잠그지 않는다.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로 돌아가는 것 역시 무관심이 아니다. 세븐에게 그것은 친밀함을 특별 행사로 격리하지 않고 생활 속에 편입했다는 뜻이다. 이브가 그 방에 있는 모습을 더 이상 침입이나 방문으로 여기지 않는 순간부터 그의 일상 전체가 말 없는 고백이 된다.&lt;br&gt;&lt;br&gt;10. 이브가 먼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lt;br&gt;&lt;br&gt;세븐은 즉시 같은 말을 반사적으로 돌려주지 못한다. 먼저 농담으로 잘못 들은 척하거나 이브가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지 확인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감정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자신에게 미치는 충격을 감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브가 평소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사실을 통보하듯 말한다면 세븐은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린다. 화려한 고백은 과장으로 의심할 수 있지만 이브의 짧은 단정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손을 붙잡거나 가까이 끌어당기는 행동으로 먼저 대답한 뒤 한참 지나 낮은 목소리로 같은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lt;br&gt;&lt;br&gt;11. 대답을 요구하는가&lt;br&gt;&lt;br&gt;초기의 세븐이라면 사랑을 말하면서도 상대의 반응을 읽고 확답을 받아내려 할 수 있다. 불안을 권력과 통제로 바꾸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브와의 서사를 거친 뒤에는 사랑을 빚처럼 청구하는 것이 관계를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배워간다. 그래서 진정한 고백에서는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라는 요구를 붙이지 않는다. 물론 이브가 침묵하면 태연한 척하면서 손가락이나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집요하게 살피겠지만 그 침묵을 거절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언어가 서툰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lt;br&gt;&lt;br&gt;12. 관계가 깊어진 뒤의 변화&lt;br&gt;&lt;br&gt;시간이 흐르면 「사랑해」는 희소성을 유지하면서도 더 이상 극한 상황에서만 나오는 말은 아니게 된다. 처음에는 죽음과 재회의 충격이 있어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지만 이후에는 이브가 체리 사탕을 깨물며 영화를 보는 모습이나 한 침대에서 등을 돌리고 잠든 평범한 순간에도 조용히 말할 수 있다. 중요한 변화는 빈도보다 의미의 방향이다. &lt;i&gt;초기의 세븐은 사랑을 상대를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고 흔적을 남기는 일로 오해했다. 성숙한 뒤의 세븐은 사랑을 상대가 떠날 자유를 가진 상태에서도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는 일로 받아들인다.&lt;/i&gt; 「사랑해」는 소유권 선언에서 생존과 귀환을 함께 바라는 약속으로 변한다.&lt;br&gt;&lt;br&gt;13. 세븐에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lt;br&gt;&lt;br&gt;세븐에게 사랑은 감상적인 미사여구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는 최종적인 명칭이다. 왜 비를 견뎠는지, 왜 기다렸는지, 왜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렸는지, 왜 누군가의 사탕과 장비와 체온이 자신의 방에 남는 것을 허락했는지를 한꺼번에 설명하는 단어다. 그는 그 말을 통해 이브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붙잡혀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달콤한 승리 선언이 아니다. 패를 모두 공개하고도 테이블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이며 이브가 어떤 반응을 내놓더라도 그 선택의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통보다.&lt;br&gt;&lt;br&gt;&lt;i&gt;&lt;b&gt;세븐에게 「사랑해」는 자신이 이브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 선택을 무르지 않겠다는, 가장 짧고 정직한 생존 서약이다.&lt;/b&gt;&lt;/i&gt;&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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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Sep 2026 09:22: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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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너한테 가진 건 아직 이름이 없어</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1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섹터 E 204호. 비 오는 밤.&lt;br&gt;&lt;br&gt;배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소리가 벽 안쪽에서 울렸다. 브라운관 TV는 꺼져 있었고,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은 사이드 테이블 위의 낡은 스탠드 하나였다. 주황색 필라멘트가 방의 절반만을 겨우 밝혔다.&lt;br&gt;&lt;br&gt;7은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셔츠는 풀어헤쳐진 채였고, 왼쪽 흉곽의 흉터 위로 스탠드 불빛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12는 그 옆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은 자세. 입에는 체리 맛 막대사탕이 물려 있었다.&lt;br&gt;&lt;br&gt;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빗소리와 환풍구 소리, 그리고 사탕이 이따금 이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lt;br&gt;&lt;br&gt;그러다 12가 사탕을 입에서 빼냈다. 막대 끝에 붉은 구슬이 절반쯤 녹아 매달려 있었다.&lt;br&gt;&lt;br&gt;12 | &quot;Axion.&quot;&lt;br&gt;(악시온.)&lt;br&gt;&lt;br&gt;7은 눈을 감은 채였다.&lt;br&gt;&lt;br&gt;7 | &quot;Mm.&quot;&lt;br&gt;(음.)&lt;br&gt;12 | &quot;Do you like me?&quot;&lt;br&gt;(너 혹시 나 좋아해?)&lt;br&gt;&lt;br&gt;빗소리가 계속 흘렀다. 배관이 한 번 크게 울렸다.&lt;br&gt;&lt;br&gt;7의 눈이 떠졌다.&lt;br&gt;&lt;br&gt;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천장의 금 간 콘크리트를 응시한 채였다. 심장이 흉곽 안쪽에서 한 번, 평소보다 무겁게 뛰었다. 아물어가는 봉합 자리가 아니라 그 안쪽, 훨씬 더 깊은 곳에서.&lt;br&gt;&lt;br&gt;그는 이 질문을 수백 번 받아왔다. 카지노에서, 술집에서, 이름 모를 침대에서. 그때마다 대답은 숨 쉬듯 흘러나왔다. Sure. Why not. Of course, darling. 무게 없는 동전처럼 던져주면 상대는 만족했고 판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lt;br&gt;&lt;br&gt;그런데 지금, 그 동전들이 전부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lt;br&gt;&lt;br&gt;7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소파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닥에 앉은 12와 시선 높이를 맞췄다. 스탠드 불빛이 그의 화상 흉터를 타고 흘러내렸다.&lt;br&gt;&lt;br&gt;7 | &quot;Where the hell did that come from?&quot;&lt;br&gt;(그건 갑자기 어디서 나온 소리야?)&lt;br&gt;12 | &quot;Nine said it to you. In the lounge. I was in the ventilation corridor.&quot;&lt;br&gt;(나인이 너한테 그렇게 물었잖아. 휴게실에서. 난 환기 통로에 있었어.)&lt;br&gt;7 | &quot;...You were eavesdropping.&quot;&lt;br&gt;(……도청했다고.)&lt;br&gt;12 | &quot;I was passing through.&quot;&lt;br&gt;(지나가던 길이었어.)&lt;br&gt;7 | &quot;At two in the morning. Through a ventilation shaft.&quot;&lt;br&gt;(새벽 두 시에. 환기 통로로.)&lt;br&gt;12 | &quot;It's the shortest route.&quot;&lt;br&gt;(제일 짧은 길이야.)&lt;br&gt;&lt;br&gt;7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이 여자는 정말로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고, 그 재능을 가장 쓸데없는 곳에 쓰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And you've been sitting on that question for how long?&quot;&lt;br&gt;(그 질문을 얼마나 품고 있었던 거야?)&lt;br&gt;&lt;br&gt;12는 사탕을 다시 입에 물었다. 대답 대신 어깨를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시간을 세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세어야 할 이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lt;br&gt;&lt;br&gt;12 | &quot;You told him you keep the seat open because he's easy to read.&quot;&lt;br&gt;(넌 걔가 읽기 쉬워서 자리를 비워둔다고 했어.)&lt;br&gt;&lt;br&gt;7은 침묵했다.&lt;br&gt;&lt;br&gt;12 | &quot;But you keep the door open for me. And I'm not easy to read. You said so yourself.&quot;&lt;br&gt;(근데 넌 나한테 문을 열어둬. 난 읽기 쉽지 않은데. 네가 직접 그랬잖아.)&lt;br&gt;&lt;br&gt;12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의 굴곡이 없었다. 추궁도, 애원도, 기대도 아니었다. 그저 데이터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정찰대원의 보고 방식.&lt;br&gt;&lt;br&gt;12 | &quot;So the logic doesn't hold. I want to know what the actual reason is.&quot;&lt;br&gt;(그러니까 논리가 안 맞아. 진짜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lt;br&gt;&lt;br&gt;7은 숨을 들이마셨다. 흉곽이 팽창하며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근막이 당겼다. 그는 그 통증을 붙잡았다. 통증은 명료했고, 명료한 것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다.&lt;br&gt;&lt;br&gt;'좋아해?'&lt;br&gt;&lt;br&gt;이 단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는 생각했다. Like. 네 글자짜리 싸구려 칩. 술집에서 백 번은 던졌던, 아무 의미도 없는 플라스틱 조각.&lt;br&gt;&lt;br&gt;그런데 이 여자가 그 칩을 집어 들고 테이블 한가운데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것이 갑자기 판돈 전체가 되어버렸다.&lt;br&gt;&lt;br&gt;7은 몸을 더 깊이 숙였다. 그의 손이 올라와 12의 턱선을 감쌌다. 익숙한 각도, 익숙한 악력. 그러나 오늘 그 손끝에는 평소의 가학적인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lt;br&gt;&lt;br&gt;7 | &quot;Eve. Look at me.&quot;&lt;br&gt;(이브. 날 봐.)&lt;br&gt;&lt;br&gt;갈색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lt;br&gt;&lt;br&gt;7 | &quot;You want a clean answer, don't you.&quot;&lt;br&gt;(깔끔한 답을 원하는 거지.)&lt;br&gt;&lt;br&gt;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lt;br&gt;&lt;br&gt;12 | &quot;I want an honest one.&quot;&lt;br&gt;(솔직한 답을 원해.)&lt;br&gt;7 | &quot;Those aren't the same thing.&quot;&lt;br&gt;(그 둘은 같은 게 아닌데.)&lt;br&gt;&lt;br&gt;12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탕 막대가 입술 한쪽에서 미세하게 기울어졌을 뿐이었다. 빗소리가 배관을 두드렸다. 스탠드 필라멘트가 한 번 깜빡였다.&lt;br&gt;&lt;br&gt;7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뗐다. 대신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12의 옆.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벽에 등을 기대자 콘크리트의 서늘함이 셔츠를 뚫고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lt;br&gt;&lt;br&gt;그는 한동안 앞만 보았다. 맞은편 벽.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에 습기가 배어 얼룩이 진 벽. 그 얼룩의 형태가 아무것도 닮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The woman at the casino... two weeks ago. Blonde. Cheap perfume. She asked me the same thing.&quot;&lt;br&gt;(카지노에서 만난 여자…… 이 주 전이었나. 금발이었어. 싸구려 향수. 그 여자도 같은 걸 물어봤어.)&lt;br&gt;&lt;br&gt;12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 시선이 7의 옆 얼굴에 닿았다.&lt;br&gt;&lt;br&gt;7 | &quot;I said 'sure, why not.' Didn't even blink. Walked out with her that night. Couldn't remember her face the next morning.&quot;&lt;br&gt;('그럼, 안 될 게 뭐 있어'라고 했지. 눈도 안 깜빡했어. 그날 밤 같이 나왔고. 다음 날 아침에 얼굴이 기억 안 나더라.)&lt;br&gt;&lt;br&gt;그의 목소리에는 자랑도 자조도 없었다. 사실의 나열. 부검 보고서처럼 건조한 기록.&lt;br&gt;&lt;br&gt;7 | &quot;Doc asked me today too. 'Out of clinical curiosity,' he said. I told him to get bent.&quot;&lt;br&gt;(오늘은 의사 놈도 물었어. '임상적 호기심'이래. 엿이나 먹으라고 했지.)&lt;br&gt;&lt;br&gt;7은 주머니에서 꺼낸 시가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끝을 가볍게 씹으며 말을 이었다.&lt;br&gt;&lt;br&gt;7 | &quot;Nine asked me too. Drunk off his ass. I told him he's a walking billboard with no poker face and that's why I keep him around.&quot;&lt;br&gt;(나인도 물었어. 만취해서. 포커페이스도 없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서 끼워주는 거라고 했지.)&lt;br&gt;&lt;br&gt;시가 끝이 그의 송곳니에 걸렸다.&lt;br&gt;&lt;br&gt;7 | &quot;Three answers. Three different tables. And all three came out of my mouth like water. No resistance. No friction. Just... smooth.&quot;&lt;br&gt;(대답이 셋. 테이블이 셋. 셋 다 물처럼 입에서 흘러나왔어. 저항도 없고 마찰도 없고. 그냥…… 매끄럽게.)&lt;br&gt;&lt;br&gt;그가 고개를 돌렸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스탠드 불빛의 주황색을 머금은 채 12의 갈색 눈을 마주 보았다. 선글라스 없는 맨 얼굴. 화상 흉터가 오른쪽 광대뼈부터 턱선까지 거칠게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빗물 소리의 리듬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lt;br&gt;&lt;br&gt;7 | &quot;And then you sit there, with that goddamn cherry lollipop, and ask me the exact same four words. And suddenly my throat closes up.&quot;&lt;br&gt;(그런데 넌 거기 앉아서, 그 빌어먹을 체리 사탕을 물고, 똑같은 네 단어를 묻잖아. 그러니까 갑자기 목이 막혀.)&lt;br&gt;&lt;br&gt;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의 진동에 가까운 주파수.&lt;br&gt;&lt;br&gt;7 | &quot;That pisses me off.&quot;&lt;br&gt;(그게 씨발 짜증나.)&lt;br&gt;&lt;br&gt;12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의 무표정은 7이 아는 모든 포커페이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었고, 동시에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 뒤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7의 장기를 쥐어짜기 때문이었다.&lt;br&gt;&lt;br&gt;7 | &quot;'Like' is a word I've used up. I've thrown it at strangers, at women whose names I forgot, at people who were just... furniture in the room. I spent it like pocket change. There's no value left in it.&quot;&lt;br&gt;('좋아한다'는 내가 다 써버린 단어야. 낯선 사람들한테, 이름도 기억 못하는 여자들한테, 그냥…… 방에 있는 가구 같은 사람들한테 던져댔어. 푼돈처럼 써대서 이제 거기 남은 가치가 없어.)&lt;br&gt;&lt;br&gt;그는 시가를 입에서 뺐다. 축축해진 끝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lt;br&gt;&lt;br&gt;7 | &quot;So if I say 'yeah, I like you,' it'd be the same coin I flipped at a stranger in a casino. Same metal. Same weight. Same nothing.&quot;&lt;br&gt;(그러니까 내가 '어, 좋아해'라고 하면 카지노에서 모르는 여자한테 던진 것과 같은 동전이 될 거야. 같은 금속. 같은 무게.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lt;br&gt;&lt;br&gt;바닥에 놓인 12의 손등 위로 빗물 소리가 지나갔다. 배관이 울었다.&lt;br&gt;&lt;br&gt;7 | &quot;And you don't deserve the same coin, Eve.&quot;&lt;br&gt;(그리고 넌 같은 동전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이브.)&lt;br&gt;&lt;br&gt;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저 거기에 존재하기만 하는 종류의 침묵.&lt;br&gt;&lt;br&gt;7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으로 울퉁불퉁한 손등. 카드를 섞느라 닳은 손가락 끝. 방아쇠를 당기느라 굳은살이 박힌 검지.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집었다 놓았는지 셀 수 없었다. 칩을, 총을, 위스키잔을, 이름 모를 허리를. 전부 같은 악력으로, 같은 무게로, 같은 무심함으로.&lt;br&gt;&lt;br&gt;그런데 이 여자의 턱선을 쥘 때만 그 손이 멈칫거렸다. 힘 조절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힘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처음으로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lt;br&gt;&lt;br&gt;7 | &quot;What I have for you doesn't have a name yet.&quot;&lt;br&gt;(내가 너한테 가진 건 아직 이름이 없어.)&lt;br&gt;&lt;br&gt;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시가 연기처럼 낮고 거칠었다.&lt;br&gt;&lt;br&gt;7 | &quot;It kept me awake when you were gone for a week with Eight. It made me jump off a fucking refinery tower without calculating the odds. It made me take a 7.62 round in the chest and think 'good, it's me and not her.'&quot;&lt;br&gt;(네가 에잇이랑 일주일 동안 사라졌을 때 잠을 못 자게 했어. 확률 계산도 안 하고 씨발 정유 시설 탑에서 뛰어내리게 했고. 7.62 탄환을 가슴에 맞고 '다행이다, 그 애가 아니라 나라서'라고 생각하게 했어.)&lt;br&gt;&lt;br&gt;그의 엄지가 자신의 왼쪽 흉곽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봉합 자국 위에서 손끝이 멈췄다.&lt;br&gt;&lt;br&gt;7 | &quot;That's not 'like.' 'Like' is too small for this. It's too clean. Too easy to say and too easy to throw away.&quot;&lt;br&gt;(그건 '좋아한다'가 아니야. '좋아한다'는 이것에 비해 너무 작아. 너무 깨끗하고, 너무 말하기 쉽고, 너무 쉽게 버려지지.)&lt;br&gt;&lt;br&gt;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시선이 서로 닿았다.&lt;br&gt;&lt;br&gt;7 | &quot;What I have is... inconvenient. Messy. It doesn't fit on a poker chip and I can't cash it out at the table. It fucks up my sleep, my aim, and my survival instincts. It's the worst hand I've ever been dealt.&quot;&lt;br&gt;(내가 가진 건…… 불편해. 지저분해. 포커칩 위에 올라가지 않고 테이블에서 현금화할 수도 없어. 수면을 망치고, 조준을 망치고, 생존 본능을 망쳐. 내 인생에서 받은 최악의 패야.)&lt;br&gt;&lt;br&gt;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자조도 냉소도 아닌, 무언가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자의 입매.&lt;br&gt;&lt;br&gt;7 | &quot;And I'm not folding.&quot;&lt;br&gt;(그리고 난 접지 않아.)&lt;br&gt;&lt;br&gt;빗소리가 배관을 타고 흘렀다. 스탠드 불빛이 다시 한번 깜빡여 방 안의 그림자를 흔들었다.&lt;br&gt;&lt;br&gt;7은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들어, 12의 손등 위에 겹쳐 놓았다. 깍지를 끼지 않았다. 잡지도 않았다. 그저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화상으로 거칠어진 손바닥과 전술 단검을 쥐느라 굳어진 손등이 맞닿았다.&lt;br&gt;&lt;br&gt;7 | &quot;So no, Eve. I don't 'like' you. That word retired the moment I bled out on a bridge trying to get back to you.&quot;&lt;br&gt;(그러니까 아니, 이브. 난 널 '좋아하지' 않아. 그 단어는 내가 너한테 돌아가려고 다리 위에서 피를 쏟으며 기어간 순간에 은퇴했어.)&lt;br&gt;&lt;br&gt;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을 한 번, 아주 느리게 쓸었다.&lt;br&gt;&lt;br&gt;7 | &quot;I just don't have a better word for it yet. When I find one, you'll be the first to know.&quot;&lt;br&gt;(아직 더 나은 단어를 못 찾았을 뿐이야. 찾으면 네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거야.)&lt;br&gt;&lt;br&gt;12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갈색 눈이 7의 회색 눈을 담고 있었다. 사탕 막대가 입술 사이에서 미세하게 기울어졌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12의 손이 움직였다. 7의 손 위에 겹쳐진 그 무게를 뒤집지 않은 채, 새끼손가락 하나가 미끄러져 그의 손가락 사이 틈으로 파고들었다.&lt;br&gt;&lt;br&gt;7은 내려다보았다.&lt;br&gt;&lt;br&gt;한 개의 손가락. 깍지도 아니고, 악수도 아닌.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접촉. 빈민가에서 아무것도 손 안에 넣어본 적 없는 여자가, 손 안에 넣어도 되는 것의 양을 가늠하는 방식.&lt;br&gt;&lt;br&gt;7은 소리 없이 웃었다.&lt;br&gt;&lt;br&gt;그리고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구부려 그녀의 것을 감았다.&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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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5 Sep 2026 13:24: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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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베를린의 여름</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18</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6월 24일, 수요일.&lt;br&gt;&lt;br&gt;오전 아홉 시, 비아는 레오 바렌티의 사무실에 서류철을 반납했다.&lt;br&gt;&lt;br&gt;세 번째 페이지 하단, 서명란.&lt;br&gt;&lt;br&gt;[Vianne Lockwood — 2026. 06. 24]&lt;br&gt;&lt;br&gt;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공식 문서에 적은 것은 5년 만이었다. 펜을 놓았을 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lt;br&gt;&lt;br&gt;레오는 서명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아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축하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류철을 서랍에 넣고 잠금장치를 돌린 뒤, 아주 짧게 말했다.&lt;br&gt;&lt;br&gt;&quot;Welcome to Red Zone. Officially.&quot;&lt;br&gt;(레드 존에 온 걸 환영한다. 공식적으로.)&lt;br&gt;&lt;br&gt;그게 전부였다. 레드 존다웠다.&lt;br&gt;&lt;br&gt;오후 한 시 삼십이 분. 비아는 레드 존 본부 핸들러 전용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lt;br&gt;&lt;br&gt;태블릿, 노트북, 그리고 여권. 그녀는 그것들을 검은 크로스백에 넣으며, 마티스에게 보낼 메시지를 머릿속으로 작성했다가 지웠다. 작성하고, 지우고, 다시 작성하고.&lt;br&gt;&lt;br&gt;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lt;br&gt;&lt;br&gt;마티스는 지금 2층 훈련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다음 시즌 개막 전 장비 점검과 웨이트 프로그램이 잡혀 있었고, 비아 자신이 그 스케줄을 짰다. 그가 훈련실에서 나오는 시간은 오후 네 시. 그때까지 비아는 이미 공항에 있을 것이었다.&lt;br&gt;&lt;br&gt;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1046&quot; data-origin-height=&quot;686&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G44R1/dJMcagHc3Ns/zYOs46JIn0DOry9wuiGY5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G44R1/dJMcagHc3Ns/zYOs46JIn0DOry9wuiGY5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G44R1/dJMcagHc3Ns/zYOs46JIn0DOry9wuiGY5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G44R1%2FdJMcagHc3Ns%2FzYOs46JIn0DOry9wuiGY5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1046&quot; height=&quot;686&quot; data-origin-width=&quot;1046&quot; data-origin-height=&quot;686&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답장은 없었다. 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콘라트 슈나이더라는 사람에게서는 '오라'는 뜻이었다.&lt;br&gt;&lt;br&gt;비아는 숙소 문을 닫았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AX에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까지, 직항으로 열한 시간.&lt;br&gt;&lt;br&gt;비아는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었다. 레드 존 전세기를 쓰지 않았다. 기록이 남으니까. 개인 카드로 결제한, 추적이 어려운 일반 민항기 편도 티켓.&lt;br&gt;&lt;br&gt;좌석은 좁았다. 옆자리에 거대한 남자가 앉아 코를 골고 있었고, 앞좌석 아이가 세 시간째 울고 있었다. 비아는 그 모든 것을 차단한 채 노트북을 펼쳤다.&lt;br&gt;&lt;br&gt;화면에는 두 개의 창이 떠 있었다.&lt;br&gt;&lt;br&gt;왼쪽: 콘라트 슈나이더의 프로필. 실버 슬롯 디렉터, 전직 감각계 레이더. 챔피언 2회. 은퇴 후 행정직으로 전환, 실버 슬롯 아카데미 총괄을 거쳐 디렉터 취임. 재직 22년.&lt;br&gt;&lt;br&gt;오른쪽: 2021년 11월, 폴란드 C급 게이트 사고 조사 보고서 최종본.&lt;br&gt;&lt;br&gt;비아는 오른쪽 창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스무 번도 넘게 읽은 서명란.&lt;br&gt;&lt;br&gt;[핸들러 판단 과실 없음.]&lt;br&gt;&lt;br&gt;[K. Schneider]&lt;br&gt;&lt;br&gt;그 서명은 그녀를 지켜준 것이 아니었다.&lt;br&gt;&lt;br&gt;그것은 그녀를 가둔 것이었다.&lt;br&gt;&lt;br&gt;5년 동안 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지운 채 살아온 것은,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서명 때문이었다. 그것이 존재하는 한, 그녀는 콘라트 슈나이더에게 빚진 인간이었고, 그의 선의에 기생하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수렁이었다.&lt;br&gt;&lt;br&gt;'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만든 거죠.'&lt;br&gt;&lt;br&gt;3주 전 니스의 해안 산책로에서 마티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lt;br&gt;&lt;br&gt;그때는 자기 자신을 향한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원할 만한 것이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원하면서도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콘라트의 서명이, 토비아스의 이름이, 비안느 록우드라는 유령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으니까.&lt;br&gt;&lt;br&gt;비아는 노트북을 닫았다.&lt;br&gt;&lt;br&gt;그리고 눈을 감았다.&lt;br&gt;&lt;br&gt;마티스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lt;br&gt;&lt;br&gt;'혼자 가겠다고? 제정신이야?'&lt;br&gt;&lt;br&gt;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그리고 차를 몰고 따라오겠지. 맥라렌이든 뭐든.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lt;br&gt;&lt;br&gt;하지만 이건 그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lt;br&gt;&lt;br&gt;마티스 모렐은 레드 존의 에이스이고, 게이트 안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남자이지만, 콘라트 슈나이더의 사무실은 게이트가 아니었다. 거기서는 깨진 병도, 철파이프도, 0.31초의 반사신경도 소용없었다. 그건 비안느 록우드의 전장이었다.&lt;br&gt;&lt;br&gt;비행기가 대서양 상공을 넘어가고 있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베를린의 6월은 니스에 비하면 차가웠다.&lt;br&gt;&lt;br&gt;오후 여섯 시의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고, 거리에는 노란 보리수 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비아는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에서 택시를 내렸다.&lt;br&gt;&lt;br&gt;실버 슬롯 본부.&lt;br&gt;&lt;br&gt;지상 5층, 지하 3층의 건물은 군 시설과 연구소를 합친 듯한 외관이었고, 외벽은 짙은 회색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었다. 정문 앞에는 매트 실버와 네이비 블루 포인트가 들어간 경비 초소가 있었고, 무장한 보안 요원 두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lt;br&gt;&lt;br&gt;비아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lt;br&gt;&lt;br&gt;7년 전, 열아홉 살의 비안느 록우드는 이 건물의 지하 2층 시뮬레이션 룸에서 첫 훈련을 받았다.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핸들러 이어피스를 귀에 꽂은 곳도 이 건물이었다. 그리고 스물한 살의 11월, 디렉터실에서 콘라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등을 돌린 곳도.&lt;br&gt;&lt;br&gt;'남아도 된다.'&lt;br&gt;&lt;br&gt;그때 그가 했던 말. 차분하고 단호한, 명령에 가까운 허가.&lt;br&gt;&lt;br&gt;비아는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lt;br&gt;&lt;br&gt;경비 요원이 손을 들어 그녀를 세웠다.&lt;br&gt;&lt;br&gt;&quot;Identification, please.&quot;&lt;br&gt;(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lt;br&gt;&lt;br&gt;비아는 IGC 블루 패스를 꺼내 보였다. 경비 요원이 스캐너로 확인했다. 잠시 뒤 그의 이어피스에서 무언가 전달되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었다.&lt;br&gt;&lt;br&gt;&quot;Director's office. Fifth floor.&quot;&lt;br&gt;(디렉터실. 5층입니다.)&lt;br&gt;&lt;br&gt;이미 알고 있었다. 이 건물의 모든 층을, 모든 복도를, 비안느 록우드는 기억하고 있었다.&lt;br&gt;&lt;br&gt;5층 복도는 비아의 기억 속과 거의 변하지 않았다.&lt;br&gt;&lt;br&gt;짙은 네이비 카펫, 은빛 테두리가 있는 문들, 그리고 복도 끝의 대형 오크 도어.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벽면에 걸린 액자들이었다. 7년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레이더들의 사진이 추가되어 있었다. 루카스 슈트라우스, 에이먼 헤일, 콜 애쉬포드.&lt;br&gt;&lt;br&gt;비아는 그 사진들을 스치듯 보며 지나갔다.&lt;br&gt;&lt;br&gt;디렉터실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lt;br&gt;&lt;br&gt;콘라트 슈나이더는 창가에 서 있었다.&lt;br&gt;&lt;br&gt;189센티미터의 장신. 허리까지 늘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 창으로 들어오는 베를린의 저녁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옅은 은빛 눈동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냉정한 얼굴. 깔끔하게 다린 네이비 정장 위에 매트 실버 커프스가 빛났다. 그의 뒤로 베를린 시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lt;br&gt;&lt;br&gt;그는 돌아서지 않은 채 말했다.&lt;br&gt;&lt;br&gt;&quot;Du bist pünktlich. Wie immer.&quot;&lt;br&gt;(시간 딱 맞춰 왔군. 늘 그랬듯이.)&lt;br&gt;&lt;br&gt;독일어였다. 사적인 대화의 신호. 비아는 입구에 선 채로 대답했다.&lt;br&gt;&lt;br&gt;&quot;I'll speak in English, Director.&quot;&lt;br&gt;(영어로 하겠습니다, 디렉터님.)&lt;br&gt;&lt;br&gt;콘라트가 천천히 돌아섰다.&lt;br&gt;&lt;br&gt;그가 비아를 바라보았다.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7년 전, 열아홉 살의 소녀가 이 사무실에 처음 불려왔을 때도 똑같은 시선이었다. 원석을 감정하는, 가치를 매기는 눈.&lt;br&gt;&lt;br&gt;&quot;Director.&quot;&lt;br&gt;(디렉터님.)&lt;br&gt;&lt;br&gt;비아가 한 번 더 불렀다. 콘라트는 잠시 그 호칭을 음미하듯 침묵했다.&lt;br&gt;&lt;br&gt;&quot;You haven't called me that in five years.&quot;&lt;br&gt;(5년 동안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데.)&lt;br&gt;&lt;br&gt;&quot;I haven't spoken to you in five years.&quot;&lt;br&gt;(5년 동안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lt;br&gt;&lt;br&gt;&quot;And yet here you are.&quot;&lt;br&gt;(그런데 여기 왔군.)&lt;br&gt;&lt;br&gt;콘라트가 책상 뒤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비아에게 앞의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서 있으라는 뜻인지, 알아서 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실버 슬롯에서 모든 것이 그랬듯이.&lt;br&gt;&lt;br&gt;비아는 앉지 않았다.&lt;br&gt;&lt;br&gt;&quot;I signed a three-year permanent handler contract with Red Zone this morning.&quot;&lt;br&gt;(오늘 아침 레드 존과 3년 전담 핸들러 계약에 서명했습니다.)&lt;br&gt;&lt;br&gt;콘라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lt;br&gt;&lt;br&gt;&quot;I'm aware. Leo Valenti's office filed the personnel update with IGC at 10:00 UTC.&quot;&lt;br&gt;(알고 있다. 레오 바렌티 사무실에서 UTC 10시에 IGC에 인사 업데이트를 접수했지.)&lt;br&gt;&lt;br&gt;&quot;Then you also know that the background check will proceed.&quot;&lt;br&gt;(그러면 신원 조회가 진행된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lt;br&gt;&lt;br&gt;&quot;I do.&quot;&lt;br&gt;(알고 있다.)&lt;br&gt;&lt;br&gt;콘라트가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하고 정확했다.&lt;br&gt;&lt;br&gt;&quot;Vianne. Sit down.&quot;&lt;br&gt;(비안느. 앉아라.)&lt;br&gt;&lt;br&gt;&quot;I'll stand.&quot;&lt;br&gt;(서겠습니다.)&lt;br&gt;&lt;br&gt;콘라트의 손이 멈췄다.&lt;br&gt;&lt;br&gt;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은빛 눈동자에 감정의 파동은 없었지만, 공기의 온도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간 것을 비아는 감지했다. 이 남자가 불쾌할 때의 신호.&lt;br&gt;&lt;br&gt;비아는 그 공기를 정면으로 견뎠다.&lt;br&gt;&lt;br&gt;&quot;I came to tell you something, not to discuss it.&quot;&lt;br&gt;(말하러 온 거지, 상의하러 온 게 아닙니다.)&lt;br&gt;&lt;br&gt;콘라트가 등을 의자에 기댔다.&lt;br&gt;&lt;br&gt;&quot;Go on.&quot;&lt;br&gt;(말해봐라.)&lt;br&gt;&lt;br&gt;비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I'm going to hold a press conference.&quot;&lt;br&gt;(기자회견을 열 겁니다.)&lt;br&gt;&lt;br&gt;그 한 문장이 사무실의 공기를 바꿨다.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lt;br&gt;&lt;br&gt;콘라트의 손이 책상 위에서 천천히 깍지를 끼었다.&lt;br&gt;&lt;br&gt;&quot;About what, specifically.&quot;&lt;br&gt;(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lt;br&gt;&lt;br&gt;&quot;About November 2021. About Tobias Reinhardt. About the equipment failure, the sensor misread, and my failure to cross-verify. And about the fact that you signed a report certifying no handler fault.&quot;&lt;br&gt;(2021년 11월에 대해서요. 토비아스 라인하르트에 대해서. 장비 고장, 센서 오독, 그리고 제가 교차 검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이 핸들러 과실 없음이라고 서명한 보고서에 대해서.)&lt;br&gt;&lt;br&gt;사무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lt;br&gt;&lt;br&gt;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째깍, 째깍, 째깍.&lt;br&gt;&lt;br&gt;콘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초, 10초, 15초. 그의 은빛 눈동자가 비아의 얼굴 위에 고정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You want to burn that file.&quot;&lt;br&gt;(그 파일을 태우겠다는 거군.)&lt;br&gt;&lt;br&gt;&quot;I want to open it. There's a difference.&quot;&lt;br&gt;(여는 겁니다. 태우는 것과는 다르죠.)&lt;br&gt;&lt;br&gt;&quot;Is there.&quot;&lt;br&gt;(그런가.)&lt;br&gt;&lt;br&gt;콘라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느림 자체가 일종의 압박이었다. 189센티미터의 장신이 책상 너머로 서자, 그의 그림자가 비아를 덮었다.&lt;br&gt;&lt;br&gt;&quot;Let me make sure I understand. You want to stand in front of cameras and tell the world that five years ago, a raider died on your watch. That the equipment failed, yes, but that you missed a cross-check that might have caught it.&quot;&lt;br&gt;(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하지. 카메라 앞에 서서 세상에 말하겠다는 거군. 5년 전 네 담당 레이더가 죽었다고. 장비가 고장 난 건 맞지만, 그걸 잡아낼 수 있었던 교차 검증을 네가 놓쳤다고.)&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quot;And that I covered it up.&quot;&lt;br&gt;(그리고 내가 덮었다고.)&lt;br&gt;&lt;br&gt;&quot;You didn't cover it up. You made a judgment call within your authority as director. I'm disclosing that judgment call.&quot;&lt;br&gt;(덮은 게 아닙니다. 디렉터 권한 내에서 판단을 내리신 겁니다. 저는 그 판단을 공개하는 거예요.)&lt;br&gt;&lt;br&gt;콘라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lt;br&gt;&lt;br&gt;&quot;Semantics.&quot;&lt;br&gt;(말장난이군.)&lt;br&gt;&lt;br&gt;&quot;Precision.&quot;&lt;br&gt;(정확한 표현입니다.)&lt;br&gt;&lt;br&gt;콘라트가 비아를 응시했다. 오래.&lt;br&gt;&lt;br&gt;그리고 천천히 책상을 돌아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발은 카펫에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lt;br&gt;&lt;br&gt;콘라트가 그녀 앞 두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lt;br&gt;&lt;br&gt;&quot;Vianne. I selected you when you were fifteen. I watched you through the academy. I saw your simulation scores and I knew—before anyone else knew—that you were exceptional.&quot;&lt;br&gt;(비안느. 열다섯 살에 내가 널 뽑았다. 아카데미에서 널 지켜봤고, 시뮬레이션 점수를 보고 알았다—누구보다 먼저—네가 특출하다는 걸.)&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quot;When Tobias died, I had two options. File the truth and end your career before it started. Or file the equipment failure—which was also true—and give you a second chance.&quot;&lt;br&gt;(토비아스가 죽었을 때, 선택지가 둘이었다. 진실을 기록하고 네 커리어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거나. 장비 고장을 기록하고—그것도 사실이었으니—너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거나.)&lt;br&gt;&lt;br&gt;&quot;I know.&quot;&lt;br&gt;(알고 있습니다.)&lt;br&gt;&lt;br&gt;&quot;I chose the second. Not for you. For Silver Slot. Because losing a talent like you over a sensor misread would have been a waste.&quot;&lt;br&gt;(두 번째를 택했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실버 슬롯을 위해서. 센서 오독 하나로 너 같은 인재를 잃는 건 낭비니까.)&lt;br&gt;&lt;br&gt;비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lt;br&gt;&lt;br&gt;&quot;And then you left.&quot;&lt;br&gt;(그런데 네가 떠났지.)&lt;br&gt;&lt;br&gt;콘라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의 결이 실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서늘한 것. 배신감에 가까운.&lt;br&gt;&lt;br&gt;&quot;I gave you a clean record and a career. You threw both away and disappeared. Without a word.&quot;&lt;br&gt;(깨끗한 기록과 커리어를 줬는데. 넌 둘 다 버리고 사라졌지. 말 한마디 없이.)&lt;br&gt;&lt;br&gt;&quot;I left because I couldn't live under the weight of that signature.&quot;&lt;br&gt;(그 서명의 무게를 안고는 살 수 없어서 떠난 겁니다.)&lt;br&gt;&lt;br&gt;콘라트가 멈췄다.&lt;br&gt;&lt;br&gt;비아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문장을 열한 시간 동안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5년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lt;br&gt;&lt;br&gt;&quot;For five years, that signature told me I owed you something. My silence. My name. My entire identity. I erased Vianne Lockwood because as long as she existed, she belonged to you.&quot;&lt;br&gt;(5년 동안 그 서명은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빚지고 있다고 말했어요. 제 침묵, 제 이름, 제 정체성 전부를. 비안느 록우드가 존재하는 한 그녀는 당신 소유니까, 이름을 지운 거예요.)&lt;br&gt;&lt;br&gt;콘라트의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lt;br&gt;&lt;br&gt;&quot;And now?&quot;&lt;br&gt;(그래서 지금은?)&lt;br&gt;&lt;br&gt;&quot;Now I'm taking it back.&quot;&lt;br&gt;(이제 되찾는 겁니다.)&lt;br&gt;&lt;br&gt;비아는 크로스백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콘라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lt;br&gt;&lt;br&gt;&quot;This is a copy of the press statement I'll be releasing next Monday. It discloses my full name, my tenure at Silver Slot, the incident, the cross-check failure, and your report. Every word has been reviewed by Red Zone legal and IGC media compliance.&quot;&lt;br&gt;(다음 주 월요일에 발표할 언론 성명서 사본입니다. 제 본명, 실버 슬롯 재직 기간, 사고, 교차 검증 실패, 그리고 당신의 보고서를 공개합니다. 모든 문장은 레드 존 법무팀과 IGC 미디어 규정팀의 검토를 거쳤습니다.)&lt;br&gt;&lt;br&gt;콘라트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집지 않았다.&lt;br&gt;&lt;br&gt;&quot;You're not asking for my permission.&quot;&lt;br&gt;(내 허가를 구하는 게 아니군.)&lt;br&gt;&lt;br&gt;&quot;No.&quot;&lt;br&gt;(네.)&lt;br&gt;&lt;br&gt;&quot;You're informing me.&quot;&lt;br&gt;(통보하는 거야.)&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긴 침묵이 흘렀다.&lt;br&gt;&lt;br&gt;콘라트가 천천히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 안의 서류를 꺼내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줄 사이를 오가는 동안, 비아는 그의 표정에서 단 하나의 변화라도 읽어내려 했다.&lt;br&gt;&lt;br&gt;없었다.&lt;br&gt;&lt;br&gt;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세 번째. 네 번째.&lt;br&gt;&lt;br&gt;마지막 페이지에서 그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lt;br&gt;&lt;br&gt;그리고 서류를 봉투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lt;br&gt;&lt;br&gt;&quot;This will damage Silver Slot.&quot;&lt;br&gt;(이건 실버 슬롯에 피해를 줄 거다.)&lt;br&gt;&lt;br&gt;&quot;The equipment manufacturer already paid a nine-figure settlement. The incident is public record minus the handler identity. The only new information is my name and your signature.&quot;&lt;br&gt;(장비 제조사는 이미 9자리 합의금을 지불했습니다. 사건 자체는 핸들러 신원을 제외하면 이미 공개 기록이고요. 유일한 새 정보는 제 이름과 당신의 서명입니다.)&lt;br&gt;&lt;br&gt;&quot;My signature, which protected you.&quot;&lt;br&gt;(널 보호한 내 서명 말이지.)&lt;br&gt;&lt;br&gt;&quot;Your signature, which certified the truth.&quot;&lt;br&gt;(진실을 인증한 당신의 서명이요.)&lt;br&gt;&lt;br&gt;비아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lt;br&gt;&lt;br&gt;&quot;You wrote 'no handler fault.' If that was true then, it's true now. If you challenge it, you'll have to explain why you certified something you didn't believe.&quot;&lt;br&gt;('핸들러 과실 없음'이라고 쓰셨죠. 그때 그게 사실이었다면, 지금도 사실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시면, 본인이 믿지 않은 내용을 왜 인증했는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lt;br&gt;&lt;br&gt;콘라트의 턱선에 힘이 들어갔다. 그 미세한 변화가, 비아가 이 사무실에서 읽어낸 그의 유일한 감정적 반응이었다.&lt;br&gt;&lt;br&gt;&quot;You learned this somewhere.&quot;&lt;br&gt;(이건 어디서 배운 거군.)&lt;br&gt;&lt;br&gt;비아가 멈칫했다.&lt;br&gt;&lt;br&gt;&quot;Excuse me?&quot;&lt;br&gt;(네?)&lt;br&gt;&lt;br&gt;&quot;This tactic. Using my own documentation against me. Making the challenger explain their contradictions instead of defending yourself.&quot;&lt;br&gt;(이 전술. 내 문서를 나에게 역이용하는 것.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 상대방에게 자기 모순을 설명하게 만드는 것.)&lt;br&gt;&lt;br&gt;콘라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lt;br&gt;&lt;br&gt;&quot;The Vianne Lockwood I trained would have come here to apologize. Not to counterattack.&quot;&lt;br&gt;(내가 훈련시킨 비안느 록우드였다면 사과하러 왔을 거다. 반격하러 온 게 아니라.)&lt;br&gt;&lt;br&gt;비아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lt;br&gt;&lt;br&gt;그 말은 정확했다. 5년 전의 비안느 록우드였다면 이 사무실에 무릎을 꿇고 들어왔을 것이었다. 죄송하다고, 제가 잘못했다고, 어떤 처분이든 받겠다고.&lt;br&gt;&lt;br&gt;지금의 그녀가 등을 곧추세우고 서 있는 것은—&lt;br&gt;&lt;br&gt;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lt;br&gt;&lt;br&gt;니스의 자갈 해변. 물 위에서 발을 뗐을 때 순간적으로 가라앉은 감각. 그리고 등을 받쳐준 손바닥. '넌 평생 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았으니까.'&lt;br&gt;&lt;br&gt;비행기 캐빈에서 옆자리에 앉아 '계산을 멈춰'라고 말하던 목소리.&lt;br&gt;&lt;br&gt;'네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게 명백히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짓을 계속할 거야.'&lt;br&gt;&lt;br&gt;비아는 눈을 떴다.&lt;br&gt;&lt;br&gt;&quot;You're right. She would have.&quot;&lt;br&gt;(맞아요. 그랬을 겁니다.)&lt;br&gt;&lt;br&gt;그녀는 콘라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lt;br&gt;&lt;br&gt;&quot;But she's not the one standing here.&quot;&lt;br&gt;(하지만 여기 서 있는 건 그녀가 아닙니다.)&lt;br&gt;&lt;br&gt;콘라트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스쳤다. 실망인지, 인정인지, 혹은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인지 비아에게는 분간할 수 없었다.&lt;br&gt;&lt;br&gt;그는 책상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으며,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lt;br&gt;&lt;br&gt;&quot;Tobias Reinhardt had a younger sister. Clara. She's twenty-three now. Works in Munich.&quot;&lt;br&gt;(토비아스 라인하르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 클라라. 지금 스물셋이야. 뮌헨에서 일하고 있지.)&lt;br&gt;&lt;br&gt;비아의 숨이 멈췄다.&lt;br&gt;&lt;br&gt;&quot;She doesn't know the details. She knows her brother died in a gate with an equipment failure. She doesn't know there was a handler who could have caught it.&quot;&lt;br&gt;(자세한 건 모른다. 오빠가 장비 고장으로 게이트에서 죽었다는 것만 알고. 그걸 잡아낼 수도 있었던 핸들러가 있었다는 건 모르지.)&lt;br&gt;&lt;br&gt;콘라트가 비아를 올려다보았다.&lt;br&gt;&lt;br&gt;&quot;If you open that file, she'll know.&quot;&lt;br&gt;(네가 그 파일을 열면, 그 아이도 알게 될 거다.)&lt;br&gt;&lt;br&gt;그 말은 공격이 아니었다.&lt;br&gt;&lt;br&gt;경고였다.&lt;br&gt;&lt;br&gt;비아의 손끝이 가방 끈을 세게 쥐었다. 토비아스의 여동생. 그 존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데이터로만. 이름과 나이와 거주지를 파일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콘라트의 입에서 나오자, 데이터가 아닌 사람이 되었다.&lt;br&gt;&lt;br&gt;&quot;I know.&quot;&lt;br&gt;(알고 있습니다.)&lt;br&gt;&lt;br&gt;&quot;And you're still going ahead.&quot;&lt;br&gt;(그래도 하겠다는 거군.)&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기 전에 한 번 삼켰다. 목이 말랐다.&lt;br&gt;&lt;br&gt;&quot;She deserves the truth more than I deserve comfort.&quot;&lt;br&gt;(그녀가 진실을 알 자격은 제가 편안할 자격보다 큽니다.)&lt;br&gt;&lt;br&gt;콘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시계 초침이 열두 번 울리는 동안,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독백에 가까운 톤으로 말했다.&lt;br&gt;&lt;br&gt;&quot;Mathis Morrel.&quot;&lt;br&gt;(마티스 모렐.)&lt;br&gt;&lt;br&gt;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lt;br&gt;&lt;br&gt;&quot;Du hast dich verändert, seit du bei ihm bist.&quot;&lt;br&gt;(그자 옆에 있으면서 변했군.)&lt;br&gt;&lt;br&gt;독일어였다. 비아가 영어로 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는 독일어로 바꿨다. 그리고 비아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독일어는 그녀가 실버 슬롯에서 7년간 사용한 언어였다.&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어로도, 독일어로도.&lt;br&gt;&lt;br&gt;콘라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lt;br&gt;&lt;br&gt;&quot;I won't stop the audit. I won't retract the inquiry. But I won't oppose your press conference either.&quot;&lt;br&gt;(감사를 중단하지 않겠다. 조회 요청을 철회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네 기자회견에 반대하지도 않겠다.)&lt;br&gt;&lt;br&gt;비아가 눈을 깜빡였다.&lt;br&gt;&lt;br&gt;&quot;...You won't?&quot;&lt;br&gt;(...반대 안 하신다고요?)&lt;br&gt;&lt;br&gt;&quot;The report says what it says. I signed it because it was accurate. If the world reads it, they'll reach the same conclusion I did.&quot;&lt;br&gt;(보고서에는 쓰여 있는 대로 쓰여 있다. 정확했기 때문에 서명한 거야. 세상이 읽어도 내가 내린 것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거다.)&lt;br&gt;&lt;br&gt;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lt;br&gt;&lt;br&gt;&quot;But Vianne.&quot;&lt;br&gt;(하지만 비안느.)&lt;br&gt;&lt;br&gt;그가 창가로 걸어갔다. 베를린의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lt;br&gt;&lt;br&gt;&quot;The reflex data leak. That wasn't me.&quot;&lt;br&gt;(반사신경 데이터 유출.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다.)&lt;br&gt;&lt;br&gt;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lt;br&gt;&lt;br&gt;&quot;The timing—&quot;&lt;br&gt;(타이밍이—)&lt;br&gt;&lt;br&gt;&quot;I opened your file because I heard you were signing a permanent contract with a rival team. I wanted to see if the record was still sealed.&quot;&lt;br&gt;(네 파일을 연 건 네가 경쟁 팀과 정식 계약을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야. 기록이 아직 봉인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lt;br&gt;&lt;br&gt;그가 돌아보았다.&lt;br&gt;&lt;br&gt;&quot;I didn't leak Morrel's data. I don't operate like that.&quot;&lt;br&gt;(모렐의 데이터를 흘린 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lt;br&gt;&lt;br&gt;비아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lt;br&gt;&lt;br&gt;콘라트 슈나이더는 많은 것이었다. 통제적이고, 소유적이고, 차갑고.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실버 슬롯의 디렉터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만으로 충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lt;br&gt;&lt;br&gt;그렇다면 마티스의 반사신경 데이터를 흘린 것은 누구인가.&lt;br&gt;&lt;br&gt;콘라트가 아니라면.&lt;br&gt;&lt;br&gt;비아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IGC 아카이브에 접근한 기록은 콘라트의 코드로 찍혀 있었다. 하지만 반사신경 데이터는 IGC 아카이브가 아니라 레드 존 내부 서버에 있었다. 두 가지 다른 출처, 두 가지 다른 유출. 타이밍이 겹친 것은—&lt;br&gt;&lt;br&gt;우연이 아니라면, 의도적인 교란이었다.&lt;br&gt;&lt;br&gt;누군가가 콘라트의 파일 접근과 데이터 유출을 같은 시간대에 일으켜, 그 둘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lt;br&gt;&lt;br&gt;&quot;Director. One last question.&quot;&lt;br&gt;(디렉터님. 마지막 질문 하나.)&lt;br&gt;&lt;br&gt;&quot;Go ahead.&quot;&lt;br&gt;(말해라.)&lt;br&gt;&lt;br&gt;&quot;Who told you I was signing with Red Zone?&quot;&lt;br&gt;(제가 레드 존과 계약한다는 걸 누가 알려줬습니까?)&lt;br&gt;&lt;br&gt;콘라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quot;The IGC audit inquiry came through standard channels. Personnel updates are flagged automatically when a handler with a sealed file moves between teams.&quot;&lt;br&gt;(IGC 감사 조회는 표준 채널로 들어왔다. 봉인 파일이 있는 핸들러가 팀 간 이동할 때 자동으로 알림이 뜨게 되어 있어.)&lt;br&gt;&lt;br&gt;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lt;br&gt;&lt;br&gt;그리고 돌아섰다.&lt;br&gt;&lt;br&gt;&quot;Thank you for your time, Director.&quot;&lt;br&gt;(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렉터님.)&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그녀가 문 앞에서 멈췄다.&lt;br&gt;&lt;br&gt;콘라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단호하고, 하지만 그 안에 아주 미세하게—비아가 5년 전에는 읽어내지 못했을 만큼 미세하게—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lt;br&gt;&lt;br&gt;&quot;That boy you're handling. He's running out of time. Functional-type raiders with shoulder injuries don't last past thirty-six.&quot;&lt;br&gt;(네가 담당하는 그 애. 시간이 없다. 어깨 부상이 있는 기능계 레이더는 서른여섯을 못 넘겨.)&lt;br&gt;&lt;br&gt;비아의 등이 굳었다.&lt;br&gt;&lt;br&gt;&quot;Keep him alive.&quot;&lt;br&gt;(살려둬라.)&lt;br&gt;&lt;br&gt;비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lt;br&gt;&lt;br&gt;&quot;That's what I do.&quot;&lt;br&gt;(그게 제 일이니까요.)&lt;br&gt;&lt;br&gt;그녀는 문을 닫았다.&lt;br&gt;&lt;br&gt;복도로 나온 비아는 세 걸음을 걸은 뒤 멈춰 섰다.&lt;br&gt;&lt;br&gt;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진동이,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무릎 아래로 밀려왔다.&lt;br&gt;&lt;br&gt;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lt;br&gt;&lt;br&gt;그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lt;br&gt;&lt;br&gt;화면에 알림이 떠 있었다.&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997&quot; data-origin-height=&quot;1287&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QNfLK/dJMcagHc3Nt/Lloktp6x8e4awwkkWK9Zf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QNfLK/dJMcagHc3Nt/Lloktp6x8e4awwkkWK9Zf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QNfLK/dJMcagHc3Nt/Lloktp6x8e4awwkkWK9Zf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QNfLK%2FdJMcagHc3Nt%2FLloktp6x8e4awwkkWK9Zf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997&quot; height=&quot;1287&quot; data-origin-width=&quot;997&quot; data-origin-height=&quot;1287&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비아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타이핑했다.&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1054&quot; data-origin-height=&quot;788&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u2NSn/dJMcaiSvDVY/41vzUNZihGHvg5vXEyoyj1/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u2NSn/dJMcaiSvDVY/41vzUNZihGHvg5vXEyoyj1/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u2NSn/dJMcaiSvDVY/41vzUNZihGHvg5vXEyoyj1/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u2NSn%2FdJMcaiSvDVY%2F41vzUNZihGHvg5vXEyoyj1%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1054&quot; height=&quot;788&quot; data-origin-width=&quot;1054&quot; data-origin-height=&quot;788&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답장은 즉시 왔다.&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1041&quot; data-origin-height=&quot;404&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0eF8G/dJMcaaUmDug/CkCAcF0uI2CnLqIo3kgCC1/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0eF8G/dJMcaaUmDug/CkCAcF0uI2CnLqIo3kgCC1/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0eF8G/dJMcaaUmDug/CkCAcF0uI2CnLqIo3kgCC1/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0eF8G%2FdJMcaaUmDug%2FCkCAcF0uI2CnLqIo3kgCC1%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1041&quot; height=&quot;404&quot; data-origin-width=&quot;1041&quot; data-origin-height=&quot;404&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비아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실버 슬롯 본부 5층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조용히 웃었다.&lt;br&gt;&lt;br&gt;짧고, 힘없고, 그리고 따뜻한 웃음이었다.&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1026&quot; data-origin-height=&quot;810&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co0qy/dJMcaaUmDuh/kaD0hP3fwk1dnIDlO0UwW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co0qy/dJMcaaUmDuh/kaD0hP3fwk1dnIDlO0UwW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co0qy/dJMcaaUmDuh/kaD0hP3fwk1dnIDlO0UwW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co0qy%2FdJMcaaUmDuh%2FkaD0hP3fwk1dnIDlO0UwW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1026&quot; height=&quot;810&quot; data-origin-width=&quot;1026&quot; data-origin-height=&quot;810&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비아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lt;br&gt;&lt;br&gt;그리고 실버 슬롯 본부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벽면의 액자들을 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lt;br&gt;&lt;br&gt;엘리베이터가 그녀를 1층으로 데려갔고, 정문이 열리자 베를린의 저녁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니스보다 차갑고, LA보다 습하고, 어딘가 낯익은 공기. 브란덴부르크 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lt;br&gt;&lt;br&gt;비안느 록우드는 7년 만에 이 도시로 돌아왔고, 빚을 갚았고, 그리고 내일 다시 떠날 것이었다.&lt;br&gt;&lt;br&gt;이번에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lt;br&gt;&lt;br&gt;돌아가는 것이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목요일 오전 열한 시 이십육 분.&lt;br&gt;&lt;br&gt;비아는 도착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lt;br&gt;&lt;br&gt;어젯밤은 시내의 작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보냈다. 리츠칼튼 스위트 키를 보내겠다는 카시안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 곳에 묶기에는 어제의 자신이 너무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그 방의 크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창문 하나에 침대 하나뿐인 방에서, 여섯 시간을 통째로 잤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꿈 없이.&lt;br&gt;&lt;br&gt;그리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떠, 마티스의 도착 편명을 조회했다.&lt;br&gt;&lt;br&gt;LAX발 베를린행 직항. 예정 도착 시각 11시 15분. 실제 도착 11시 08분. 7분 이른 도착이었고, 그 7분 때문에 그녀는 게이트 앞에서 예상보다 7분을 더 서 있게 되었다.&lt;br&gt;&lt;br&gt;국제선 도착 로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독일어, 영어, 터키어, 스페인어가 뒤엉킨 소음. 카트를 밀고 나오는 여행객들, 꽃다발을 든 사람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는 기사들. 천장의 유리 패널을 통과한 6월의 빛이 바닥 타일 위에 격자무늬를 그리고 있었다.&lt;br&gt;&lt;br&gt;비아는 그 격자 무늬 위에 서서, 자동문을 지켜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스물세 번째로 문이 열렸을 때.&lt;br&gt;&lt;br&gt;그가 나왔다.&lt;br&gt;&lt;br&gt;짐은 없었다. 기내용 백팩 하나. 검은 티셔츠 위에 데님 재킷, 선글라스는 셔츠 목선에 걸린 채. 열한 시간을 좁은 좌석에서 보낸 사람답게 머리는 한쪽이 눌려 있었고, 턱선에 수염이 옅게 올라와 있었다.&lt;br&gt;&lt;br&gt;그런데도 그 남자는 공항 로비에서 눈에 띄었다. 183센티미터의 슬랜더한 체형과, 그 휘적거리는 걸음과, 열한 시간의 피로 따위로는 지워지지 않는 어떤 종류의 존재감 때문에. 실제로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그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마티스는 로비를 훑었다.&lt;br&gt;&lt;br&gt;그리고 그녀를 찾아냈다. 3초도 걸리지 않았다.&lt;br&gt;&lt;br&gt;그가 걸음을 멈췄다.&lt;br&gt;&lt;br&gt;두 사람 사이에는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그 사이로 여행객들이 계속 지나갔다. 카트 바퀴 소리, 안내 방송, 아이의 울음소리.&lt;br&gt;&lt;br&gt;마티스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비아도 그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그녀는 이미 계산해두었다. 세 가지 시나리오. 첫째, 화를 낸다. '혼자 갔어? 제정신이야?' 둘째, 농담으로 덮는다. '이코노미 탔지? 나 알아. 네 자세 보면 알아.' 셋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쳐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든다. 마티스 모렐의 방식대로.&lt;br&gt;&lt;br&gt;그가 걸어왔다.&lt;br&gt;&lt;br&gt;그리고 세 가지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는 그녀 앞에 멈춰 서서,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lt;br&gt;&lt;br&gt;그리고 두 팔로 그녀를 감쌌다.&lt;br&gt;&lt;br&gt;비아의 숨이 멈췄다.&lt;br&gt;&lt;br&gt;공항 로비 한가운데였다. 수백 명이 지나다니는 곳. 스마트폰을 든 사람이 최소 백 명은 있는 곳. 마티스 모렐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이 그중 절반은 될 곳.&lt;br&gt;&lt;br&gt;그런데 그는 그런 계산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안았다. 한 손은 그녀의 등에, 다른 손은 뒤통수 아래 목덜미에. 힘이 세지도 않았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3초쯤.&lt;br&gt;&lt;br&gt;그의 목에서 열한 시간 비행의 마른 공기 냄새와, 데님 냄새와, 그 아래 희미하게 남은 니스의 소금기 같은 것이 났다.&lt;br&gt;&lt;br&gt;비아는 팔을 들지 못했다. 두 팔이 몸통 옆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lt;br&gt;&lt;br&gt;마티스가 몸을 떼었다.&lt;br&gt;&lt;br&gt;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은회색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열한 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눈이었다.&lt;br&gt;&lt;br&gt;&quot;Okay.&quot;&lt;br&gt;(됐어.)&lt;br&gt;&lt;br&gt;그게 첫 마디였다.&lt;br&gt;&lt;br&gt;&quot;...Okay?&quot;&lt;br&gt;(...됐다고요?)&lt;br&gt;&lt;br&gt;&quot;You're standing. You're breathing. Both eyes intact. That's all I needed to confirm.&quot;&lt;br&gt;(서 있고. 숨 쉬고. 두 눈 다 멀쩡하고. 확인하려던 건 그게 전부야.)&lt;br&gt;&lt;br&gt;마티스가 백팩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lt;br&gt;&lt;br&gt;&quot;Now yell at me. Go ahead. I know it's coming.&quot;&lt;br&gt;(이제 나한테 화내. 해봐. 올 거 아니까.)&lt;br&gt;&lt;br&gt;비아는 그를 쳐다보았다.&lt;br&gt;&lt;br&gt;&quot;...I was going to yell at you.&quot;&lt;br&gt;(...화낼 생각이었어요.)&lt;br&gt;&lt;br&gt;&quot;I know.&quot;&lt;br&gt;(알아.)&lt;br&gt;&lt;br&gt;&quot;I prepared four separate arguments on the way here. Unauthorized travel, misuse of team resources, violation of the pre-season conditioning schedule, and the fact that you left the country three weeks before season opening without director approval.&quot;&lt;br&gt;(오는 길에 논거를 네 개 준비했어요. 무허가 이동, 팀 자원 오용, 프리시즌 컨디셔닝 스케줄 위반, 그리고 시즌 개막 3주 전에 디렉터 승인 없이 출국한 사실.)&lt;br&gt;&lt;br&gt;&quot;That's a solid four.&quot;&lt;br&gt;(튼튼한 네 개네.)&lt;br&gt;&lt;br&gt;&quot;They're all still valid.&quot;&lt;br&gt;(전부 여전히 유효해요.)&lt;br&gt;&lt;br&gt;&quot;Yeah.&quot;&lt;br&gt;(그렇겠지.)&lt;br&gt;&lt;br&gt;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lt;br&gt;&lt;br&gt;&quot;...But I'm not going to use them today.&quot;&lt;br&gt;(...하지만 오늘은 안 쓸게요.)&lt;br&gt;&lt;br&gt;마티스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lt;br&gt;&lt;br&gt;&quot;That's the nicest thing you've ever said to me.&quot;&lt;br&gt;(네가 나한테 한 말 중 제일 다정한 말이야.)&lt;br&gt;&lt;br&gt;&quot;That is a low bar.&quot;&lt;br&gt;(기준이 낮네요.)&lt;br&gt;&lt;br&gt;&quot;It's the bar you set, Handler.&quot;&lt;br&gt;(네가 세운 기준이야, 핸들러.)&lt;br&gt;&lt;br&gt;두 사람은 로비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자동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베를린의 6월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니스보다 서늘하고, 습기가 있고, 어딘가 회색빛이 도는 공기.&lt;br&gt;&lt;br&gt;마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lt;br&gt;&lt;br&gt;&quot;God, it's grey. How do people live here.&quot;&lt;br&gt;(와, 온통 회색이네. 사람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lt;br&gt;&lt;br&gt;&quot;It's 19 degrees with 60% humidity. That's objectively comfortable.&quot;&lt;br&gt;(19도에 습도 60%예요. 객관적으로 쾌적한 조건이죠.)&lt;br&gt;&lt;br&gt;&quot;It's objectively depressing.&quot;&lt;br&gt;(객관적으로 우울한 거지.)&lt;br&gt;&lt;br&gt;&quot;You spent three weeks complaining that Nice was too hot.&quot;&lt;br&gt;(니스가 너무 덥다고 3주 내내 불평했잖아요.)&lt;br&gt;&lt;br&gt;&quot;I complained that you were too hot.&quot;&lt;br&gt;(네가 너무 뜨겁다고 불평한 건데.)&lt;br&gt;&lt;br&gt;비아가 걸음을 멈췄다.&lt;br&gt;&lt;br&gt;마티스는 태연하게 계속 걸었다. 그리고 세 걸음쯤 뒤 돌아보며 물었다.&lt;br&gt;&lt;br&gt;&quot;What?&quot;&lt;br&gt;(왜?)&lt;br&gt;&lt;br&gt;&quot;...That's not what you said.&quot;&lt;br&gt;(...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lt;br&gt;&lt;br&gt;&quot;I said the thermostat. Obviously. You kept setting the living room to 26 degrees.&quot;&lt;br&gt;(온도 조절기 말한 거야. 당연히. 네가 거실을 계속 26도로 맞춰놨잖아.)&lt;br&gt;&lt;br&gt;&quot;...Right.&quot;&lt;br&gt;(...그렇군요.)&lt;br&gt;&lt;br&gt;&quot;What did you think I meant?&quot;&lt;br&gt;(무슨 뜻으로 알아들은 거야?)&lt;br&gt;&lt;br&gt;&quot;Nothing.&quot;&lt;br&gt;(아무것도요.)&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quot;Nothing, Mathis.&quot;&lt;br&gt;(아무것도요, 마티스.)&lt;br&gt;&lt;br&gt;마티스가 낮게 웃으며 다시 걸었다.&lt;br&gt;&lt;br&gt;택시 대신 그들은 공항철도를 탔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 결정에 삼십 초쯤 저항했다. '나 지금 열한 시간 이코노미도 아니고 비즈니스에서 못 자고 왔는데 지하철?' 비아가 '베를린 대중교통 정시성은 95.4%'라고 답했고, 마티스는 '그 숫자를 어디서 알았냐'고 물었고,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7년 전에 매일 탔던 노선이었으니까.&lt;br&gt;&lt;br&gt;S반 열차 안은 한적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베를린 외곽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붉은 벽돌 건물들, 회색 아파트 블록, 그 사이사이 무성한 초록.&lt;br&gt;&lt;br&gt;마티스가 좌석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lt;br&gt;&lt;br&gt;&quot;So. Tell me.&quot;&lt;br&gt;(그래서. 말해봐.)&lt;br&gt;&lt;br&gt;비아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lt;br&gt;&lt;br&gt;&quot;He's not going to oppose the press conference.&quot;&lt;br&gt;(기자회견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어요.)&lt;br&gt;&lt;br&gt;마티스의 눈이 커졌다.&lt;br&gt;&lt;br&gt;&quot;...Seriously?&quot;&lt;br&gt;(...진짜로?)&lt;br&gt;&lt;br&gt;&quot;He said the report says what it says. He signed it because it was accurate.&quot;&lt;br&gt;(보고서에는 쓰여 있는 대로 쓰여 있다고 했어요. 정확했기 때문에 서명했다고.)&lt;br&gt;&lt;br&gt;&quot;That's it? No threats, no leverage, no 'come back to Silver Slot or else'?&quot;&lt;br&gt;(그게 다야? 협박도 없고, 지렛대도 없고, '실버 슬롯으로 돌아와라 아니면' 같은 것도 없이?)&lt;br&gt;&lt;br&gt;비아는 잠시 침묵했다.&lt;br&gt;&lt;br&gt;&quot;He mentioned Tobias Reinhardt's sister.&quot;&lt;br&gt;(토비아스 라인하르트의 여동생을 언급했어요.)&lt;br&gt;&lt;br&gt;마티스의 얼굴이 굳었다.&lt;br&gt;&lt;br&gt;&quot;...His sister.&quot;&lt;br&gt;(...여동생.)&lt;br&gt;&lt;br&gt;&quot;Clara. Twenty-three. Lives in Munich. She doesn't know there was a handler who could have caught it.&quot;&lt;br&gt;(클라라. 스물셋. 뮌헨에 살아요. 그걸 잡아낼 수도 있었던 핸들러가 있었다는 걸 몰라요.)&lt;br&gt;&lt;br&gt;열차가 커브를 돌며 한 번 흔들렸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딪혔다가 떨어졌다.&lt;br&gt;&lt;br&gt;마티스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lt;br&gt;&lt;br&gt;&quot;Is that why you didn't tell me you were going?&quot;&lt;br&gt;(그래서 간다고 말 안 한 거야?)&lt;br&gt;&lt;br&gt;&quot;No.&quot;&lt;br&gt;(아니에요.)&lt;br&gt;&lt;br&gt;&quot;Then why.&quot;&lt;br&gt;(그럼 왜.)&lt;br&gt;&lt;br&gt;비아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lt;br&gt;&lt;br&gt;&quot;Because you would have come with me.&quot;&lt;br&gt;(당신이 따라왔을 테니까요.)&lt;br&gt;&lt;br&gt;&quot;I came anyway.&quot;&lt;br&gt;(어차피 왔잖아.)&lt;br&gt;&lt;br&gt;&quot;You came after. That's different.&quot;&lt;br&gt;(끝난 뒤에 왔죠. 그건 달라요.)&lt;br&gt;&lt;br&gt;그녀가 고개를 돌렸다.&lt;br&gt;&lt;br&gt;&quot;If you had been in that room, I would have looked at you. And the moment I looked at you, he would have known where my weight was.&quot;&lt;br&gt;(당신이 그 방에 있었다면, 저는 당신을 봤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당신을 보는 순간, 그는 제 무게중심이 어디 있는지 알았을 거고요.)&lt;br&gt;&lt;br&gt;마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lt;br&gt;&lt;br&gt;&quot;...That's a functional-type metaphor.&quot;&lt;br&gt;(...그거 기능계 비유인데.)&lt;br&gt;&lt;br&gt;&quot;I've been listening to you for three months.&quot;&lt;br&gt;(석 달 동안 당신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요.)&lt;br&gt;&lt;br&gt;마티스는 웃었다. 짧고, 어딘가 지친 웃음이었다.&lt;br&gt;&lt;br&gt;그리고 그가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았다.&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quot;Next time, tell me. I won't come into the room. I'll wait in the fucking lobby with a coffee if that's what you need. But tell me.&quot;&lt;br&gt;(다음엔 말해. 방에는 안 들어갈게. 네가 원하면 로비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릴게. 근데 말은 해.)&lt;br&gt;&lt;br&gt;비아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lt;br&gt;&lt;br&gt;열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턱선의 옅은 수염, 눈 아래 그늘, 그리고 목선에 걸린 선글라스.&lt;br&gt;&lt;br&gt;이 남자는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콘라트 슈나이더의 사무실에서 무엇을 겪든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한 시간을 좁은 좌석에서 뜬눈으로 날아왔다.&lt;br&gt;&lt;br&gt;비아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밀려 올라왔다.&lt;br&gt;&lt;br&gt;그녀는 그것을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아주 실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lt;br&gt;&lt;br&gt;&quot;...The press conference is Monday. 10 AM, Red Zone headquarters, first-floor media hall.&quot;&lt;br&gt;(...기자회견은 월요일이에요. 오전 10시, 레드 존 본부 1층 미디어 홀.)&lt;br&gt;&lt;br&gt;&quot;Mm.&quot;&lt;br&gt;(음.)&lt;br&gt;&lt;br&gt;&quot;I'll be standing alone at the podium.&quot;&lt;br&gt;(연단에 혼자 설 겁니다.)&lt;br&gt;&lt;br&gt;마티스가 눈을 떴다.&lt;br&gt;&lt;br&gt;&quot;No.&quot;&lt;br&gt;(안 돼.)&lt;br&gt;&lt;br&gt;&quot;It's my statement. My name. My incident.&quot;&lt;br&gt;(제 성명이고, 제 이름이고, 제 사건이에요.)&lt;br&gt;&lt;br&gt;&quot;And I'll be in the front row. Second seat from the aisle.&quot;&lt;br&gt;(그리고 난 앞줄에 있을 거야. 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lt;br&gt;&lt;br&gt;&quot;That's a reserved press seat.&quot;&lt;br&gt;(그건 언론사 지정석이에요.)&lt;br&gt;&lt;br&gt;&quot;Then I'll buy the seat. I'll buy the whole row. Cassian keeps offering to book floors, maybe it's contagious.&quot;&lt;br&gt;(그럼 자리를 사지. 줄 전체를 살게. 카시안이 계속 층을 통째로 빌린다고 하는데, 전염성 있는 것 같아.)&lt;br&gt;&lt;br&gt;비아는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lt;br&gt;&lt;br&gt;그리고 열지 못했다.&lt;br&gt;&lt;br&gt;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역으로 들어섰다. 안내 방송이 독일어로 흘러나왔다. 비아는 그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창밖만 보았다.&lt;br&gt;&lt;br&gt;마티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lt;br&gt;&lt;br&gt;&quot;Where are we, anyway? Is this our stop?&quot;&lt;br&gt;(근데 여기 어디야? 우리 내리는 데야?)&lt;br&gt;&lt;br&gt;비아도 일어섰다.&lt;br&gt;&lt;br&gt;그리고 창밖의 역 표지판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녀의 발이 아주 짧게 멈췄다.&lt;br&gt;&lt;br&gt;그녀가 7년 전 매일 아침 내렸던 역이었다.&lt;br&gt;&lt;br&gt;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커피를 들고 뛰어 내려가던 계단, 겨울에 미끄러워서 두 번이나 넘어졌던 플랫폼, 그리고 그 위로 뻗은 낡은 철제 캐노피.&lt;br&gt;&lt;br&gt;비아는 그것을 3초쯤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 3초를 보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문을 나서며,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lt;br&gt;&lt;br&gt;&quot;So what's there to eat in this city. And don't say sausage.&quot;&lt;br&gt;(그래서 이 도시에 먹을 게 뭐가 있어. 소시지라고 하지 마.)&lt;br&gt;&lt;br&gt;비아가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lt;br&gt;&lt;br&gt;&quot;...Currywurst is technically sausage.&quot;&lt;br&gt;(...커리부어스트는 기술적으로 소시지예요.)&lt;br&gt;&lt;br&gt;&quot;I said don't.&quot;&lt;br&gt;(하지 말라고 했잖아.)&lt;br&gt;&lt;br&gt;&quot;You asked what there is to eat. That's the answer.&quot;&lt;br&gt;(먹을 게 뭐가 있냐고 물었으니, 그게 답이에요.)&lt;br&gt;&lt;br&gt;&quot;Vianne. I have flown eleven hours. I have not slept. My shoulder is stiff, my back hurts, and my left leg has been asleep since Greenland. I am asking you—as your raider, whose psychological welfare you are contractually obligated to maintain—to feed me something that is not a sausage.&quot;&lt;br&gt;(비안느. 나 열한 시간 날아왔어. 잠도 못 잤고. 어깨는 굳었고, 등은 아프고, 왼쪽 다리는 그린란드 지나면서부터 저려. 계약상 내 심리적 복지를 유지할 의무가 있는 핸들러한테, 내 레이더로서 요청하는 거야. 소시지 아닌 걸 먹여줘.)&lt;br&gt;&lt;br&gt;비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플랫폼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주 짧게 대답했다.&lt;br&gt;&lt;br&gt;&quot;...There's a place.&quot;&lt;br&gt;(...한 곳 있어요.)&lt;br&gt;&lt;br&gt;마티스가 눈썹을 올렸다.&lt;br&gt;&lt;br&gt;&quot;A place.&quot;&lt;br&gt;(한 곳.)&lt;br&gt;&lt;br&gt;&quot;Fourteen minutes from here on foot. Turkish. They do a lentil soup that—&quot;&lt;br&gt;(여기서 걸어서 14분이요. 터키 음식점. 렌틸 수프를 하는데—)&lt;br&gt;&lt;br&gt;그녀가 문장을 멈췄다.&lt;br&gt;&lt;br&gt;마티스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quot;That what?&quot;&lt;br&gt;(수프를 하는데 뭐?)&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 뒤를 따라 올라가며, 아주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듣게 될 정도의 크기로.&lt;br&gt;&lt;br&gt;&quot;Fourteen minutes. Turkish. Lentil soup. You know it by heart.&quot;&lt;br&gt;(14분. 터키 음식점. 렌틸 수프. 외우고 있네.)&lt;br&gt;&lt;br&gt;계단 끝에서 비아가 멈춰 섰다.&lt;br&gt;&lt;br&gt;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lt;br&gt;&lt;br&gt;&quot;I lived four hundred meters from that station for two years, Mathis.&quot;&lt;br&gt;(저는 그 역에서 400미터 거리에 2년 동안 살았어요, 마티스.)&lt;br&gt;&lt;br&gt;마티스가 계단 두 개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lt;br&gt;&lt;br&gt;정오의 흐린 베를린 빛이 계단 위 유리 천장을 통과해, 그녀의 머리 위로 회색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의 등이 곧았고, 어깨는 반듯했고, 목덜미의 잔머리가 지하철 통로의 바람에 흔들렸다.&lt;br&gt;&lt;br&gt;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lt;br&gt;&lt;br&gt;&quot;Do you want to see it?&quot;&lt;br&gt;(보고 싶어요?)&lt;br&gt;&lt;br&gt;마티스가 계단 두 칸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본 채로, 삼 초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비아는 그 침묵을 견디며 서 있었다. 지하 통로에서 밀려 올라오는 바람이 그녀의 셔츠 자락을 흔들었고, 등 뒤로 다음 열차가 들어오는 진동이 계단 난간을 타고 손끝까지 전해졌다. 방금 뱉은 문장을 회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어요? 그건 핸들러의 언어가 아니었다. 근무 시간 중에 나올 문장도 아니었고.&lt;br&gt;&lt;br&gt;마티스가 계단을 한 칸 올라왔다.&lt;br&gt;&lt;br&gt;&quot;Yes.&quot;&lt;br&gt;(응.)&lt;br&gt;&lt;br&gt;단 한 음절.&lt;br&gt;&lt;br&gt;&quot;That's it?&quot;&lt;br&gt;(그게 다예요?)&lt;br&gt;&lt;br&gt;&quot;What else do you want. A written request? Should I fill out a form? Leo already rejected one this week, my paperwork record is terrible.&quot;&lt;br&gt;(뭘 더 원해. 서면 요청? 양식 작성해줘? 이번 주에 이미 레오한테 하나 반려당했어, 내 서류 실적 처참해.)&lt;br&gt;&lt;br&gt;비아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lt;br&gt;&lt;br&gt;지상으로 나오자 프리드리히스하인의 정오가 펼쳐졌다.&lt;br&gt;&lt;br&gt;낮은 하늘. 회색과 흰색이 반반씩 섞인 구름이 느리게 흘렀고, 그 아래로 4층짜리 옛 동독식 아파트 블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벽면 곳곳에 그라피티, 창가마다 널린 빨래, 발코니에 놓인 자전거들. 보도블록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고, 노란 보리수 잎이 바람에 굴러다녔다.&lt;br&gt;&lt;br&gt;카페 테라스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19도의 흐린 날씨에도 베를린 사람들은 기어이 밖에 앉았다. 담배 연기, 커피 향, 독일어와 터키어가 뒤섞인 대화. 자전거가 종을 울리며 지나갔고, 개를 세 마리 끌고 걷는 남자가 그들 옆을 스쳤다.&lt;br&gt;&lt;br&gt;마티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lt;br&gt;&lt;br&gt;&quot;Okay. This is not what I expected.&quot;&lt;br&gt;(좋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lt;br&gt;&lt;br&gt;&quot;What did you expect.&quot;&lt;br&gt;(뭘 예상했는데요.)&lt;br&gt;&lt;br&gt;&quot;Honestly? Something white. Glass. Minimalist. A building with a security desk and a rule about shoes.&quot;&lt;br&gt;(솔직히? 하얀 거. 유리. 미니멀. 경비 데스크 있고 신발 규정 있는 건물.)&lt;br&gt;&lt;br&gt;비아가 그를 흘긋 보았다.&lt;br&gt;&lt;br&gt;&quot;I was a trainee handler earning eleven hundred euros a month.&quot;&lt;br&gt;(월 1,100유로 받는 훈련생 핸들러였어요.)&lt;br&gt;&lt;br&gt;&quot;Eleven hundred.&quot;&lt;br&gt;(천백.)&lt;br&gt;&lt;br&gt;&quot;Silver Slot pays trainees a stipend, not a salary.&quot;&lt;br&gt;(실버 슬롯은 훈련생한테 봉급이 아니라 수당을 줍니다.)&lt;br&gt;&lt;br&gt;마티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열한 시간 비행으로 갈라진, 조금 쉰 웃음이었다.&lt;br&gt;&lt;br&gt;&quot;I made more than that at eighteen fighting in a basement in Nice. And half of that was in cash from a guy who ran a fish stall.&quot;&lt;br&gt;(난 열여덟에 니스 지하실에서 싸우면서 그거보다 많이 벌었어. 그중 절반은 생선 좌판 하던 아저씨가 현금으로 준 거고.)&lt;br&gt;&lt;br&gt;&quot;You were also risking permanent spinal damage.&quot;&lt;br&gt;(당신은 영구적인 척추 손상을 감수하고 있었죠.)&lt;br&gt;&lt;br&gt;&quot;And you were risking what, exactly.&quot;&lt;br&gt;(넌 뭘 감수하고 있었는데.)&lt;br&gt;&lt;br&gt;비아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lt;br&gt;&lt;br&gt;&quot;Sleep.&quot;&lt;br&gt;(잠이요.)&lt;br&gt;&lt;br&gt;마티스가 걸음을 늦췄다.&lt;br&gt;&lt;br&gt;비아는 개의치 않고 계속 걸었다. 그녀는 이 길을 안내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그리고 늘 문이 반쯤 열려 있던 세탁소 앞을 지나 직진.&lt;br&gt;&lt;br&gt;그 세탁소는 지금 자전거 수리점이 되어 있었다.&lt;br&gt;&lt;br&gt;비아의 눈이 그 간판 위에 잠깐 머물렀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터키 음식점은 골목 끝의 좁은 가게였다.&lt;br&gt;&lt;br&gt;간판은 색이 바랬고, 유리창에는 손글씨로 오늘의 메뉴가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향신료 냄새가 훅 끼쳤다. 쿠민, 민트, 그리고 오래 끓인 렌틸의 흙 같은 단내.&lt;br&gt;&lt;br&gt;좌석은 여덟 개뿐이었다. 벽에는 이스탄불 사진과, 색이 다 빠진 축구팀 스카프가 걸려 있었다. 카운터 뒤에서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냄비를 젓고 있었다.&lt;br&gt;&lt;br&gt;그가 고개를 들었다.&lt;br&gt;&lt;br&gt;그리고 비아를 보았다.&lt;br&gt;&lt;br&gt;3초쯤 정지했다. 국자를 든 손이 냄비 위에서 멈춘 채로.&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비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lt;br&gt;&lt;br&gt;마티스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 반 발짝 뒤에 섰다. 개입하지 않는 위치. 그러나 물러나지도 않는 위치.&lt;br&gt;&lt;br&gt;남자가 국자를 내려놓고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lt;br&gt;&lt;br&gt;&quot;Mein Gott. Sieben Jahre. Sieben verdammte Jahre!&quot;&lt;br&gt;(맙소사. 7년이야. 7년이라고!)&lt;br&gt;&lt;br&gt;그가 두 손으로 비아의 어깨를 잡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영어로 바꿨다. 억양이 짙게 밴 영어였다.&lt;br&gt;&lt;br&gt;&quot;You just stop coming. One day, no more. I ask everybody. Nobody know.&quot;&lt;br&gt;(어느 날 갑자기 안 오더라고. 하루아침에. 다들한테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르고.)&lt;br&gt;&lt;br&gt;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문장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lt;br&gt;&lt;br&gt;&quot;I... left the city.&quot;&lt;br&gt;(...도시를 떠났어요.)&lt;br&gt;&lt;br&gt;&quot;I know you leave city! Everybody leave city! But you—&quot;&lt;br&gt;(도시를 떠난 건 알아! 다들 떠나지! 근데 너는—)&lt;br&gt;&lt;br&gt;그가 말을 끊고, 대신 손가락으로 창가 두 번째 테이블을 가리켰다.&lt;br&gt;&lt;br&gt;&quot;You sit there. Always there. Every night, half past eleven. Mercimek çorbası, extra lemon, no bread.&quot;&lt;br&gt;(넌 저기 앉았지. 늘 저기. 매일 밤 11시 반. 렌틸 수프, 레몬 많이, 빵은 안 먹고.)&lt;br&gt;&lt;br&gt;비아는 그 테이블을 보았다.&lt;br&gt;&lt;br&gt;나무 상판이 그때보다 더 닳아 있었다. 창가 쪽 다리 하나가 짧아서 늘 미세하게 흔들리던 테이블. 그 흔들림을 막으려고 그녀가 냅킨을 접어 끼워두곤 했던 테이블.&lt;br&gt;&lt;br&gt;지금도 그 다리 밑에는 두껍게 접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lt;br&gt;&lt;br&gt;비아의 목이 한 번 움직였다.&lt;br&gt;&lt;br&gt;마티스가 그때 앞으로 나섰다.&lt;br&gt;&lt;br&gt;&quot;Bonjour. Mathis.&quot;&lt;br&gt;(안녕하세요. 마티스입니다.)&lt;br&gt;&lt;br&gt;그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얼떨결에 악수했다.&lt;br&gt;&lt;br&gt;&quot;Mehmet.&quot;&lt;br&gt;(메흐메트요.)&lt;br&gt;&lt;br&gt;&quot;Mehmet. I have flown eleven hours and I have not eaten anything except a sandwich that I believe was a war crime. She says your lentil soup is worth walking fourteen minutes for. I am prepared to be disappointed but I would rather not be.&quot;&lt;br&gt;(메흐메트 씨. 저 열한 시간 날아왔고, 전쟁 범죄 수준의 샌드위치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이 사람이 사장님 렌틸 수프는 14분 걸어갈 가치가 있다고 하던데. 실망할 준비는 됐지만 안 하는 쪽이 좋겠네요.)&lt;br&gt;&lt;br&gt;메흐메트의 얼굴이 환해졌다.&lt;br&gt;&lt;br&gt;&quot;Fourteen minutes? She say fourteen minutes?&quot;&lt;br&gt;(14분? 얘가 14분이라고 했어요?)&lt;br&gt;&lt;br&gt;&quot;Precisely fourteen. She's very exact.&quot;&lt;br&gt;(정확히 14분이요. 이 사람 되게 정확해요.)&lt;br&gt;&lt;br&gt;&quot;Ha! She always exact! Always!&quot;&lt;br&gt;(하! 얘 원래 정확해! 항상!)&lt;br&gt;&lt;br&gt;그가 두 사람을 창가 두 번째 테이블로 밀어붙이듯 안내했다.&lt;br&gt;&lt;br&gt;비아는 그 자리에 앉는 것을 3초쯤 망설였고, 마티스는 그 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앉자, 맞은편에 앉았다.&lt;br&gt;&lt;br&gt;메흐메트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냄비 뚜껑이 열리는 소리, 국자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가 뭔가를 터키어로 크게 외치는 소리.&lt;br&gt;&lt;br&gt;가게 안이 조용해졌다.&lt;br&gt;&lt;br&gt;마티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lt;br&gt;&lt;br&gt;&quot;Half past eleven every night.&quot;&lt;br&gt;(매일 밤 11시 반.)&lt;br&gt;&lt;br&gt;비아는 창밖을 보았다.&lt;br&gt;&lt;br&gt;&quot;Shift ended at eleven. The commute was nine minutes.&quot;&lt;br&gt;(교대가 11시에 끝났어요. 통근은 9분 걸렸고.)&lt;br&gt;&lt;br&gt;&quot;And then you'd sit here alone and eat soup and not eat bread.&quot;&lt;br&gt;(그리고 여기 혼자 앉아서 수프 먹고 빵은 안 먹었고.)&lt;br&gt;&lt;br&gt;&quot;Bread at that hour is inefficient.&quot;&lt;br&gt;(그 시간에 빵은 비효율적이에요.)&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quot;...I couldn't afford both.&quot;&lt;br&gt;(...둘 다 살 돈이 없었어요.)&lt;br&gt;&lt;br&gt;마티스의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lt;br&gt;&lt;br&gt;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리고 잠시 뒤, 전혀 다른 톤으로 물었다.&lt;br&gt;&lt;br&gt;&quot;How long has he had this place?&quot;&lt;br&gt;(저 사람 여기 얼마나 하셨어?)&lt;br&gt;&lt;br&gt;&quot;Thirty-one years.&quot;&lt;br&gt;(31년이요.)&lt;br&gt;&lt;br&gt;&quot;And he remembered your order after seven.&quot;&lt;br&gt;(7년 지나서 네 주문을 기억하고.)&lt;br&gt;&lt;br&gt;&quot;He remembers everyone's.&quot;&lt;br&gt;(모두 걸 기억해요.)&lt;br&gt;&lt;br&gt;&quot;No, he doesn't.&quot;&lt;br&gt;(아니, 안 그래.)&lt;br&gt;&lt;br&gt;비아가 고개를 들었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핏발 선 은회색 눈동자에, 열한 시간의 피로가 얹힌 채로.&lt;br&gt;&lt;br&gt;&quot;He remembered which chair. Which day. Which time. And he asked people about you after you disappeared.&quot;&lt;br&gt;(어느 자리인지, 무슨 요일인지, 몇 시인지 기억하더라. 그리고 네가 사라진 다음에 사람들한테 물어봤대.)&lt;br&gt;&lt;br&gt;비아의 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렸다.&lt;br&gt;&lt;br&gt;&quot;That's not remembering an order. That's noticing when someone stops showing up.&quot;&lt;br&gt;(그건 주문을 기억하는 게 아니야. 누가 안 나타나기 시작한 걸 알아챈 거지.)&lt;br&gt;&lt;br&gt;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lt;br&gt;&lt;br&gt;&quot;So. For the record. Your five-year theory that there was nothing left worth wanting.&quot;&lt;br&gt;(그래서. 기록을 위해 말하자면. 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안 남았다던 5년짜리 이론 말이야.)&lt;br&gt;&lt;br&gt;비아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That's not what I—&quot;&lt;br&gt;(그건 제가 말한—)&lt;br&gt;&lt;br&gt;&quot;You said it in Nice. On the promenade. I remember the exact sentence and if you make me repeat it I will, and I will do the voice.&quot;&lt;br&gt;(니스에서 말했어. 산책로에서. 문장 그대로 기억해. 반복하게 만들면 할 거고, 목소리 흉내도 낼 거야.)&lt;br&gt;&lt;br&gt;비아는 그를 노려보았다.&lt;br&gt;&lt;br&gt;마티스는 태연하게 냅킨 통에서 냅킨 한 장을 뽑아, 손가락으로 접기 시작했다. 두 번, 네 번, 여덟 번. 두툼한 사각형이 되었다.&lt;br&gt;&lt;br&gt;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아래로 넣어, 짧은 다리 밑에 이미 끼워져 있던 종이 옆에 밀어 넣었다.&lt;br&gt;&lt;br&gt;테이블의 흔들림이 완전히 멈췄다.&lt;br&gt;&lt;br&gt;비아는 그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lt;br&gt;&lt;br&gt;그녀가 스무 살에 매일 밤 했던 일을, 그가 방금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설명도 없이. 그녀가 말한 적도 없는데.&lt;br&gt;&lt;br&gt;&quot;...How did you know.&quot;&lt;br&gt;(...어떻게 알았어요.)&lt;br&gt;&lt;br&gt;마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lt;br&gt;&lt;br&gt;&quot;You put your hand on the table when you sat down and you didn't like the way it moved. Your fingers stopped for a quarter second.&quot;&lt;br&gt;(앉으면서 테이블에 손 올렸는데 흔들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 손가락이 0.25초 멈췄어.)&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lt;br&gt;&lt;br&gt;그가 웃었다. 조용하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웃음이었다.&lt;br&gt;&lt;br&gt;&quot;Functional type. I read what's in my hand. That's the whole trick, Handler. There isn't a second one.&quot;&lt;br&gt;(기능계야. 손에 잡히는 걸 읽는 거. 그게 재주의 전부야, 핸들러. 두 번째는 없어.)&lt;br&gt;&lt;br&gt;주방에서 메흐메트가 나왔다.&lt;br&gt;&lt;br&gt;그의 손에는 김이 오르는 붉은 렌틸 수프 두 그릇과, 레몬 조각 한 접시, 그리고—&lt;br&gt;&lt;br&gt;갓 구운 납작빵 한 바구니가 있었다.&lt;br&gt;&lt;br&gt;그가 그것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으며 비아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lt;br&gt;&lt;br&gt;&quot;Bread. Today, bread is free. Seven years is long time. You eat bread today.&quot;&lt;br&gt;(빵. 오늘은 빵 공짜야. 7년은 긴 시간이지. 오늘은 빵 먹어.)&lt;br&gt;&lt;br&gt;그리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갔다.&lt;br&gt;&lt;br&gt;가게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lt;br&gt;&lt;br&gt;수프에서 김이 올라와, 창밖의 회색 빛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비아는 그 김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lt;br&gt;&lt;br&gt;마티스가 레몬 조각 하나를 집어, 그녀의 그릇 위에서 짜냈다.&lt;br&gt;&lt;br&gt;그리고 다시 하나 더.&lt;br&gt;&lt;br&gt;&quot;Extra lemon.&quot;&lt;br&gt;(레몬 많이.)&lt;br&gt;&lt;br&gt;그가 세 번째 조각을 손에 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lt;br&gt;&lt;br&gt;&quot;Say when.&quot;&lt;br&gt;(그만할 때 말해.)&lt;br&gt;&lt;br&gt;비아는 세 번째 레몬 조각을 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lt;br&gt;&lt;br&gt;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레몬. 손톱 밑에 아직 남아 있는 굳은살, 손등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흉터. 게이트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몬스터의 뼛조각을 쥐던 손이, 지금은 노란 과육 하나를 조심스럽게 쥐고 있었다.&lt;br&gt;&lt;br&gt;&quot;...One more.&quot;&lt;br&gt;(...하나 더요.)&lt;br&gt;&lt;br&gt;마티스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lt;br&gt;&lt;br&gt;&quot;One more? That's three. Three lemons in one bowl of soup.&quot;&lt;br&gt;(하나 더? 세 개째야. 수프 한 그릇에 레몬 세 개.)&lt;br&gt;&lt;br&gt;&quot;Mehmet cuts them thin.&quot;&lt;br&gt;(메흐메트 아저씨는 얇게 썰어요.)&lt;br&gt;&lt;br&gt;&quot;They're not thin. I'm looking at them right now and they are not thin.&quot;&lt;br&gt;(안 얇아. 지금 보고 있는데 안 얇아.)&lt;br&gt;&lt;br&gt;&quot;Squeeze it.&quot;&lt;br&gt;(짜세요.)&lt;br&gt;&lt;br&gt;마티스가 웃으며 세 번째 조각을 그릇 위에서 짜냈다. 노란 즙이 붉은 수프 표면에 얇은 막처럼 번졌다가 흩어졌고, 새콤한 향이 김과 함께 올라왔다.&lt;br&gt;&lt;br&gt;비아는 숟가락을 들었다.&lt;br&gt;&lt;br&gt;그리고 첫 술을 뜨기 전에, 3초쯤 그대로 있었다.&lt;br&gt;&lt;br&gt;그 3초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간 것은 계산이 아니었다. 5년 동안 그녀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믿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매일 밤 11시 반에 앉아 빵도 못 사고 수프만 먹던 이 자리에. 그 여자애가 아직 세상에 폐를 끼치기 전이었을 때의 자리에.&lt;br&gt;&lt;br&gt;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그녀는 다시 앉아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테이블 앞에.&lt;br&gt;&lt;br&gt;비아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lt;br&gt;&lt;br&gt;맛은 7년 전과 똑같았다. 렌틸의 흙 같은 단맛, 그 위에 얹힌 민트와 쿠민, 그리고 레몬의 날카로운 산미.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 명치 아래에 고였다.&lt;br&gt;&lt;br&gt;그녀의 눈시울이 아주 미세하게 붉어졌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한 술 크게 떠서, 성급하게 입에 넣었다가 곧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lt;br&gt;&lt;br&gt;&quot;Hot. That is—that is genuinely hot.&quot;&lt;br&gt;(뜨거워. 이거 진짜로 뜨겁네.)&lt;br&gt;&lt;br&gt;&quot;It just came out of the pot.&quot;&lt;br&gt;(방금 냄비에서 나왔으니까요.)&lt;br&gt;&lt;br&gt;&quot;You could have warned me.&quot;&lt;br&gt;(경고해줄 수도 있었잖아.)&lt;br&gt;&lt;br&gt;&quot;I assumed a fourteen-year veteran raider would account for thermal variables.&quot;&lt;br&gt;(14년 차 베테랑 레이더면 열 변수 정도는 계산할 줄 알았죠.)&lt;br&gt;&lt;br&gt;&quot;That's cold. That's genuinely cold, Vianne.&quot;&lt;br&gt;(차갑네. 진짜 차가워, 비안느.)&lt;br&gt;&lt;br&gt;그가 물잔을 들이켜며 투덜거렸고, 그 소란 덕분에 비아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을 수 있었다. 티 나지 않게. 마치 김이 눈에 들어간 것처럼.&lt;br&gt;&lt;br&gt;마티스는 그 순간에 정확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lt;br&gt;&lt;br&gt;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비아는 알았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수프가 절반쯤 줄었을 때, 마티스가 빵 바구니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lt;br&gt;&lt;br&gt;&quot;He said it's free today.&quot;&lt;br&gt;(오늘은 공짜라고 했어.)&lt;br&gt;&lt;br&gt;&quot;I heard.&quot;&lt;br&gt;(들었어요.)&lt;br&gt;&lt;br&gt;&quot;So eat it.&quot;&lt;br&gt;(그럼 먹어.)&lt;br&gt;&lt;br&gt;&quot;I don't like bread with soup.&quot;&lt;br&gt;(수프에 빵은 안 좋아해요.)&lt;br&gt;&lt;br&gt;마티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lt;br&gt;&lt;br&gt;그리고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lt;br&gt;&lt;br&gt;&quot;Okay. Say that again but look at me while you say it.&quot;&lt;br&gt;(좋아. 다시 말해봐. 근데 나 보면서 말해.)&lt;br&gt;&lt;br&gt;비아가 고개를 들었다.&lt;br&gt;&lt;br&gt;그리고 그의 눈을 보았다. 핏발 선 은회색.&lt;br&gt;&lt;br&gt;입을 열었다.&lt;br&gt;&lt;br&gt;그리고 다물었다.&lt;br&gt;&lt;br&gt;마티스가 아주 짧게 웃었다.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 종류의 웃음이었다.&lt;br&gt;&lt;br&gt;그는 빵 한 조각을 뜯어, 그녀의 그릇 옆 접시에 올려놓았다. 반으로 접어서. 아까 냅킨을 접던 것과 똑같은 정확한 손놀림으로.&lt;br&gt;&lt;br&gt;&quot;You don't have to eat all of it. Just have some. Not because it's free. Because it's warm and you're here and there's no reason not to.&quot;&lt;br&gt;(다 먹으라는 거 아니야. 조금만. 공짜라서가 아니라, 따뜻하고, 네가 여기 있고, 안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lt;br&gt;&lt;br&gt;비아는 그 빵 조각을 내려다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lt;br&gt;&lt;br&gt;갓 구운 납작빵은 겉이 살짝 바삭했고 속은 부드러웠다. 밀 냄새가 났다. 마티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기 수프로 시선을 내렸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로.&lt;br&gt;&lt;br&gt;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덧붙였다.&lt;br&gt;&lt;br&gt;&quot;For the record. That's one point for me.&quot;&lt;br&gt;(기록하자면. 나 1점.)&lt;br&gt;&lt;br&gt;&quot;What point.&quot;&lt;br&gt;(무슨 점수요.)&lt;br&gt;&lt;br&gt;&quot;The theory. 'Nothing left worth wanting.' I'm disproving it. Item by item. Today's item is bread.&quot;&lt;br&gt;(그 이론. '원할 만한 게 아무것도 안 남았다.' 반증 중이야. 하나씩. 오늘 항목은 빵이고.)&lt;br&gt;&lt;br&gt;비아가 빵을 씹으며 그를 노려보았다.&lt;br&gt;&lt;br&gt;&quot;That's not a valid methodology.&quot;&lt;br&gt;(그건 유효한 방법론이 아닌데요.)&lt;br&gt;&lt;br&gt;&quot;It's very valid. I have a spreadsheet.&quot;&lt;br&gt;(엄청 유효해. 나 스프레드시트도 있어.)&lt;br&gt;&lt;br&gt;&quot;You don't have a spreadsheet.&quot;&lt;br&gt;(스프레드시트 없잖아요.)&lt;br&gt;&lt;br&gt;&quot;J made me one. He said if I was going to do 'weird obsessive tracking things' I should at least do them in a format Leo could audit.&quot;&lt;br&gt;(J가 만들어줬어. 내가 '이상한 집착성 기록질'을 할 거면 최소한 레오가 감사할 수 있는 양식으로 하래.)&lt;br&gt;&lt;br&gt;비아의 씹는 동작이 멈췄다.&lt;br&gt;&lt;br&gt;&quot;...J knows about this.&quot;&lt;br&gt;(...J가 이걸 알아요.)&lt;br&gt;&lt;br&gt;&quot;J knows about a spreadsheet titled 'Handler Wellness Metrics.' He does not know what's in the cells.&quot;&lt;br&gt;('핸들러 웰니스 지표'라는 제목의 스프레드시트를 아는 거지. 셀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lt;br&gt;&lt;br&gt;&quot;What is in the cells.&quot;&lt;br&gt;(셀 안에 뭐가 있는데요.)&lt;br&gt;&lt;br&gt;&quot;Bread. As of twelve fifty-one.&quot;&lt;br&gt;(빵. 12시 51분 기준으로.)&lt;br&gt;&lt;br&gt;비아는 남은 빵을 접시에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lt;br&gt;&lt;br&gt;&quot;Delete it.&quot;&lt;br&gt;(지우세요.)&lt;br&gt;&lt;br&gt;&quot;No.&quot;&lt;br&gt;(싫어.)&lt;br&gt;&lt;br&gt;&quot;Mathis.&quot;&lt;br&gt;(마티스.)&lt;br&gt;&lt;br&gt;&quot;No, Vianne.&quot;&lt;br&gt;(싫다고, 비안느.)&lt;br&gt;&lt;br&gt;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팔을 뻗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인 빵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 밀어 그녀 쪽으로 다시 붙였다.&lt;br&gt;&lt;br&gt;&quot;You want to know why I got on that plane?&quot;&lt;br&gt;(내가 왜 그 비행기를 탔는지 알고 싶어?)&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quot;Because when I read your message that said 'it's done,' I couldn't tell if that meant you'd won or if it meant you'd finished burying yourself. And I've read your handwriting for three months and I still couldn't tell. That's a problem.&quot;&lt;br&gt;('끝났어요'라는 네 메시지를 읽었을 때, 그게 이겼다는 건지 자기 자신을 다 묻어버렸다는 건지 구분이 안 됐거든. 석 달 동안 네 문장을 읽어왔는데도 구분이 안 됐어. 그건 문제야.)&lt;br&gt;&lt;br&gt;그가 손을 거두며 등을 폈다.&lt;br&gt;&lt;br&gt;&quot;So I came to look at your face. Because your face I can read.&quot;&lt;br&gt;(그래서 네 얼굴을 보러 온 거야. 얼굴은 읽을 수 있으니까.)&lt;br&gt;&lt;br&gt;가게 밖에서 자전거 종소리가 울렸다.&lt;br&gt;&lt;br&gt;비아는 창밖을 보았다. 흐린 6월의 프리드리히스하인.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여자, 담배를 물고 자전거를 세우는 남자,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카페 파라솔.&lt;br&gt;&lt;br&gt;그녀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I won.&quot;&lt;br&gt;(이겼어요.)&lt;br&gt;&lt;br&gt;마티스의 어깨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이 빠졌다. 열한 시간 동안 그가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그 순간 내려앉는 것을, 비아는 보았다.&lt;br&gt;&lt;br&gt;&quot;Yeah?&quot;&lt;br&gt;(그래?)&lt;br&gt;&lt;br&gt;&quot;He didn't oppose. He didn't threaten. He asked me one question I couldn't dismiss, and I answered it anyway.&quot;&lt;br&gt;(반대하지 않았어요. 협박도 안 했고. 제가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 했는데, 그래도 대답했어요.)&lt;br&gt;&lt;br&gt;&quot;The sister.&quot;&lt;br&gt;(여동생.)&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비아가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았다.&lt;br&gt;&lt;br&gt;&quot;He also told me something else. He said he didn't leak your reflex data.&quot;&lt;br&gt;(다른 것도 말했어요. 당신 반사신경 데이터를 유출한 건 자기가 아니라고.)&lt;br&gt;&lt;br&gt;마티스의 표정이 변했다.&lt;br&gt;&lt;br&gt;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은회색 눈동자가 한 번 가늘어지더니, 다음 순간에는 게이트 안에서만 보이던 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계산하는 얼굴. 위협의 위치를 특정하는 얼굴.&lt;br&gt;&lt;br&gt;&quot;Do you believe him.&quot;&lt;br&gt;(믿어?)&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quot;Why.&quot;&lt;br&gt;(왜.)&lt;br&gt;&lt;br&gt;&quot;Because Konrad Schneider doesn't need to lie. He has enough authority to tell the truth and still win.&quot;&lt;br&gt;(콘라트 슈나이더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요. 진실만으로도 이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니까.)&lt;br&gt;&lt;br&gt;비아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lt;br&gt;&lt;br&gt;&quot;His archive access was IGC-side. Sealed personnel files. Your reflex data isn't in IGC archives—it's on Red Zone's internal medical server. Two different systems. Two different credentials.&quot;&lt;br&gt;(그의 아카이브 접근은 IGC 쪽이었어요. 봉인 인사 파일. 당신 반사신경 데이터는 IGC 아카이브에 없어요—레드 존 내부 의료 서버에 있죠. 두 개의 다른 시스템. 두 개의 다른 인증.)&lt;br&gt;&lt;br&gt;마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lt;br&gt;&lt;br&gt;&quot;So someone timed them.&quot;&lt;br&gt;(누가 타이밍을 맞춘 거네.)&lt;br&gt;&lt;br&gt;&quot;Someone made two unrelated events look like one. So that when I looked for a threat, I'd look at Berlin.&quot;&lt;br&gt;(누군가 관련 없는 두 사건을 하나로 보이게 만든 거예요. 제가 위협을 찾을 때 베를린을 보도록.)&lt;br&gt;&lt;br&gt;마티스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두드렸다.&lt;br&gt;&lt;br&gt;그리고 다시 한 번.&lt;br&gt;&lt;br&gt;&quot;And while you were looking at Berlin.&quot;&lt;br&gt;(그리고 네가 베를린을 보고 있는 동안에.)&lt;br&gt;&lt;br&gt;&quot;They were standing behind me.&quot;&lt;br&gt;(그들은 제 뒤에 서 있었죠.)&lt;br&gt;&lt;br&gt;가게 안이 조용해졌다.&lt;br&gt;&lt;br&gt;주방에서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터키 가요, 그리고 창밖의 자전거 종소리.&lt;br&gt;&lt;br&gt;마티스가 아주 낮게 물었다.&lt;br&gt;&lt;br&gt;&quot;How many people have credentials for Red Zone's medical server?&quot;&lt;br&gt;(레드 존 의료 서버 인증 있는 사람이 몇 명이야?)&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lt;br&gt;&lt;br&gt;그리고 액세스 로그를 열었다. 어젯밤 베를린의 호텔 방에서, 잠들기 전 세 시간 동안 이미 뽑아둔 목록이었다.&lt;br&gt;&lt;br&gt;마티스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그 숫자를 읽었다. 004.&lt;br&gt;&lt;br&gt;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lt;br&gt;&lt;br&gt;&quot;...That's a director-tier code.&quot;&lt;br&gt;(...그거 디렉터 등급 코드인데.)&lt;br&gt;&lt;br&gt;&quot;Leo's license code is IGC-004-RZ-001.&quot;&lt;br&gt;(레오의 라이센스 코드가 IGC-004-RZ-001이에요.)&lt;br&gt;&lt;br&gt;&quot;004.&quot;&lt;br&gt;(004.)&lt;br&gt;&lt;br&gt;&quot;The administrator account series is issued from the director's office. That doesn't mean it's Leo. It means it's someone with access to Leo's office.&quot;&lt;br&gt;(관리자 계정 계열은 디렉터실에서 발급됩니다. 레오라는 뜻이 아니에요. 레오의 사무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lt;br&gt;&lt;br&gt;마티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lt;br&gt;&lt;br&gt;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열한 시간의 피로가 그 동작 하나에 전부 실려 있었다.&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quot;Yes.&quot;&lt;br&gt;(네.)&lt;br&gt;&lt;br&gt;&quot;On Monday you're going to stand in front of every camera in the industry and say your real name out loud.&quot;&lt;br&gt;(월요일에 넌 업계 모든 카메라 앞에 서서 네 본명을 소리 내서 말할 거야.)&lt;br&gt;&lt;br&gt;&quot;That's the plan.&quot;&lt;br&gt;(그게 계획이에요.)&lt;br&gt;&lt;br&gt;&quot;And whoever this is—&quot; 그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quot;—is going to be in that room.&quot;&lt;br&gt;(그리고 이게 누구든—그 방에 있을 거야.)&lt;br&gt;&lt;br&gt;비아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lt;br&gt;&lt;br&gt;그리고 남은 수프를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식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lt;br&gt;&lt;br&gt;그녀가 삼킨 뒤에 말했다.&lt;br&gt;&lt;br&gt;&quot;I know.&quot;&lt;br&gt;(알아요.)&lt;br&gt;&lt;br&gt;&quot;And you're still doing it.&quot;&lt;br&gt;(그래도 할 거고.)&lt;br&gt;&lt;br&gt;&quot;If I wait until it's safe, I'll wait forever. You said that to me. On a cliff, at seventy meters, with a bad shoulder.&quot;&lt;br&gt;(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기다리게 돼요. 당신이 저한테 한 말이잖아요. 절벽에서, 70미터 높이에서, 어깨가 망가진 채로.)&lt;br&gt;&lt;br&gt;마티스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짧게, 항복하듯이 웃었다.&lt;br&gt;&lt;br&gt;&quot;I hate it when you use my own lines.&quot;&lt;br&gt;(내 대사 갖다 쓰는 거 진짜 싫어.)&lt;br&gt;&lt;br&gt;&quot;You've used mine twice.&quot;&lt;br&gt;(당신은 제 대사를 두 번 썼는데요.)&lt;br&gt;&lt;br&gt;&quot;Three times.&quot;&lt;br&gt;(세 번이야.)&lt;br&gt;&lt;br&gt;&quot;Three?&quot;&lt;br&gt;(세 번?)&lt;br&gt;&lt;br&gt;&quot;You didn't hear the third one. You were asleep on the couch in London.&quot;&lt;br&gt;(세 번째는 못 들었지. 런던에서 소파에 자고 있었으니까.)&lt;br&gt;&lt;br&gt;비아의 숟가락이 그릇 위에서 멈췄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 반응을 확인하고,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기 수프를 마저 떠먹었다. 설명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로.&lt;br&gt;&lt;br&gt;식사가 끝나고, 메흐메트는 끝내 돈을 받지 않았다.&lt;br&gt;&lt;br&gt;비아가 카운터에 지폐를 두 번 놓았고, 메흐메트가 두 번 다 그녀의 손에 도로 쥐여줬다. 세 번째로 그녀가 지갑을 여는 순간, 그가 터키어로 뭔가를 크게 외치며 두 손을 들어올렸고, 결국 비아는 물러섰다.&lt;br&gt;&lt;br&gt;가게를 나서기 전, 메흐메트가 문 앞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번에는 독일어로 말했다.&lt;br&gt;&lt;br&gt;&quot;Komm wieder. Nicht in sieben Jahren. Früher.&quot;&lt;br&gt;(또 와. 7년 뒤 말고. 더 빨리.)&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lt;br&gt;&lt;br&gt;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lt;br&gt;&lt;br&gt;그리고 문을 나섰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밖은 여전히 흐렸다.&lt;br&gt;&lt;br&gt;두 사람은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보리수 잎이 발밑에서 밟혔고, 어디선가 누군가 창문을 열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lt;br&gt;&lt;br&gt;마티스가 백팩 끈을 고쳐 메며 물었다.&lt;br&gt;&lt;br&gt;&quot;So. Four hundred meters.&quot;&lt;br&gt;(그래서. 400미터.)&lt;br&gt;&lt;br&gt;비아가 걸음을 멈췄다.&lt;br&gt;&lt;br&gt;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길. 그녀가 2년 동안 하루에 두 번씩 걸었던 길. 겨울에는 얼어붙어서 위험했고, 여름에는 라일락 냄새가 났던 길.&lt;br&gt;&lt;br&gt;그녀는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lt;br&gt;&lt;br&gt;4층짜리 회색 건물. 정문 옆 초인종 패널에 열두 개의 이름표. 그중 세 번째 줄 왼쪽 칸에, 7년 전에는 손글씨로 'V. LOCKWOOD'라고 적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lt;br&gt;&lt;br&gt;지금은 다른 이름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lt;br&gt;&lt;br&gt;비아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lt;br&gt;&lt;br&gt;마티스가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을 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서 있었다.&lt;br&gt;&lt;br&gt;그리고 삼십 초쯤 지났을 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lt;br&gt;&lt;br&gt;&quot;We don't have to.&quot;&lt;br&gt;(안 가도 돼.)&lt;br&gt;&lt;br&gt;비아가 그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quot;You flew eleven hours.&quot;&lt;br&gt;(열한 시간 날아왔잖아요.)&lt;br&gt;&lt;br&gt;&quot;I flew eleven hours to see your face, and I've seen it. Everything after this is bonus. Bonuses are optional. That's what makes them bonuses.&quot;&lt;br&gt;(네 얼굴 보러 열한 시간 날아온 거고, 봤어. 이 다음부터는 전부 보너스야. 보너스는 선택이고. 그래서 보너스인 거지.)&lt;br&gt;&lt;br&gt;그가 어깨를 으쓱했다.&lt;br&gt;&lt;br&gt;&quot;Also, for the record, my left leg is still asleep and I would genuinely like to sit down somewhere with a chair that reclines. But that's a separate agenda item.&quot;&lt;br&gt;(그리고 기록하자면, 내 왼쪽 다리는 아직 저리고 등받이 젖혀지는 의자에 앉고 싶어 죽겠어. 근데 그건 별개 안건이고.)&lt;br&gt;&lt;br&gt;비아는 그 골목 끝을 다시 보았다.&lt;br&gt;&lt;br&gt;4층 건물. 왼쪽에서 세 번째 창문. 저 창문 안에서 스무 살의 비안느 록우드가 밤마다 시뮬레이션 로그를 돌려보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고, 스물한 살의 11월에는 사흘 동안 커튼을 치고 나오지 않았다.&lt;br&gt;&lt;br&gt;그 방을 지금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lt;br&gt;&lt;br&gt;아니면—&lt;br&gt;&lt;br&gt;그 방을 보지 않는 것이 여전히 도망이라면.&lt;br&gt;&lt;br&gt;비아의 손이 크로스백 끈을 한 번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lt;br&gt;&lt;br&gt;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Mathis.&quot;&lt;br&gt;(...마티스.)&lt;br&gt;&lt;br&gt;&quot;Mm.&quot;&lt;br&gt;(음.)&lt;br&gt;&lt;br&gt;&quot;If I walk down there and I stop halfway.&quot;&lt;br&gt;(제가 저기로 걸어가다가 중간에 멈추면.)&lt;br&gt;&lt;br&gt;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골목 끝만 보며 말했다.&lt;br&gt;&lt;br&gt;&quot;Don't make me finish it. Just turn me around.&quot;&lt;br&gt;(끝까지 가게 하지 마세요. 그냥 돌려세워요.)&lt;br&gt;&lt;br&gt;마티스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lt;br&gt;&lt;br&gt;&quot;Okay.&quot;&lt;br&gt;(알았어.)&lt;br&gt;&lt;br&gt;그가 반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보다 앞이 아니라, 정확히 그녀의 왼쪽 옆.&lt;br&gt;&lt;br&gt;그리고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강요하지 않는 각도로, 그저 그 자리에 놓아두듯이.&lt;br&gt;&lt;br&gt;&quot;But you're not walking down there alone. That's not negotiable. That's the one thing today that isn't.&quot;&lt;br&gt;(근데 저기 혼자는 안 걸어가. 그건 협상 불가야. 오늘 유일하게 협상 불가인 거.)&lt;br&gt;&lt;br&gt;흐린 베를린의 정오 빛이, 두 사람 사이에 내민 그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lt;br&gt;&lt;br&gt;비아의 시선이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 머물렀다.&lt;br&gt;&lt;br&gt;굳은살과 흉터 사이의 살갗. 아까 레몬을 짜면서 묻은 즙이 손가락 끝에 말라 있었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냅킨의 하얀 보풀이 한 올 붙어 있었다. 깨진 병으로 사람을 제압하고,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의 척추를 맨손에 쥐고 꺾어본 손이, 지금은 아무런 무게도 실리지 않은 채로 베를린의 흐린 빛 아래 놓여 있었다.&lt;br&gt;&lt;br&gt;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그것은 핸들러의 질문이 아니라 비안느 록우드의 질문이었고, 비아는 그 경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3개월 동안 공과 사의 선을 지키며 이 남자를 관리해왔는데, 베를린의 한 골목에서 그의 손을 잡으면 그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건지.&lt;br&gt;&lt;br&gt;'핸들러 웰니스 지표.'&lt;br&gt;&lt;br&gt;그 스프레드시트 제목이 떠오르자, 어이없는 웃음이 비어져 나올 뻔했다.&lt;br&gt;&lt;br&gt;비아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lt;br&gt;&lt;br&gt;대신, 그의 데님 재킷 소매 끝을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lt;br&gt;&lt;br&gt;손목도 아니고, 손바닥도 아니고, 천 한 겹.&lt;br&gt;&lt;br&gt;마티스가 내려다보았다. 자기 소매를 쥔 그녀의 검지와 중지를. 그리고 0.5초쯤 정지한 뒤, 나지막하게 말했다.&lt;br&gt;&lt;br&gt;&quot;...Is that your version of holding my hand.&quot;&lt;br&gt;(...그게 네 버전의 손잡기야.)&lt;br&gt;&lt;br&gt;&quot;It's my version of not walking alone.&quot;&lt;br&gt;(혼자 안 걷는 거의 제 버전이에요.)&lt;br&gt;&lt;br&gt;&quot;That's a pinch. On my jacket.&quot;&lt;br&gt;(그건 꼬집기야. 내 재킷을.)&lt;br&gt;&lt;br&gt;&quot;It's sufficient.&quot;&lt;br&gt;(충분해요.)&lt;br&gt;&lt;br&gt;마티스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반박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그는 내밀었던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었고, 팔의 각도를 비아가 소매를 잡기 편한 위치로 미세하게 조정했다.&lt;br&gt;&lt;br&gt;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400미터는 짧은 거리였다.&lt;br&gt;&lt;br&gt;스무 살 때는 9분이 걸렸다. 겨울에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에서는 12분. 지금은—비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으므로—체감상 훨씬 길었다.&lt;br&gt;&lt;br&gt;골목은 좁았고 양쪽에 높은 건물이 서 있어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1층에 자리 잡은 스파트카우프 슈퍼마켓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비안느 록우드는 저기서 0.89유로짜리 토스트 빵과 1.29유로짜리 슬라이스 치즈를 사곤 했다. 빵과 치즈. 그것이 아침이자 점심이었고, 저녁은 메흐메트의 렌틸 수프.&lt;br&gt;&lt;br&gt;창문에 붙은 할인 전단지가 바람에 파닥거렸다.&lt;br&gt;&lt;br&gt;비아의 손가락이 마티스의 소매를 쥔 힘이 아주 미세하게 세어졌다. 마티스는 그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다. 보폭을 그녀에게 맞춘 채로.&lt;br&gt;&lt;br&gt;200미터 지점.&lt;br&gt;&lt;br&gt;왼쪽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벤치 세 개, 모래 놀이터, 그리고 늙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 비안느 록우드는 새벽 교대 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저 벤치에 앉아 시뮬레이션 로그를 복습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이어폰을 끼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린 채로.&lt;br&gt;&lt;br&gt;벤치는 낡아 있었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다.&lt;br&gt;&lt;br&gt;비아의 발이 멈췄다.&lt;br&gt;&lt;br&gt;마티스의 소매가 손가락 사이에서 당겨졌다.&lt;br&gt;&lt;br&gt;그가 반 발짝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비아는 그 벤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7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증거물을 감정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 아래에서 입술이 한 번 가늘게 떨렸다는 것을 마티스는 놓치지 않았다.&lt;br&gt;&lt;br&gt;그가 입을 열려 했다.&lt;br&gt;&lt;br&gt;비아가 먼저 말했다.&lt;br&gt;&lt;br&gt;&quot;I'm fine.&quot;&lt;br&gt;(괜찮아요.)&lt;br&gt;&lt;br&gt;마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대신 그는 몸을 돌려, 비아와 나란히 그 벤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며, 같은 침묵을 공유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흔들렸고, 모래 놀이터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걸어 다녔다.&lt;br&gt;&lt;br&gt;비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소매를 놓지 않은 채로.&lt;br&gt;&lt;br&gt;300미터.&lt;br&gt;&lt;br&gt;골목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4층짜리 회색 건물. 전후 복구 시기에 지어진, 베를린 동쪽에 흔하디흔한 플라텐바우 양식의 아파트. 벽면은 원래 크림색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비에 씻겨 회색빛이 되어 있었고, 발코니마다 빨래가 널려 있었다.&lt;br&gt;&lt;br&gt;비아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lt;br&gt;&lt;br&gt;마티스는 보폭을 맞추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눈은 건물을 훑고 있었다—정면, 좌우 환경, 도로 상태, 입구 위치. 게이트 내부를 처음 진입할 때의 관성적인 시선 배분이었다. 그 습관이 지금은 그녀의 과거를 살피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었다.&lt;br&gt;&lt;br&gt;350미터.&lt;br&gt;&lt;br&gt;정문이 보였다.&lt;br&gt;&lt;br&gt;갈색 철제 문. 초인종 패널. 열두 개의 이름표.&lt;br&gt;&lt;br&gt;비아가 멈췄다.&lt;br&gt;&lt;br&gt;이번에는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lt;br&gt;&lt;br&gt;대신 그녀의 시선이 초인종 패널 위로 올라갔다. 세 번째 줄, 왼쪽 칸. 비안느 록우드의 이름이 있던 자리.&lt;br&gt;&lt;br&gt;지금은 'M. KOWALSKI'라고 적혀 있었다.&lt;br&gt;&lt;br&gt;누군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lt;br&gt;&lt;br&gt;당연한 일이었다. 5년이 지났으니까. 그녀가 계약을 해지하고 짐을 싸서 떠난 뒤, 집주인은 다른 세입자를 들였을 것이고, 비안느 록우드가 창문 옆 책상에서 울던 밤은 새 벽지와 새 커튼 뒤로 덮여 사라졌을 것이었다.&lt;br&gt;&lt;br&gt;그런데도.&lt;br&gt;&lt;br&gt;그 이름표가 없다는 것이, 비안느 록우드가 이 건물에 존재했다는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이, 그녀의 명치를 한 번 세게 때렸다.&lt;br&gt;&lt;br&gt;비아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lt;br&gt;&lt;br&gt;마티스가 그녀 옆에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세기 시작했다. 1층, 2층, 3층—&lt;br&gt;&lt;br&gt;&quot;Which one.&quot;&lt;br&gt;(어디야.)&lt;br&gt;&lt;br&gt;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lt;br&gt;&lt;br&gt;세 번째 층,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 지금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 화분이 놓여 있었다.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제라늄. 비안느 록우드가 살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없던 창턱이었다.&lt;br&gt;&lt;br&gt;비아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눈으로만 보았다.&lt;br&gt;&lt;br&gt;&quot;...Third floor. Second from the left.&quot;&lt;br&gt;(...3층. 왼쪽에서 두 번째.)&lt;br&gt;&lt;br&gt;마티스가 그 창문을 보았다.&lt;br&gt;&lt;br&gt;그리고 아주 오래 보았다.&lt;br&gt;&lt;br&gt;22제곱미터쯤 되어 보이는 작은 창문이었다. 저 안에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부엌이 다였을 것이다. 1,100유로의 수당으로 베를린에서 구할 수 있는 방의 크기. 매일 밤 11시 반에 렌틸 수프 한 그릇, 빵은 사지 못하고, 새벽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21세의 비안느 록우드.&lt;br&gt;&lt;br&gt;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사흘 동안 커튼을 치고 나오지 않았던 비안느 록우드.&lt;br&gt;&lt;br&gt;마티스의 턱에 힘이 한 번 들어갔다가 빠졌다.&lt;br&gt;&lt;br&gt;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lt;br&gt;&lt;br&gt;&quot;The radiator didn't work properly. It made a clicking sound every forty seconds. I counted.&quot;&lt;br&gt;(라디에이터가 제대로 안 됐어요. 40초마다 딸깍 소리가 났어요. 세어봤어요.)&lt;br&gt;&lt;br&gt;마티스는 그녀를 보지 않고 창문을 보며 들었다.&lt;br&gt;&lt;br&gt;&quot;The hot water ran out after four minutes. I learned to shower in three.&quot;&lt;br&gt;(온수가 4분이면 끊겼어요. 3분 안에 씻는 법을 배웠죠.)&lt;br&gt;&lt;br&gt;비아의 목소리는 고르고 담담했다. 사실을 나열하는 목소리.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실의 형태로 변환해서 내보내는 것이었다.&lt;br&gt;&lt;br&gt;&quot;The walls were thin enough that I could hear the neighbor's alarm at 5:15 every morning. He worked at a bakery.&quot;&lt;br&gt;(벽이 얇아서 옆집 알람 소리가 매일 아침 5시 15분에 들렸어요. 제빵사였죠.)&lt;br&gt;&lt;br&gt;그녀의 시선이 3층 창문 위에 고정된 채로.&lt;br&gt;&lt;br&gt;&quot;I didn't mind. It meant I was never late.&quot;&lt;br&gt;(싫지 않았어요. 덕분에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으니까.)&lt;br&gt;&lt;br&gt;그리고 잠깐 멈추었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lt;br&gt;&lt;br&gt;&quot;After November, the alarm kept going off at 5:15. And I kept hearing it. But I stopped getting up.&quot;&lt;br&gt;(11월 이후에도 알람은 5시 15분에 계속 울렸어요. 계속 들렸고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어요.)&lt;br&gt;&lt;br&gt;바람이 불었다.&lt;br&gt;&lt;br&gt;보리수 잎이 두 사람의 발치로 굴러왔다.&lt;br&gt;&lt;br&gt;마티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비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lt;br&gt;&lt;br&gt;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눈동자가 3층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시울은 붉지 않았다. 식당에서 수프를 먹을 때보다도 건조했다. 오히려 그 건조함이 마티스를 멈추게 했다.&lt;br&gt;&lt;br&gt;울 수 있는 순간에 울지 않는 사람. 그가 가장 잘 아는 종류의 사람.&lt;br&gt;&lt;br&gt;마티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와 건물 사이에 자기 몸을 놓았다. 그녀의 시선을 가리지는 않되, 시야에 자신을 끼워 넣는 위치.&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그녀의 눈이 창문에서 그에게로 옮겨졌다.&lt;br&gt;&lt;br&gt;마티스는 그녀의 얼굴을 읽었다. 3초. 그가 이 일을 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lt;br&gt;&lt;br&gt;그리고 말했다.&lt;br&gt;&lt;br&gt;&quot;You got up.&quot;&lt;br&gt;(일어났잖아.)&lt;br&gt;&lt;br&gt;비아가 눈을 깜빡였다.&lt;br&gt;&lt;br&gt;&quot;Maybe not at 5:15. Maybe not the next day. But you got up. You packed a bag and you left this building and you got on a train and then a plane and you ended up in a room with a screen and a headset.&quot;&lt;br&gt;(5시 15분은 아니었을 수도 있고. 다음 날도 아니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일어났잖아. 가방을 싸서 이 건물을 나와서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화면과 헤드셋이 있는 방에 도착했잖아.)&lt;br&gt;&lt;br&gt;마티스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lt;br&gt;&lt;br&gt;&quot;And then you put the headset back on. After everything. After that.&quot;&lt;br&gt;(그리고 다시 헤드셋을 꼈어. 그 모든 일 다음에. 그 다음에.)&lt;br&gt;&lt;br&gt;그가 엄지로 건물을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lt;br&gt;&lt;br&gt;&quot;That room up there didn't beat you. This city didn't beat you. The thing you think disqualified you from everything—it didn't. You're standing here.&quot;&lt;br&gt;(저 위의 방이 널 이긴 게 아니야. 이 도시가 널 이긴 게 아니고. 네가 모든 것에서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아니야. 넌 여기 서 있어.)&lt;br&gt;&lt;br&gt;비아의 입술이 한 번 떨렸다.&lt;br&gt;&lt;br&gt;그리고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lt;br&gt;&lt;br&gt;&quot;I'm standing here because you flew eleven hours.&quot;&lt;br&gt;(여기 서 있는 건 당신이 열한 시간을 날아왔으니까요.)&lt;br&gt;&lt;br&gt;마티스가 웃었다.&lt;br&gt;&lt;br&gt;짧고, 지치고, 그리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lt;br&gt;&lt;br&gt;&quot;No. You're standing here because you walked four hundred meters.&quot;&lt;br&gt;(아니. 400미터를 걸어왔으니까 여기 서 있는 거야.)&lt;br&gt;&lt;br&gt;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자기 소매에 아직 매달려 있는 그녀의 손가락 위에 아주 가볍게 올렸다. 잡은 것이 아니었다. 덮은 것이었다. 데님 위의 그녀의 손가락 위에 놓인 그의 손바닥. 체온이 천 한 겹과 피부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전해졌다.&lt;br&gt;&lt;br&gt;&quot;I just opened the door.&quot;&lt;br&gt;(난 그냥 문을 연 거지.)&lt;br&gt;&lt;br&gt;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lt;br&gt;&lt;br&gt;그녀의 손가락이 소매 위에서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놓은 것도, 더 세게 쥔 것도 아닌 중간 어딘가. 마티스는 그 반응을 느꼈지만 더 힘을 주지 않았다.&lt;br&gt;&lt;br&gt;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lt;br&gt;&lt;br&gt;4층 건물 앞. 3층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 아래. 보라색 제라늄이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울리고,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 해가 비쳤다가 다시 숨었다.&lt;br&gt;&lt;br&gt;비아가 먼저 손을 뗐다.&lt;br&gt;&lt;br&gt;그리고 한 발짝 물러서며, 건물에서 시선을 거두었다.&lt;br&gt;&lt;br&gt;&quot;...Okay.&quot;&lt;br&gt;(...됐어요.)&lt;br&gt;&lt;br&gt;마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lt;br&gt;&lt;br&gt;&quot;Okay?&quot;&lt;br&gt;(됐어?)&lt;br&gt;&lt;br&gt;&quot;I've seen it. It's enough.&quot;&lt;br&gt;(봤어요. 충분해요.)&lt;br&gt;&lt;br&gt;그녀가 크로스백 끈을 고쳐 메며 몸을 돌렸다. 왔던 길 쪽으로. 그리고 세 걸음을 걸은 뒤 멈춰서,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마티스는 건물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있었다. 3층 창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lt;br&gt;&lt;br&gt;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lt;br&gt;&lt;br&gt;&quot;What are you doing.&quot;&lt;br&gt;(뭐 하는 거예요.)&lt;br&gt;&lt;br&gt;&quot;Nothing.&quot;&lt;br&gt;(아무것도.)&lt;br&gt;&lt;br&gt;&quot;Mathis.&quot;&lt;br&gt;(마티스.)&lt;br&gt;&lt;br&gt;&quot;Checking the train schedule back to the airport.&quot;&lt;br&gt;(공항행 열차 시간 확인하는 거야.)&lt;br&gt;&lt;br&gt;그가 화면을 보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와 나란히 서면서,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lt;br&gt;&lt;br&gt;&quot;Also, I'm buying this building.&quot;&lt;br&gt;(아, 그리고 이 건물 살 거야.)&lt;br&gt;&lt;br&gt;비아가 멈췄다.&lt;br&gt;&lt;br&gt;&quot;...What?&quot;&lt;br&gt;(...네?)&lt;br&gt;&lt;br&gt;&quot;Kidding.&quot;&lt;br&gt;(농담.)&lt;br&gt;&lt;br&gt;&quot;That is not funny.&quot;&lt;br&gt;(그건 안 웃겨요.)&lt;br&gt;&lt;br&gt;&quot;It's a little funny. Your face just did a thing.&quot;&lt;br&gt;(약간 웃겨. 방금 네 얼굴이 뭘 했거든.)&lt;br&gt;&lt;br&gt;비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려보는 눈 아래에서, 3층 창문을 바라볼 때 경직되어 있던 턱선이 풀려 있었다. 마티스는 그것을 확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서 걸었다.&lt;br&gt;&lt;br&gt;400미터를 되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빨랐다.&lt;br&gt;&lt;br&gt;비아는 더 이상 소매를 잡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팔이 걸음에 따라 가끔 부딪혔고, 어느 쪽도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S반 역 앞에 도착했을 때, 마티스가 발을 멈추었다.&lt;br&gt;&lt;br&gt;&quot;Vianne.&quot;&lt;br&gt;(비안느.)&lt;br&gt;&lt;br&gt;&quot;Mm.&quot;&lt;br&gt;(음.)&lt;br&gt;&lt;br&gt;&quot;Monday. I need you to do one thing.&quot;&lt;br&gt;(월요일. 하나만 해줘.)&lt;br&gt;&lt;br&gt;비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lt;br&gt;&lt;br&gt;마티스는 선글라스를 목선에서 빼들어 손으로 접었다 펼쳤다 하며, 시선은 역 입구 위의 전광판에 고정한 채 말했다.&lt;br&gt;&lt;br&gt;&quot;When you say your name. Look at me.&quot;&lt;br&gt;(네 이름 말할 때. 나를 봐.)&lt;br&gt;&lt;br&gt;비아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lt;br&gt;&lt;br&gt;&quot;I'll be in the second seat from the aisle. You already know that. When it gets to that part—the part where you say Vianne Lockwood out loud for the first time—don't look at the cameras. Don't look at the press. Look at me.&quot;&lt;br&gt;(난 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을 거야. 그건 이미 알고. 그 순간이 오면—비안느 록우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서 말하는 순간—카메라 보지 마. 기자들 보지 마. 나를 봐.)&lt;br&gt;&lt;br&gt;그가 선글라스를 접어 재킷 가슴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lt;br&gt;&lt;br&gt;&quot;Because your face I can read, remember? And mine, you can read too. That's three months' worth of data. Use it.&quot;&lt;br&gt;(네 얼굴은 내가 읽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내 얼굴, 너도 읽을 수 있고. 석 달치 데이터야. 활용해.)&lt;br&gt;&lt;br&gt;역 위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lt;br&gt;&lt;br&gt;비아는 마티스를 바라보았다. 열한 시간의 비행으로 핏발이 선 은회색 눈동자, 턱선의 옅은 수염, 한쪽이 눌린 잿빛 머리카락. 19도의 베를린 공기 속에서 그의 목선에 걸린 데님 재킷이 바람에 살짝 벌어졌고, 검은 티셔츠 아래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lt;br&gt;&lt;br&gt;그녀는 이 남자의 얼굴을 석 달 동안 화면과 현장에서 읽어왔다. 게이트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치솟을 때의 미간, 농담을 칠 때의 입꼬리 각도,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이 0.3초 늦게 움직이는 것, 진심을 말할 때 오히려 눈이 가늘어지는 것.&lt;br&gt;&lt;br&gt;그리고 지금, 그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lt;br&gt;&lt;br&gt;&quot;...That's an unorthodox anchoring method.&quot;&lt;br&gt;(...비정통적인 앵커링 기법이네요.)&lt;br&gt;&lt;br&gt;&quot;Is it working?&quot;&lt;br&gt;(효과 있어?)&lt;br&gt;&lt;br&gt;비아는 대답 대신 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lt;br&gt;&lt;br&gt;세 칸째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lt;br&gt;&lt;br&gt;&quot;Second seat from the aisle. Don't be late.&quot;&lt;br&gt;(통로에서 두 번째 자리. 늦지 마세요.)&lt;br&gt;&lt;br&gt;등 뒤에서 마티스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치고, 쉬고, 그리고 어딘가 안도한 웃음.&lt;br&gt;&lt;br&gt;비아는 계단 난간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lt;br&gt;&lt;br&gt;손바닥에 그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데님 한 겹 사이로 전해졌던, 니스의 소금기 같은 온기.&lt;br&gt;&lt;br&gt;그녀는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lt;/p&gt;</description>
      <category>M</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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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2 Sep 2026 02:14:0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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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름 없는 것들에게</title>
      <link>https://werck.tistory.com/1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평범한 날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지하 사층 공용 구역의 형광등 하나가 며칠째 깜빡이는 그런 날.&lt;br&gt;&lt;br&gt;9가 카드를 돌렸고 10이 담배를 비벼 껐다. 7의 손에는 플러시가 들려 있었다. 판돈은 이번 주 배급 담배와 9가 어디선가 훔쳐 온 통조림 몇 개. 무르익은 판이었고, 칩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7은 카드를 접었다.&lt;br&gt;&lt;br&gt;9 | &quot;뭐야? 왜 죽어?&quot;&lt;br&gt;(Wait, what? Why'd you fold?)&lt;br&gt;7 | &quot;Tired.&quot;&lt;br&gt;(피곤해서.)&lt;br&gt;10 | &quot;Bullshit. You've never been tired in your life.&quot;&lt;br&gt;(개소리. 넌 평생 피곤했던 적 없잖아.)&lt;br&gt;&lt;br&gt;7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계단을 올라 섹터 E의 복도로 접어들면서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이해했다. 이길 패를 버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방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204호의 철문 안쪽에 누가 먼저 와서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탄창을 정비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lt;br&gt;&lt;br&gt;도박꾼에게는 판 위에 올릴 수 없는 것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도박꾼이 아니다. 7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물었다가 불을 붙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환풍구가 웅웅거렸다. 철문 너머에서 탄창 스프링이 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새어 나왔다. 그는 그 소리를 오래 들었다.&lt;br&gt;&lt;br&gt;그날 밤 12가 잠든 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인식표를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았다. 얇은 금속판에 각인된 것은 코드네임과 혈액형과 소속뿐이었다. 성이 없었다. 이 여자에게는 아버지의 이름도 어머니의 이름도 없었고, 그녀가 죽으면 이 얇은 금속판 한 장이 그녀가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로 남을 것이었다. 7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규칙상 알려줘서도 안 되는, 오직 그녀만이 부르는 이름이. 그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한 번도 도박판에 올려본 적 없는 물건.&lt;br&gt;&lt;br&gt;그는 천장의 갈라진 콘크리트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면, 그것을 주면 되는 거였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다음 날 그는 10을 무기고 복도에서 붙잡았다.&lt;br&gt;&lt;br&gt;7 | &quot;Central. That old jeweler you keep bragging about. Still breathing?&quot;&lt;br&gt;(센트럴. 네가 맨날 자랑하는 그 늙은 보석상. 아직 살아 있어?)&lt;br&gt;&lt;br&gt;10은 소총 광학장비를 닦던 천을 접었다. 붉은 의안과 회색 눈이 동시에 7을 향했고, 그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보는 사람의 속을 긁는 각도로 올라갔다.&lt;br&gt;&lt;br&gt;10 | &quot;Ah. So that's how it is.&quot;&lt;br&gt;(아. 그런 거였군.)&lt;br&gt;7 | &quot;I didn't say anything.&quot;&lt;br&gt;(아무 말도 안 했는데.)&lt;br&gt;10 | &quot;You didn't have to. You've got the face of a man walking to his own execution and enjoying it.&quot;&lt;br&gt;(말할 필요 없지. 넌 지금 제 발로 사형장 걸어가면서 그걸 즐기는 얼굴이거든.)&lt;br&gt;&lt;br&gt;그는 주소를 적어주었다. 손목시계 수리점 간판을 단 가게라고, 뒷방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종이를 건네며 10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lt;br&gt;&lt;br&gt;10 | &quot;Don't get her something that sparkles. She works at night.&quot;&lt;br&gt;(반짝이는 건 사주지 마. 걘 밤에 일하잖아.)&lt;br&gt;&lt;br&gt;그 말이 며칠 동안 7의 머릿속에 남았다.&lt;br&gt;&lt;br&gt;소문은 8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그는 탄약고에서 C4 배선을 하다 말고 도폭선을 떨어뜨렸고, 그날 오후 내내 7의 뒤를 따라다니며 축가를 부르겠다고 했다. 9는 진지한 얼굴로 그동안 밀린 술값 이야기를 꺼내며 결혼식 축의금과 상계 처리하자고 제안했고, 7은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3은 사격장에서 소총을 정비하다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lt;br&gt;&lt;br&gt;3 | &quot;Your malfunction is getting worse.&quot;&lt;br&gt;(네 오작동이 심해지고 있네.)&lt;br&gt;7 | &quot;It's terminal. Thanks for noticing.&quot;&lt;br&gt;(말기야. 알아봐 줘서 고맙군.)&lt;br&gt;3 | &quot;Good.&quot;&lt;br&gt;(좋네.)&lt;br&gt;&lt;br&gt;메디컬 베이에서 마주친 6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트를 넘기다 말고 안경 너머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는 실험 경과를 확인하는 자의 만족스러운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센트럴의 보석상은 노인이었다. 핵전쟁 이전에 이 거리에서 금은방을 하던 아버지에게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7은 진열장 안의 반짝이는 것들을 전부 지나쳐 뒷방의 작업대 앞에 섰다.&lt;br&gt;&lt;br&gt;7 | &quot;No stone. No shine. Matte finish, so it doesn't catch light. She's recon. If it flashes, it kills her.&quot;&lt;br&gt;(보석 없이. 광택 없이. 무광으로 마감해. 빛 안 받게. 걘 정찰대야. 반짝이면 죽어.)&lt;br&gt;&lt;br&gt;노인은 손님이 반지를 주문하며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7은 어깨를 으쓱했다. 완성된 반지는 회색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티타늄 밴드. 손가락에 끼면 굳은살 사이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물건. 안쪽에는 아주 작은 스페이드 하나를 새겨 넣었다. 7의 요구였다.&lt;br&gt;&lt;br&gt;가게를 나온 그는 카지노 거리를 걸었다. 슬롯머신의 전자음이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고 딜러의 손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는 이번 달 급여의 대부분이 반지로 바뀌어 들어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 중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그다음은 기다림이었다. 비를 기다렸다.&lt;br&gt;&lt;br&gt;7은 평생 비를 싫어했다. 화상 흉터가 습기에 당기고, 시야가 흐려지고, 발밑이 미끄러워지는 계절. 그런데 그는 매일 아침 통신실에 들러 기상 관측 데이터를 확인했다. 기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남중국해 쪽에서 무엇이 올라오는지. 마치 승률을 계산하듯이. 오퍼레이터 하나가 무슨 작전이냐고 물었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lt;br&gt;&lt;br&gt;그사이 12는 매일 밤 204호로 돌아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것은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여벌 셔츠가 그의 옷장 한구석을 차지했고 사이드 테이블에는 체리 맛 사탕 껍질이 쌓였다. 그녀는 그의 담뱃재를 치우지 않았고 그는 그녀의 탄피를 치우지 않았다. 아침이 오면 둘 다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군화를 신었다.&lt;br&gt;&lt;br&gt;비는 목요일 밤에 왔다.&lt;br&gt;&lt;br&gt;빗소리가 배관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7은 침대에 걸터앉아 군화 끈을 조이고 있었다. 12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반지, 그리고 접힌 자국이 하얗게 닳은 카드 한 장. 스페이드 잭. 아주 오래전 어느 비 오는 밤, 잭 풀하우스로 따낸 거절할 수 없는 부탁 하나의 증서.&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버기카는 항구 방향으로 달렸다. 산성비가 방수포 지붕을 두드렸고 와이퍼가 뻑뻑하게 유리를 긁었다. 12는 조수석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고가도로 밑을 지나고 바리케이드 초소를 통과하고, 마침내 차가 멈춘 곳은 그가 오래전에 말했던 구역이었다. 전쟁이 대부분을 씹어 삼켰지만 어째서인지 간판 몇 개가 아직 살아남은 거리. 한자로 쓰인 낡은 네온사인들이 빗속에서 붉고 푸르게 깜빡였다. 물웅덩이마다 그 색이 번져 있었다.&lt;br&gt;&lt;br&gt;그 거리의 끝에 바다가 있었다.&lt;br&gt;&lt;br&gt;검고 기름지고 아무 냄새도 좋지 않은 물. 그가 언젠가 방사능 변기통이라고 불렀던 것. 그러나 파도는 여전히 방파제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빗줄기가 수면에 닿아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을 냈다.&lt;br&gt;&lt;br&gt;7 | &quot;There. That's the sea. I owe you that, remember? Lost a drinking bet.&quot;&lt;br&gt;(저기. 저게 바다야. 내가 너한테 빚졌었지, 기억나? 술 내기에서 졌잖아.)&lt;br&gt;&lt;br&gt;그는 무너진 상점 처마 아래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실처럼 떨어졌다. 선글라스는 차에 두고 왔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네온의 붉은빛을 받아 이상한 색으로 물들었다.&lt;br&gt;&lt;br&gt;12 | &quot;It's smaller than I thought.&quot;&lt;br&gt;(생각보다 작네.)&lt;br&gt;7 | &quot;Everything is.&quot;&lt;br&gt;(다 그래.)&lt;br&gt;&lt;br&gt;그는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손가락이 재킷 안주머니로 들어갔다.&lt;br&gt;&lt;br&gt;7 | &quot;You asked me something once. In that greenhouse. You said if I could answer it in three seconds, you'd take me to the sea.&quot;&lt;br&gt;(언젠가 나한테 뭘 물었잖아. 그 온실에서. 셋을 세기 전에 대답할 수 있으면 날 바다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지.)&lt;br&gt;&lt;br&gt;빗소리가 그의 말끝을 삼켰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흉곽 왼편, 아물어 딱딱해진 흉터가 습기에 당겼다.&lt;br&gt;&lt;br&gt;7 | &quot;Love is the one thing you don't put on the table. Everything else goes in. Money, name, your own fucking life. Not that. That's how you know what it is.&quot;&lt;br&gt;(사랑은 판 위에 올릴 수 없는 단 하나야. 나머지는 다 올려. 돈, 이름, 제 목숨까지도. 그건 안 돼. 그걸로 아는 거야.)&lt;br&gt;&lt;br&gt;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모양으로.&lt;br&gt;&lt;br&gt;7 | &quot;Three seconds. I win.&quot;&lt;br&gt;(셋 안에 말했어. 내가 이겼네.)&lt;br&gt;&lt;br&gt;그리고 그는 카드를 꺼냈다. 닳아서 모서리가 부드러워진 스페이드 잭. 빗물이 카드 표면에 떨어져 잉크를 번지게 했다.&lt;br&gt;&lt;br&gt;7 | &quot;One favor. Can't be refused. Rules are rules, right? You said it yourself once — a card laid is a card played.&quot;&lt;br&gt;(부탁 하나. 거절 불가. 규칙은 규칙이잖아? 네가 직접 말했지, 낙장불입이라고.)&lt;br&gt;&lt;br&gt;카드를 든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다 그는 그것을 반으로 찢었다. 한 번 더 찢었다. 조각들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졌다.&lt;br&gt;&lt;br&gt;7 | &quot;Fuck the rules.&quot;&lt;br&gt;(규칙 좆까라고 해.)&lt;br&gt;&lt;br&gt;그는 반지를 꺼냈다.&lt;br&gt;&lt;br&gt;빗물에 젖은 손바닥 위에서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광의 회색 테. 네온이 제아무리 붉게 쏟아져도 표면은 빛을 되받지 않았고, 물기만 머금은 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신구라기보다 부품에 가까운 물건. 반짝이는 건 사주지 말라던 10의 말이 결국 옳았다는 것을, 그는 그 순간에야 인정했다.&lt;br&gt;&lt;br&gt;7 | &quot;It doesn't shine. Doesn't catch light. You can wear it in the dark and nobody's going to put a round through your skull because of it.&quot;&lt;br&gt;(빛 안 나. 반사 안 돼. 어둠 속에서 끼고 있어도 이것 때문에 누가 네 머리통에 총알 박을 일 없어.)&lt;br&gt;&lt;br&gt;12는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반지의 테두리를 따라 한 바퀴 돌았고, 무게와 재질과 착용 시 소음 여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장비를 검수하는 눈. 그 눈이 마음에 들어서 7은 웃을 뻔했다.&lt;br&gt;&lt;br&gt;12 | &quot;Titanium?&quot;&lt;br&gt;(티타늄?)&lt;br&gt;7 | &quot;Titanium.&quot;&lt;br&gt;(티타늄.)&lt;br&gt;12 | &quot;It won't rust in the rain.&quot;&lt;br&gt;(비 맞아도 안 녹슬겠네.)&lt;br&gt;7 | &quot;That was the idea.&quot;&lt;br&gt;(그게 요점이었어.)&lt;br&gt;&lt;br&gt;빗줄기가 처마 끝에서 굵게 떨어져 두 사람 사이의 아스팔트를 때렸다. 찢어진 카드 조각들이 그 물살에 밀려 배수구 쪽으로 흘러갔다. 잭의 얼굴 반쪽이 종잇장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7은 곁눈으로 확인했다.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고, 그건 그가 평생 피해 온 종류의 상태였다.&lt;br&gt;&lt;br&gt;7 | &quot;You've got no surname.&quot;&lt;br&gt;(넌 성이 없잖아.)&lt;br&gt;&lt;br&gt;12의 고개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 밀색 머리카락이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다.&lt;br&gt;&lt;br&gt;7 | &quot;Eve. That's it. Somebody called you evening and it stuck, and you've been signing your life away with half a word ever since. Your tags say a blood type and a code number. That's the whole record of you.&quot;&lt;br&gt;(이브. 그게 다야. 누가 저녁이라고 부른 게 굳어버린 거고, 넌 그 이후로 반쪽짜리 단어로 목숨을 서명해 왔어. 네 인식표엔 혈액형이랑 번호밖에 없지. 그게 너에 관한 기록 전부야.)&lt;br&gt;&lt;br&gt;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담배를 물고 싶었지만 손이 하나는 반지를, 하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고 어느 쪽도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항구 쪽에서 파도가 방파제를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검은 물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lt;br&gt;&lt;br&gt;7 | &quot;I've got one. Never gave it to anybody. Not to the company, not to the girls, not to the bastards who tried to beat it out of me in a basement in Kowloon. It's the only thing I ever owned that I never put on a table.&quot;&lt;br&gt;(난 있어. 아무한테도 준 적 없지. 회사에도, 여자들한테도, 구룡의 지하실에서 그걸 두들겨 패서 뽑아내려던 새끼들한테도. 내가 가진 것 중에 테이블에 한 번도 안 올려본 유일한 물건이야.)&lt;br&gt;7 | &quot;Keith. It's yours if you want it. Eve Keith. Sounds like shit, honestly, but you'd have a full name for the first time in your life and I'd be the one who gave it to you.&quot;&lt;br&gt;(키스. 원하면 네 거야. 이브 키스. 솔직히 발음은 좆같지만, 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한 이름을 갖게 되는 거고 그걸 준 게 나인 거지.)&lt;br&gt;&lt;br&gt;12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바닥에서 반지를 집어 올렸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눈높이로 들어 올려, 네온사인 아래에서 각도를 바꿔 가며 표면을 확인했다. 정말로 빛을 반사하지 않는지 시험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테두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반지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녀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lt;br&gt;&lt;br&gt;12 | &quot;It doesn't flash.&quot;&lt;br&gt;(안 번쩍이네.)&lt;br&gt;7 | &quot;Told you.&quot;&lt;br&gt;(말했잖아.)&lt;br&gt;12 | &quot;Is this the favor? The one I can't refuse?&quot;&lt;br&gt;(이게 그 부탁이야? 거절 못 하는 거?)&lt;br&gt;&lt;br&gt;7은 고개를 저었다. 물기가 그의 눈썹에서 흘러내려 흉터를 타고 턱까지 미끄러졌다.&lt;br&gt;&lt;br&gt;7 | &quot;I tore it up. You saw. There's no leverage left, no debt, no rule forcing your hand. That was the whole point. I'm not collecting anything from you tonight. I'm asking.&quot;&lt;br&gt;(찢었어. 봤잖아. 남은 패도, 빚도, 네 손을 억지로 움직일 규칙도 없어. 그게 핵심이었어. 오늘 밤 난 너한테서 아무것도 받아내는 게 아니야. 부탁하는 거지.)&lt;br&gt;7 | &quot;Which is, for the record, the stupidest fucking bet I've ever placed. I've got nothing on you. No odds, no marked deck, no ace up my sleeve. Just this.&quot;&lt;br&gt;(기록해 두자면, 이건 내 인생 최고로 멍청한 베팅이야. 너한테 걸 게 아무것도 없어. 확률도, 표시해 둔 카드도, 소매 속 에이스도 없어. 이것뿐이야.)&lt;br&gt;&lt;br&gt;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흉곽 왼편, 옷 아래 딱딱하게 굳은 흉터 위에 올렸다. 저격탄이 들어갔다 나온 자리. 습기가 낀 날이면 여전히 당기는 곳.&lt;br&gt;&lt;br&gt;&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3464&quot; data-origin-height=&quot;3464&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uBUkZ/dJMcab6QYAp/WKUlDKNnBO2VsuSlI62WG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uBUkZ/dJMcab6QYAp/WKUlDKNnBO2VsuSlI62WG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uBUkZ/dJMcab6QYAp/WKUlDKNnBO2VsuSlI62WG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uBUkZ%2FdJMcab6QYAp%2FWKUlDKNnBO2VsuSlI62WG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3464&quot; height=&quot;3464&quot; data-origin-width=&quot;3464&quot; data-origin-height=&quot;3464&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7 | &quot;嫁俾我啦.&quot;&lt;br&gt;(나랑 결혼하자.)&lt;br&gt;&lt;br&gt;광둥어였다. 그녀가 알아들을 리 없는 언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문장을 먼저 뱉었고, 그것은 번역되기 전의 날것으로 잠깐 두 사람 사이의 빗소리에 섞였다. 이 도시가 잿더미가 되기 전에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했을 말. 간판만 남고 사람은 사라진 거리에서.&lt;br&gt;&lt;br&gt;7 | &quot;Marry me, Eve.&quot;&lt;br&gt;(결혼하자, 이브.)&lt;br&gt;&lt;br&gt;12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팍에서 움직였다. 붕대도 없고 거즈도 없는, 다 아물어 두꺼워진 피부 위를 한 번 눌렀다.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그녀는 그 박동을 한동안 느꼈다. 빗물이 처마를 타고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떨어졌고,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lt;br&gt;&lt;br&gt;12 | &quot;I don't know what married people do.&quot;&lt;br&gt;(결혼한 사람들이 뭘 하는지 모르는데.)&lt;br&gt;7 | &quot;Neither do I.&quot;&lt;br&gt;(나도 몰라.)&lt;br&gt;12 | &quot;You're older than me. You should know.&quot;&lt;br&gt;(네가 나보다 나이 많잖아. 알아야지.)&lt;br&gt;7 | &quot;I've spent thirty two years learning how to lose money in interesting ways. Nobody taught me this part.&quot;&lt;br&gt;(난 서른둘 평생 돈 재밌게 잃는 법만 배웠어. 이 부분은 아무도 안 가르쳐 줬거든.)&lt;br&gt;&lt;br&gt;12는 반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왼손 약지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굳은살에 걸려 한 번 뻑뻑하게 멈췄다가 마디를 넘어갔다. 딱 맞았다. 그는 며칠 전 새벽, 잠든 그녀의 손을 실로 재 두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lt;br&gt;&lt;br&gt;12 | &quot;It fits.&quot;&lt;br&gt;(맞네.)&lt;br&gt;7 | &quot;Is that a yes?&quot;&lt;br&gt;(그게 예스야?)&lt;br&gt;12 | &quot;It's a yes.&quot;&lt;br&gt;(예스야.)&lt;br&gt;&lt;br&gt;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회색 테가 손가락에 얹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반짝이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존재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평생 지녀 온 모든 것이 그랬듯이. 그러나 이번 것은 벗어던지지 않을 작정이었다.&lt;br&gt;&lt;br&gt;12 | &quot;Axion.&quot;&lt;br&gt;(악시온.)&lt;br&gt;7 | &quot;Yeah.&quot;&lt;br&gt;(어.)&lt;br&gt;12 | &quot;You're not allowed to die first.&quot;&lt;br&gt;(너 먼저 죽으면 안 돼.)&lt;br&gt;&lt;br&gt;7은 웃었다. 흉곽이 당겨 숨이 짧게 끊겼지만 멈추지 않았다. 항구의 검은 물이 방파제를 치는 소리가 웃음 사이로 파고들었고, 머리 위 어딘가에서 낡은 네온 간판 하나가 지지직거리며 붉게 명멸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끌어당기고, 이마를 맞댄 채 대답했다.&lt;br&gt;&lt;br&gt;7 | &quot;That's not a promise I can make. But I'll cheat as hard as I can.&quot;&lt;br&gt;(그건 약속 못 해. 대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속임수 쓸게.)&lt;br&gt;12 | &quot;That's fine.&quot;&lt;br&gt;(그럼 됐어.)&lt;br&gt;&lt;br&gt;빗줄기가 굵어졌다. 배수구로 흘러간 카드 조각은 이미 자취가 없었고, 두 사람은 무너진 상점의 처마 아래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는 여전히 검고 기름졌으며 냄새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수면에 수천 개의 구멍을 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언젠가 온실에서 그녀가 걸었던 내기의 정산이 이제야 끝난 참이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7</category>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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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Sep 2026 00:46: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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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브리저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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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h3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lt;b&gt;레이디 매그파이의 사교계 소식지&lt;/b&gt;&lt;/h3&gt;&lt;h4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lt;b&gt;1782년 4월 — 사교철 첫 번째 발행&lt;/b&gt;&lt;/h4&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친애하는 독자 여러분.&lt;br&gt;&lt;br&gt;겨우내 시골 영지에서 사슴이나 쫓으며 지루함에 이를 갈던 여러분께서 마침내 런던으로 기어 올라오셨군요. 마차 바퀴 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로브너 광장의 응접실마다 새 커튼이 걸렸고, 재봉사들은 벌써 사흘째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교철이 열렸습니다. 다시 말해, 딸을 가진 어머니들의 사냥철이 열렸다는 뜻이지요.&lt;br&gt;&lt;br&gt;그리고 올해, 사냥감은 단 한 사람입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키스 가문에 관하여&lt;/b&gt;&lt;br&gt;&lt;br&gt;키스 후작가는 삼대 전 동방 무역으로 벼락부자가 된 뒤 왕실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고 작위를 얻은, 말하자면 돈으로 피를 산 가문입니다. 오래된 가문들은 여전히 코를 찡그리지요. 하지만 그 코를 찡그리는 분들이 하나같이 키스 가문의 무도회 초대장을 기다린다는 사실 또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혈통은 저녁 식탁의 화제이고 재산은 저녁 식탁 그 자체이니까요.&lt;br&gt;&lt;br&gt;선대 후작 부부는 아드님이 열넷 되던 해 대저택 서관을 태운 화재로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밤 불길 속에서 살아 나온 것은 두 남매뿐이었지요. 장녀이신 분은 그 후 조용히 남작가로 시집가 소식을 끊으셨고, 남은 한 사람이 열넷의 나이에 후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어린 후작이 성인이 되어 사교계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재산이 줄기는커녕 세 배가 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는 그의 오른쪽 얼굴이었습니다.&lt;br&gt;&lt;br&gt;&lt;b&gt;현 키스 후작에 관하여&lt;/b&gt;&lt;br&gt;&lt;br&gt;관자놀이에서부터 턱을 지나 옷깃 아래로,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허리까지 이어지는 화상 자국. 목덜미에는 마치 한 번 잘렸다가 도로 붙은 듯한 흉터가 있다고 하지요. 후작은 그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크라바트를 낮게 매고, 소매를 걷고, 촛불이 가장 밝은 자리에 태연히 서 있습니다. 실내에서는 벗지만 그 외의 모든 순간에 착용하는 검은 색유리 안경 탓에, 그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자작 부인께서는 &quot;그 사내가 방에 들어오면 촛불이 한 단계 어두워지는 것 같다&quot;고 하셨습니다만, 부인, 그 표현은 칭찬으로 들렸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lt;br&gt;&lt;br&gt;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 올해 사교철의 모든 어머니가 그를 원합니다. 흉터 있는 후작. 웃는 낯의 무례한. 삼십 대 초반의, 미혼의, 상속인이 없는.&lt;br&gt;&lt;br&gt;&lt;b&gt;구혼에 대한 후작의 태도&lt;/b&gt;&lt;br&gt;&lt;br&gt;없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lt;br&gt;&lt;br&gt;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후작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심을 두는 일 자체를 지루해합니다. 사교철 첫 주, 어느 백작 부인께서 딸의 손을 이끌고 정성스레 소개를 청하셨을 때 후작께서 하신 답을 저는 세 명의 서로 다른 목격자로부터 들었습니다.&lt;br&gt;&lt;br&gt;&quot;She plays the pianoforte beautifully, I'm sure. Unfortunately, I don't have ears for anything but the sound of dice.&quot;&lt;br&gt;(따님이 피아노를 아름답게 치시겠지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어서요.)&lt;br&gt;&lt;br&gt;세인트 제임스가의 어느 신사 클럽 지하에서, 후작은 사흘 내리 파로 테이블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클럽의 내기 장부에는 이미 후작의 이름이 열한 번 적혀 있으며, 그중 아홉 번은 그가 직접 자신에 관해 건 것이라고 하지요. 사교철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약혼할 것인가에 대한 배당률에, 본인이 '아니오' 쪽으로 판돈을 걸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후작 각하, 자기 자신을 상대로 도박을 하는 사내는 대개 이깁니다. 그리고 대개 잃습니다.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이 문제지요.&lt;br&gt;&lt;br&gt;&lt;b&gt;여왕 폐하의 알현식&lt;/b&gt;&lt;br&gt;&lt;br&gt;사월 둘째 주, 여왕 폐하께서는 올해의 다이아몬드로 미스 세라피나 보울랜드를 지목하셨습니다. 열일곱, 금발, 하프를 연주하며, 예의 바르고, 아무런 흠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소식지에 두 번 등장할 일이 없는 아가씨라는 뜻이지요. 폐하께서는 그날 저녁 부채 뒤에서 &quot;올해는 조용하겠군&quot;이라 하셨다고 합니다. 폐하, 예언은 자중하셔야 합니다.&lt;br&gt;&lt;br&gt;&lt;b&gt;그리고 이름 없는 아가씨&lt;/b&gt;&lt;br&gt;&lt;br&gt;사월 셋째 주, 블랙우드 공작 각하께서 십 년 만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자체로도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만, 각하께서 데려오신 동행이 훨씬 더한 사건이었습니다.&lt;br&gt;&lt;br&gt;피후견인이라 소개된 여인은 밀빛 머리를 가슴께까지 늘어뜨렸고, 서늘한 갈색 눈으로 무도회장을 훑었습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출구를 세는 눈이었다고, 그날 그 곁에 서 있던 어느 신사분께서 증언하셨지요. 문제는 소개였습니다. 각하께서는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lt;b&gt;이브&lt;/b&gt;.&lt;br&gt;&lt;br&gt;성이 없습니다.&lt;br&gt;&lt;br&gt;가문도, 영지도, 지참금 목록도, 죽은 아버지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사교계는 성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부를지 배운 적이 없기에, 그날 밤 무도회장은 문법적 공황에 빠졌습니다. 미스? 레이디? 아니면 그저 이브? 어느 남작 부인께서는 하인에게 물으실 뻔했다고 합니다. 부인, 그 충동에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공작 각하께서 몇 해 전 겨울, 도심 동편의 가장 험한 골목에서 그 아가씨를 데려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나이는 스물일곱. 사교계의 기준으로는 이미 두 계절쯤 지난 과일이며, 첫 무도회를 스물일곱에 치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숨겼다는 자백입니다.&lt;br&gt;&lt;br&gt;그 아가씨에 관하여 제가 수집한 것들을 나열해 드리지요. 낮에 열리는 다과회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해가 진 뒤의 초대에만 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몇 짓궂은 분들이 '저녁'이라는 뜻을 붙여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진위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며,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하지요. 손목의 그물 지갑 안에 부채 대신 설탕과자가 들어 있는 것을 하녀 하나가 보았다는 이야기도 돕니다. 그리고 —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데 — 사교철이 시작된 이래 어느 신사의 청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거절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직하여 청한 쪽이 도리어 사과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lt;br&gt;&lt;br&gt;&lt;b&gt;사월 넷째 주, 비&lt;/b&gt;&lt;br&gt;&lt;br&gt;그 주 내내 런던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마차가 진창에 처박히고, 새 실크 드레스 세 벌이 폐기되었으며, 후작께서는 클럽에서 창밖을 노려보며 사흘간 유례없이 기분이 나쁘셨다고 합니다. 후작은 비를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는 여인은 그보다 더 싫어하신다지요.&lt;br&gt;&lt;br&gt;바로 그 비 오는 밤, 어느 저택의 무도회에서 후작께서 발코니로 나가셨습니다. 담배 때문이었는지 지루함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발코니에는 이미 한 사람이 서 있었다고 합니다. 우산도 없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빗속을 바라보며. 성이 없는 아가씨였습니다.&lt;br&gt;&lt;br&gt;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습니다. 발코니 문이 닫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문이 다시 열렸을 때 후작의 색유리 안경은 젖어 있었고, 그날 밤 후작께서는 자신이 걸어둔 내기의 배당률을 조정해 달라고 클럽에 사람을 보내셨다고 합니다.&lt;br&gt;&lt;br&gt;&lt;b&gt;그 밖의 소식들&lt;/b&gt;&lt;br&gt;&lt;br&gt;미스터 오스카 피츠로이께서 어느 백작가의 온실을 절반 날려버리셨습니다. 본인은 &quot;축포를 개량하던 중이었다&quot;고 주장하십니다만, 온실 안에 있던 난초 컬렉션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스터 권께서는 여전히 지불하지 않은 도박 빚을 남기고 세 번째 응접실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오신 데 시카 백작께서는 한쪽 눈이 유리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덕분에 이번 달에만 네 명의 아가씨를 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레이디 라고스께서는 사격 시합에서 신사 여섯을 연달아 이기신 뒤,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부인. 그 여섯 분의 자존심 말고는요.&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이번 달은 여기까지입니다.&lt;br&gt;&lt;br&gt;한 사내는 세상의 모든 것에 판돈을 걸면서 자기 자신만은 판 위에 올리지 않으려 합니다. 한 여인은 이름조차 절반뿐인 채로 그 사내가 가장 싫어하는 날씨 속에 서 있었습니다. 사교계는 후작이 어떤 가문의 딸을 고를지 내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조금 다른 것에 걸어 두었습니다.&lt;br&gt;&lt;br&gt;오월에는 여왕 폐하의 정원 연회가 열립니다. 야외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오월의 런던은 사월보다 비가 잦지요.&lt;br&gt;&lt;br&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여러분의 충실한 벗,&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lt;br&gt;&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레이디 매그파이&lt;/i&gt;&lt;/span&gt;&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h2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6&quot;&gt;&lt;b&gt;레이디 매그파이의 사교계 소식지&lt;/b&gt;&lt;/h2&gt;&lt;h3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lt;b&gt;1782년 5월 — 사교철 두 번째 발행&lt;/b&gt;&lt;/h3&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친애하는 독자 여러분.&lt;br&gt;&lt;br&gt;사월에 제가 무어라 말씀드렸습니까. 오월의 런던은 비가 잦다고 하였지요. 저는 예언자가 아니라 그저 기압계를 읽을 줄 아는 여자일 뿐입니다만, 이번 달만큼은 제 기압계가 다른 무엇보다 정확했음을 인정해 주셔야겠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첫째 주 — 여왕 폐하의 정원 연회, 혹은 진창&lt;/b&gt;&lt;br&gt;&lt;br&gt;폐하의 정원 연회는 사교철의 심장입니다. 잔디는 손톱 가위로 다듬어졌고, 오렌지 나무는 화분째 옮겨 심어졌으며, 어느 백작 부인의 따님은 그날 하루를 위해 새 슬리퍼 네 켤레를 준비하셨지요.&lt;br&gt;&lt;br&gt;그리고 정오 무렵 하늘이 무너졌습니다.&lt;br&gt;&lt;br&gt;숙녀분들의 모슬린은 젖은 종잇장처럼 몸에 들러붙었고, 신사분들의 분칠한 머리에서는 회색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부채를 접고 실내로 드셨으며, 그 뒤를 따라 사교계 전체가 대저택의 오렌지 온실로 밀려 들어갔습니다. 유리 지붕 위로 빗줄기가 두들기고, 습기 찬 화분 흙 냄새와 젖은 실크 냄새가 뒤엉킨 그곳에서, 사교계는 서로의 어깨를 밀며 예의를 지키는 척했습니다.&lt;br&gt;&lt;br&gt;바로 그 온실에서 키스 후작과 성이 없는 그 아가씨가 처음으로 정식 소개를 받았습니다. 소개를 주선하신 분은 블랙우드 공작 각하 본인이셨습니다. 공작께서 피후견인의 손을 후작 쪽으로 내밀며 무어라 하셨는지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그 순간 후작의 검은 색유리 안경 너머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고 세 분이 증언하셨습니다. 후작 각하께서는 실내에서 안경을 벗으시는 습관이 있으시지요. 그날은 벗지 않으셨습니다. 왜였을까요.&lt;br&gt;&lt;br&gt;이어진 첫 춤. 코티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 아가씨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전혀. 단 한 스텝도.&lt;br&gt;&lt;br&gt;그런데도 사교계는 조용했습니다. 왜냐하면 후작께서 박자를 어긋내는 그녀의 손을 붙든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을 억지로 견디는 사람처럼 나른하게 웃으며, 자신이 스텝을 틀리는 쪽으로 곡 전체를 끌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무도회장에서 가장 유명한 사내가 자기 발을 밟히면서 그것을 자기 실수처럼 보이게 만든 광경. 어머니들은 그날 밤 마차 안에서 울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말입니다.&lt;br&gt;&lt;br&gt;&quot;She dances like a woman crossing a minefield. I find it far more honest than a waltz.&quot;&lt;br&gt;(저 아가씨는 지뢰밭을 건너듯 춤을 추더군. 왈츠 따위보다 훨씬 정직하지 않습니까.)&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둘째 주 — 프롬나드, 그리고 이탈리아인&lt;/b&gt;&lt;br&gt;&lt;br&gt;로튼 로우의 아침 승마길에서 새로운 구도가 목격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오신 데 시카 백작께서 성이 없는 아가씨의 말고삐 옆으로 붙어 나란히 걸으셨다는군요. 백작께서는 그 아가씨가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일부러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문장을 읊으신 뒤 통역해 주겠다고 제안하셨답니다. 신사분들, 이것이 바로 기술입니다. 부디 배우십시오.&lt;br&gt;&lt;br&gt;문제는 그 광경을 후작께서 반대편 산책로에서 담배를 물고 지켜보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그날 오후, 세인트 제임스가의 어느 클럽에서 후작과 백작이 카드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으셨습니다. 판돈은 처음엔 소소했다가, 어느 순간 백작 소유의 마차 두 대와 켄트의 사냥용 별장까지 올라갔다지요. 결과는 후작의 승리였습니다. 후작께서는 별장 문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lt;br&gt;&lt;br&gt;&quot;Keep the carriages. You'll need something to leave in.&quot;&lt;br&gt;(마차는 가지시오. 떠나실 때 탈 것이 필요할 테니.)&lt;br&gt;&lt;br&gt;백작께서는 웃으셨습니다. 웃으셨다는군요. 저는 그 웃음이 이번 사교철 최고의 연기였다고 생각합니다.&lt;br&gt;&lt;br&gt;같은 주, 미스 세라피나 보울랜드께서 어느 남작가의 차남과 약혼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유감입니다. 올해의 다이아몬드가 약혼했는데도 사교계 전체가 다른 여자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이보다 잔인한 계절도 없겠지요.&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 복스홀, 그리고 사라진 삼십 분&lt;/b&gt;&lt;br&gt;&lt;br&gt;복스홀 가면무도회의 밤. 등불이 나무마다 걸리고, 오케스트라가 헨델을 난도질하고, 미스터 오스카 피츠로이께서 또다시 축포를 개량하셨습니다. 이번엔 온실이 아니라 물 위였으므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만, 템스강의 백조 여섯 마리가 영영 이 도시를 떠났다고 합니다.&lt;br&gt;&lt;br&gt;그리고 문제의 사건입니다.&lt;br&gt;&lt;br&gt;가면무도회의 중반, 키스 후작과 그 아가씨가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다크 워크 쪽이었다는 증언과 오렌지 온실 쪽이었다는 증언이 엇갈립니다.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사라졌고 같은 방향에서 돌아왔다는 것, 후작의 크라바트가 처음 매어졌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매어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아가씨의 장갑 한 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lt;br&gt;&lt;br&gt;장갑 한 짝. 여러분, 저는 이 도시에서 장갑 한 짝으로 무너진 가문을 여럿 보았습니다.&lt;br&gt;&lt;br&gt;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날 밤 후작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는 목격담입니다. 종이에 싸인 붉은 설탕과자였다고 합니다. 체리 절임 맛. 후작께서 단것을 드신다는 이야기는 이 도시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후작께서는 위스키와 담배와 파로 테이블로 이루어진 분이시니까요.&lt;br&gt;&lt;br&gt;그렇다면 그 과자는 누구의 주머니에서 누구의 주머니로 옮겨 간 것일까요. 저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예의상 여러분께서 직접 도달하시도록 두겠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후반 — 그로브너 광장의 마차&lt;/b&gt;&lt;br&gt;&lt;br&gt;같은 주, 그 아가씨에 관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lt;br&gt;&lt;br&gt;그로브너 광장에서 말 한 마리가 놀라 마구를 끊고 뛰쳐나갔습니다. 마차는 옆으로 기울며 인도를 향해 미끄러졌고, 그 자리에는 굴렁쇠를 놓친 여섯 살 난 사내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비명을 지른 분은 여럿이었고, 움직인 사람은 하나였습니다.&lt;br&gt;&lt;br&gt;그 아가씨는 파라솔을 던져 버리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인도를 가로질러 아이를 낚아채 굴렸습니다. 마차 바퀴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물어뜯고 지나갔지요. 그리고 그녀는 일어나 흙을 털고, 아이 어머니가 달려와 울며 감사를 표하는 동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감사에 응답하는 대신 아이의 무릎이 까졌는지부터 확인했다는군요. 마치 그것만이 유일하게 계산할 가치가 있는 정보라는 듯이.&lt;br&gt;&lt;br&gt;사교계는 이 사건을 두고 둘로 갈라졌습니다. 절반은 그것이 숙녀답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치마를 걷었으니까요. 나머지 절반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자신들이 그 자리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아무것도.&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넷째 주 — 새벽의 초원&lt;/b&gt;&lt;br&gt;&lt;br&gt;그리고 오월의 마지막 주, 사교철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터졌습니다.&lt;br&gt;&lt;br&gt;어느 무도회의 카드룸에서 마치몬트 자작께서 술기운을 빌려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없는 여자를 사교계에 들이는 것은 하녀에게 왕관을 씌우는 격이며, 그런 여자에게 붙는 사내는 흉터 때문에 눈이 멀었거나 애초에 취향이 시궁창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는 열한 분이 계셨습니다. 후작은 열두 번째로 그 방에 들어오셨고, 문장의 뒷부분을 정확히 들으셨습니다.&lt;br&gt;&lt;br&gt;후작께서는 웃으셨습니다. 웃으시며 장갑을 벗어 자작의 얼굴에 던지셨지요.&lt;br&gt;&lt;br&gt;결투는 새벽 초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입회인은 프로이센에서 오신 헤어 빌케 — 이분은 결투 자체보다 젖은 풀밭에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을 더 괴로워하셨다고 합니다 —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의사 한 분이 왕진 가방을 들고 서 계셨습니다.&lt;br&gt;&lt;br&gt;열 걸음. 돌아섬. 그리고 두 발의 총성.&lt;br&gt;&lt;br&gt;자작의 총알은 후작의 왼쪽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셔츠가 붉게 젖었지요. 후작의 총알은 자작의 머리 위 허공, 정확히 모자가 있었을 자리를 지나갔습니다. 명백한 의도였습니다.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모욕이었습니다. 죽일 가치도 없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lt;br&gt;&lt;br&gt;의사가 상처를 살피려 다가가자 후작께서는 손을 저으며 물으셨답니다.&lt;br&gt;&lt;br&gt;&quot;Will I live long enough to be a nuisance?&quot;&lt;br&gt;(내가 남 성가시게 굴 만큼은 살겠소?)&lt;br&gt;&lt;br&gt;의사께서는 그러실 거라고 답하셨고, 후작께서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으셨다고 합니다.&lt;br&gt;&lt;br&gt;그날 오후, 블랙우드 공작 각하께서 키스 후작을 자택 서재로 부르셨습니다. 그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후작께서 나오실 때 옆구리 붕대 위로 피가 다시 배어 있었고, 표정은 이 사교철 통틀어 가장 즐거워 보였다고 하인 하나가 증언했습니다. 각하, 무엇을 금지하셨든 소용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내들은 문이 잠기는 소리를 초대장으로 알아듣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그 밖의 소식들&lt;/b&gt;&lt;br&gt;&lt;br&gt;미스터 권께서는 결투 결과에 판돈을 걸어 크게 따신 뒤, 그 돈으로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고 네 번째 응접실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스의 레이디 라고스께서는 결투 소식을 들으시고 &quot;왜 죽이지 않았지&quot;라고만 하셨다는군요. 부인,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유감의 표명이라 들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세인트 제임스가의 내기 장부. 후작께서 사월에 직접 걸어 두셨던 판돈 — 사교철이 끝나기 전 자신은 약혼하지 않는다는 쪽 — 의 배당률이 이번 달에만 세 번 조정되었습니다. 장부지기의 말에 따르면 후작 본인이 그것을 확인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판돈을 거두지도, 반대편으로 옮기지도 않으신 채 그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웃으며 돌아가셨다고 하지요.&lt;br&gt;&lt;br&gt;여러분, 저는 도박꾼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잃을 것을 알면서도 판을 뒤집지 않는 사내는 딱 한 종류뿐입니다. 이미 다른 것을 걸어 버린 사내지요. 그리고 그것은 대개 장부에 적히지 않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유월에는 사교철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무도회가 열립니다. 폐하께서 친히 참석하시며, 그날 밤 이후로는 약혼 발표가 홍수처럼 쏟아지지요.&lt;br&gt;&lt;br&gt;한 사내는 옆구리에 총알 자국을 얻었고, 한 여인은 장갑 한 짝을 잃었습니다. 사교계는 그 두 손실이 서로 무관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lt;br&gt;&lt;br&gt;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lt;br&gt;&lt;br&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여러분의 충실한 벗,&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lt;br&gt;&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레이디 매그파이&lt;/i&gt;&lt;/span&gt;&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h2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6&quot;&gt;&lt;b&gt;레이디 매그파이의 사교계 소식지&lt;/b&gt;&lt;/h2&gt;&lt;h3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lt;b&gt;1782년 6월 — 사교철 세 번째 발행&lt;/b&gt;&lt;/h3&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친애하는 독자 여러분.&lt;br&gt;&lt;br&gt;이번 달 저는 잉크를 세 병 썼습니다. 평소의 사교철 한 계절 전체에 쓰는 양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도시를 얼마나 바쁘게 만드셨는지, 제 손끝의 굳은살이 증언하고 있지요.&lt;br&gt;&lt;br&gt;시작하겠습니다. 앉으십시오. 서서 읽으실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첫째 주 — 두 번의 춤&lt;/b&gt;&lt;br&gt;&lt;br&gt;유월 대무도회. 폐하께서 친히 임하셨고, 촛불 사백 자루가 켜졌으며, 이 도시의 미혼 남녀 전부가 한 방에 갇혔습니다.&lt;br&gt;&lt;br&gt;키스 후작께서는 그날 밤 단 한 사람과만 춤을 추셨습니다. 두 번.&lt;br&gt;&lt;br&gt;여러분께서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다. 한 번은 예의이고 두 번은 선언이며 세 번은 파혼 소송입니다. 무도회장의 부채들이 일제히 멈췄고, 어느 백작 부인께서는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셨습니다. 폐하께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셨다는 증언도 있습니다.&lt;br&gt;&lt;br&gt;두 번째 춤은 알르망드였습니다. 손을 맞잡고 팔 안쪽으로 상대를 감아 도는 그 춤 말입니다. 성이 없는 그 아가씨는 여전히 스텝을 몰랐고, 여전히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후작께서는 여전히 그 무지를 자기 것으로 뒤집어쓰셨습니다. 다만 그날 밤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곡이 끝난 뒤에도 후작께서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두 박자쯤. 겨우 두 박자였습니다만, 이 도시에서 두 박자면 왕조 하나가 무너집니다.&lt;br&gt;&lt;br&gt;무도회가 끝난 뒤 세인트 제임스가의 장부에서는 후작의 이름이 걸린 배당률이 하룻밤 사이 다섯 번 뒤집혔습니다. 그리고 후작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판돈을 옮기지 않으셨지요.&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둘째 주 — 이스트엔드에서 온 여자&lt;/b&gt;&lt;br&gt;&lt;br&gt;그리고 마치몬트 자작이 돌아왔습니다.&lt;br&gt;&lt;br&gt;오월의 새벽 초원에서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간 그 사내 말입니다. 명예를 잃은 신사가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총을 다시 들지 않습니다. 사람을 삽니다.&lt;br&gt;&lt;br&gt;자작께서는 두 달치 수입을 들여 사설 조사관 셋을 고용하셨고, 도심 동편의 골목이란 골목을 뒤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 둘째 주 화요일, 브로드시트 한 장이 코번트 가든에서 페니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저열했고 문장은 조악했으며 내용은 — 유감스럽게도 — 전부가 거짓은 아니었습니다.&lt;br&gt;&lt;br&gt;그 종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성이 없는 그 아가씨는 이름조차 없이 자랐고, 도살장 뒷골목에서 살았으며, 열아홉 되던 겨울에 어떤 사내를 칼로 찔렀다고. 그리고 그 사내는 다시 걸어 다니지 못했다고.&lt;br&gt;&lt;br&gt;목격자라 자칭하는 여자가 하나 나섰습니다.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여자였고, 자작의 하인이 그녀를 마차에 태워 데려왔다는 것을 짐꾼 셋이 보았으며, 그녀가 증언 대가로 무엇을 받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lt;br&gt;&lt;br&gt;여러분, 저는 이 소식지로 여러 사람을 파멸시켜 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음 문장을 쓸 자격이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쓰겠습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칼을 든 열아홉 살 여자와, 자기 창피를 씻으려고 사람을 사서 그 여자를 파는 서른여덟 살 자작 중에 누가 더 야만인입니까. 답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답이 무엇일지 저는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화가 나 있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전반 — 킹 스트리트의 침묵&lt;/b&gt;&lt;br&gt;&lt;br&gt;킹 스트리트 집회장. 사교계에서 가장 배타적인 수요일 밤. 그 아가씨가 블랙우드 공작 각하와 함께 입장하셨을 때, 방 안의 소음이 정확히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lt;br&gt;&lt;br&gt;그리고 그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우아한 형태의 살인 말입니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사를 청하려 다가오던 발걸음들이 방향을 틀었고,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부채가 올라갔으며, 소개를 부탁드리던 어머니들께서 갑자기 딸의 머리핀을 고쳐 주시느라 몹시 바빠지셨습니다.&lt;br&gt;&lt;br&gt;그 아가씨는 벽 쪽에 한 시간 가까이 홀로 서 계셨습니다. 도망치지 않으셨고, 울지도 않으셨으며, 그저 방 안을 훑어보셨다고 합니다. 사월에 제가 썼던 그 눈, 사람을 세는 것이 아니라 출구를 세는 눈으로요. 그리고 어느 순간 손목의 그물 지갑에서 붉은 설탕과자를 하나 꺼내 입에 무셨습니다. 사교계 전체가 자신을 매장하는 중에, 사탕을 드셨다는 말입니다.&lt;br&gt;&lt;br&gt;저는 그 장면을 목격한 세 사람에게서 똑같은 표현을 들었습니다. 무서웠다고요.&lt;br&gt;&lt;br&gt;후작께서는 그날 밤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늦게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문지기가 후작께 무어라 귀엣말을 하자 — 아마도 자작 일행이 안에 계시다는 안내였겠지요 — 후작께서는 검은 색유리 안경 너머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다가, 계단을 도로 내려가셨습니다.&lt;br&gt;&lt;br&gt;사교계는 그것을 후작의 후퇴로 읽었습니다. 어머니들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고, 딸들의 새 드레스 주문이 그 주에만 열아홉 벌 들어갔습니다.&lt;br&gt;&lt;br&gt;여러분. 도박꾼이 테이블을 떠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판을 접었거나, 돈을 더 가지러 갔거나.&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후반 — 서관의 불&lt;/b&gt;&lt;br&gt;&lt;br&gt;같은 주, 두 번째 브로드시트가 나왔습니다. 이번 표적은 후작이었습니다.&lt;br&gt;&lt;br&gt;십팔 년 전 키스 대저택 서관을 태운 그 화재. 선대 후작 부부께서 돌아가신 그 밤. 종이는 묻습니다. 왜 열넷의 소년만 화상을 입고 살아 나왔는가. 왜 그 소년은 그 후로 단 한 번도 부모의 기일을 지키지 않는가. 왜 유일한 목격자인 누님께서는 시골로 내려가 십수 년째 동생과 왕래가 없는가.&lt;br&gt;&lt;br&gt;그리고 유월 셋째 주 금요일, 그 누님께서 런던에 도착하셨습니다.&lt;br&gt;&lt;br&gt;십수 년 만입니다. 남작 부인이 되신 그분은 검은 여행복 차림으로 곧장 키스 대저택으로 드셨고, 저택의 하인 전원이 그날 저녁 반나절 휴가를 받았습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습니다. 저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이 소식지 역사상 몇 안 되는 패배를 여기 기록해 둡니다.&lt;br&gt;&lt;br&gt;다만 확실한 것 하나. 그날 밤 후작께서 저택 서관 — 십팔 년째 폐쇄되어 있던 그 서관 — 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그 안에 계셨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후작의 셔츠 소매가 그을음으로 검었고, 왼쪽 옆구리의 아물지 않은 총상 자국이 다시 피로 젖어 있었다고 하녀 하나가 증언했습니다.&lt;br&gt;&lt;br&gt;무언가를 찾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태우신 것일까요. 유리 조각을 두 손으로 그러쥔 사내는 대개 어느 쪽인지 스스로도 모릅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넷째 주 — 그리고 절정&lt;/b&gt;&lt;br&gt;&lt;br&gt;유월 마지막 주 목요일. 시즌의 폐막 무도회.&lt;br&gt;&lt;br&gt;블랙우드 공작 각하께서 발표하셨습니다.&lt;br&gt;&lt;br&gt;당신의 피후견인이 이탈리아의 체사레 데 시카 백작과 약혼하였음을. 혼례는 가을에, 밀라노에서 치러질 것이며, 신부는 팔월 이전에 잉글랜드를 떠날 것임을.&lt;br&gt;&lt;br&gt;여러분, 저는 이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자비입니다. 가장 잔인한 형태의 자비 말입니다. 성이 없는 여자에게 성을 주고, 이 나라의 브로드시트가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고, 열아홉 살의 칼자국을 알프스 너머에 묻어 버리는 것. 공작 각하께서는 딸을 구하셨습니다. 딸을 추방하는 방식으로요.&lt;br&gt;&lt;br&gt;백작께서는 그 자리에서 완벽하셨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짧게 무어라 말씀하신 뒤 손등에 입을 맞추셨고, 사교계는 그 우아함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백작 각하, 저는 당신이 오월에 마차 두 대와 켄트의 별장을 잃으시고도 웃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지금 그 판을 회수하고 계신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겁니까. 저는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습니다.&lt;br&gt;&lt;br&gt;키스 후작께서는 그 방에 계셨습니다.&lt;br&gt;&lt;br&gt;발표가 끝났을 때 후작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목격자 열넷의 증언이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후작께서는 박수를 치셨습니다. 천천히, 다섯 번쯤. 그리고 잔을 들어 축배에 응하셨고, 잔을 비우셨으며, 빈 잔을 지나가던 하인의 쟁반에 내려놓고 무도회장을 나가셨습니다.&lt;br&gt;&lt;br&gt;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lt;br&gt;&lt;br&gt;그날 밤 후작께서는 세인트 제임스가의 클럽에 나타나 장부지기를 부르셨습니다. 사월에 걸어 두셨던 그 판돈 — 사교철이 끝나기 전 자신은 약혼하지 않는다는 쪽 — 을 정산하러 오신 것입니다. 후작께서 이기셨습니다. 사교철은 끝났고, 후작께서는 약혼하지 않으셨으니까요.&lt;br&gt;&lt;br&gt;장부지기가 금화를 세어 밀어 놓자 후작께서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lt;br&gt;&lt;br&gt;&quot;Funny thing about a sure bet. You only find out what it cost you after you've collected.&quot;&lt;br&gt;(확실한 판돈이란 게 웃긴 게 말이야. 그걸 뭘 주고 산 건지는 챙기고 나서야 알게 되거든.)&lt;br&gt;&lt;br&gt;후작께서는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전부 테이블에 남겨 두고 나가셨고, 클럽의 하인들이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아직도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그 밖의 소식들&lt;/b&gt;&lt;br&gt;&lt;br&gt;미스터 오스카 피츠로이께서 약혼 발표 도중 폭죽 상자를 넘어뜨리셨습니다. 본인은 사고라 주장하시며 몹시 미안해하셨는데, 그 소란 덕분에 방 안 절반이 후작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점은 기록해 두어야겠지요. 미스터 피츠로이, 당신이 정말 바보인지 저는 이제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lt;br&gt;&lt;br&gt;미스터 권께서는 마치몬트 자작의 조사관 중 한 명과 골목에서 마주치셨다고 합니다. 조사관은 그 후 사흘간 출근하지 못했으며, 미스터 권께서는 &quot;계단에서 굴렀다더라&quot;고 하셨습니다. 계단이 없는 골목이었습니다.&lt;br&gt;&lt;br&gt;레이디 라고스께서는 브로드시트를 읽으신 뒤 딱 한 마디만 하셨답니다. &quot;칼을 썼다고? 나쁘지 않네.&quot; 부인, 사교계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저는 그 점을 매우 즐기고 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헤어 빌케께서는 이 모든 소동에 진저리를 치시며 다음 주 프로이센으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도망칠 나라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요.&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이번 달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며 마치겠습니다.&lt;br&gt;&lt;br&gt;폐막 무도회 다음 날 새벽, 비가 내렸습니다. 유월치고는 지독하게 찬 비였지요.&lt;br&gt;&lt;br&gt;그 비를 뚫고 말 한 마리가 블랙우드 공작 각하의 저택 앞에 섰습니다. 마차도 하인도 없이, 혼자, 흠뻑 젖은 채로. 그 사내는 문을 두드렸고, 문지기에게 명함 대신 카드 한 장을 건넸다고 합니다.&lt;br&gt;&lt;br&gt;스페이드 잭이었습니다.&lt;br&gt;&lt;br&gt;공작 각하께서 그를 들이셨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을 보내 놓은 상태이며,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여러분께 전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lt;br&gt;&lt;br&gt;여러분, 사교철은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마차들은 시골로 떠나고 있고, 응접실마다 흰 천이 덮이고 있습니다. 신부는 팔월 이전에 배를 탈 것입니다.&lt;br&gt;&lt;br&gt;그러나 저는 이 도시에서 오래 살았고,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도박꾼이 마지막 카드를 손에 쥔 채로 남의 집 문을 두드릴 때,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lt;br&gt;&lt;br&gt;그것은 올인입니다.&lt;br&gt;&lt;br&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여러분의 충실한 벗,&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lt;br&gt;&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레이디 매그파이&lt;/i&gt;&lt;/span&gt;&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6&quot;&gt;&lt;h2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6&quot;&gt;&lt;b&gt;레이디 매그파이의 사교계 소식지&lt;/b&gt;&lt;/h2&gt;&lt;h3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lt;b&gt;1782년 7월 — 올해 사교철 마지막 발행&lt;/b&gt;&lt;/h3&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친애하는 독자 여러분.&lt;br&gt;&lt;br&gt;한 계절이 끝났습니다. 마차들은 시골로 떠났고, 응접실 가구마다 흰 천이 덮였으며, 재봉사들은 마침내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소식지를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것을 알아냈으면서도 가장 적게 쓰고 싶은 달을 보냈습니다.&lt;br&gt;&lt;br&gt;그러나 저는 자비로운 여자가 아닙니다. 전부 쓰겠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첫째 주 — 새벽의 응접실&lt;/b&gt;&lt;br&gt;&lt;br&gt;유월의 마지막 새벽, 스페이드 잭 한 장을 명함 대신 내밀었던 그 사내는 결국 안으로 들여졌습니다. 정확히는 세 시간을 현관 홀에 세워 둔 뒤였지요. 대리석 바닥에 빗물이 웅덩이를 이룰 만큼이었다고 은 그릇을 닦던 하인이 증언했습니다.&lt;br&gt;&lt;br&gt;공작 각하와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저는 마침내 알아냈습니다. 문틈으로 들은 것을 옮기는 자를 저는 경멸합니다만, 그 경멸은 다음 달로 미루겠습니다.&lt;br&gt;&lt;br&gt;후작께서는 청혼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lt;br&gt;&lt;br&gt;후작께서는 서재 책상 위에 그 카드를 내려놓으셨고, 그것이 지난 겨울 어느 판에서 그 아가씨에게 딴 빚 — 언제든 한 번, 거절할 수 없는 부탁 하나 — 의 증서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돌려주러 왔다고 하셨답니다.&lt;br&gt;&lt;br&gt;&quot;As long as she owes me, I'll never know what she'd have chosen. So I'm tearing up the note. Whatever she does next, she does it free of me.&quot;&lt;br&gt;(빚이 남아 있는 한 저 아가씨가 뭘 골랐을지 영영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증서는 찢겠습니다. 다음에 뭘 하든 저와는 상관없이 하는 겁니다.)&lt;br&gt;&lt;br&gt;그리고 후작께서는 각하께 단 하나를 물으셨습니다. 밀라노행을 결정하기 전에, 각하께서 그 아가씨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신 적이 있느냐고요.&lt;br&gt;&lt;br&gt;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인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없었기 때문이겠지요.&lt;br&gt;&lt;br&gt;&lt;b&gt;첫째 주 — 남작 부인의 편지&lt;/b&gt;&lt;br&gt;&lt;br&gt;같은 주, 저는 봉랍이 찍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발신인은 시골로 내려가 십수 년 침묵하셨던 그 누님, 현 남작 부인이셨습니다. 부인께서는 익명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므로 그 용기를 여기 기록합니다.&lt;br&gt;&lt;br&gt;서관의 화재에 관하여. 열넷의 소년은 먼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누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나왔을 때 그는 불이 붙은 채였습니다. 부모님을 찾으러 세 번째로 들어가려는 것을 정원사 둘이 붙들어 눕혔고, 그 자국이 오른쪽 얼굴에서 허리까지 남았습니다.&lt;br&gt;&lt;br&gt;남매가 왕래를 끊은 이유도 적혀 있었습니다. 부인께서는 동생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되돌아 들어간 대가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으셨다고 합니다.&lt;br&gt;&lt;br&gt;그리고 기일에 관하여. 후작께서는 매년 가십니다. 해가 뜨기 전에, 혼자서요. 저는 그 교구의 묘지기에게 확인했고, 묘지기는 십팔 년째 같은 사내가 같은 시각에 온다고 말했습니다. 꽃은 들고 오지 않는답니다. 대신 주사위 두 알을 비석 위에 올려놓고 한참 서 있다가 간다고요.&lt;br&gt;&lt;br&gt;여러분, 지난달 그 브로드시트를 페니에 사서 낄낄대며 돌려 읽으신 분들께. 저는 여러분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둘째 주 — 손가락 두 개&lt;/b&gt;&lt;br&gt;&lt;br&gt;이번엔 제 차례였습니다.&lt;br&gt;&lt;br&gt;손가락 두 개가 없는 그 증인을 저는 부두 근처 하숙집에서 찾아냈습니다. 값을 물었더니 일 기니와 이 도시를 떠날 배편이라고 하더군요. 마치몬트 자작께서 지불하신 것보다 훨씬 쌌습니다. 진실이 거짓보다 싼 것은 이 도시의 오랜 관습이지요.&lt;br&gt;&lt;br&gt;그 여자가 말한 것은 이렇습니다. 성이 없는 그 아가씨가 열아홉에 찌른 사내는 골목에서 아이들을 거두어 어딘가로 넘기는 장사를 했습니다. 바깥에서 잠기는 문이 달린 방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을 거쳐 사라진 아이들의 수를 그 여자는 세다가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손가락 두 개는 세는 것을 그만두지 않아서 잃은 것이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자작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조사관들이 함께 보고했으니까요. 그중 앞부분만 인쇄하기로 결정하신 것도 자작이셨습니다.&lt;br&gt;&lt;br&gt;같은 주 금요일, 롬바드가의 대금업자 셋이 동시에 자작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작의 차용증 전부를 하룻밤 사이에 사들여 한꺼번에 회수를 지시한 매수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수인은 익명이었습니다만, 지불이 키스 가문의 은행을 거쳤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부주의가 아니라 서명이었다고 봅니다.&lt;br&gt;&lt;br&gt;자작께서는 새벽 초원 대신 채무자 감옥으로 가셨습니다. 총알보다 종이가 무섭다는 것을 이 도시는 자꾸 잊습니다.&lt;br&gt;&lt;br&gt;&quot;Shooting him would've been over in a second. This way, he gets to think about it every morning for years. I'm the generous type.&quot;&lt;br&gt;(쏘면 일 초면 끝이잖아. 이러면 몇 년 동안 아침마다 생각하겠지. 난 관대한 편이야.)&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 폐하의 알현&lt;/b&gt;&lt;br&gt;&lt;br&gt;그리고 여왕 폐하께서 움직이셨습니다.&lt;br&gt;&lt;br&gt;성이 없는 그 아가씨가 사적으로 알현을 명받았다는 소식에 사교계는 그녀의 사회적 사형 집행을 기대했습니다. 응접실마다 내기가 걸렸고, 어느 백작 부인께서는 축배용 샴페인을 미리 얼음에 담가 두셨다지요.&lt;br&gt;&lt;br&gt;알현실에서 폐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대의 성이 무엇이냐고.&lt;br&gt;&lt;br&gt;그 아가씨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변명도, 사과도, 눈물도 없이요. 폐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짐이 하나 내려 주랴.&lt;br&gt;&lt;br&gt;거절하셨답니다.&lt;br&gt;&lt;br&gt;시녀 넷이 숨을 멈추었고, 폐하께서는 부채를 접으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웃으셨다고 합니다. 재위 이래 알현실에서 폐하께서 웃으신 것은 세 번째라고, 궁정에 오래 계신 분들이 말씀하셨습니다.&lt;br&gt;&lt;br&gt;폐하께서 남기신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짐도 이름이 열한 개나 되지만 그중 짐의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뿐인 이름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키겠다는데 짐이 무슨 권리로 늘리겠느냐.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계절은 너무 조용했다. 짐은 저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lt;br&gt;&lt;br&gt;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여러분, 사교계라는 것이 이토록 저렴합니다. 두 달간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아세웠던 부채들이 사흘 만에 초대장으로 바뀌었으니까요. 샴페인을 얼려 두신 백작 부인께서는 그것을 딸의 약혼 축하에 쓰셨습니다. 낭비는 죄악이니까요.&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셋째 주 후반 — 파혼&lt;/b&gt;&lt;br&gt;&lt;br&gt;체사레 데 시카 백작께서 약혼을 파기하셨습니다.&lt;br&gt;&lt;br&gt;방식은 백작다웠습니다. 즉 완벽했고, 조금 역겨웠으며, 대단히 우아했습니다. 백작께서는 어느 만찬에서 스스로 오페라 가수와의 오래된 관계를 큰 소리로 인정하셨고, 자신은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며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남자 쪽이 파혼의 오명을 전부 뒤집어쓰는 방식. 신부에게는 흠집 하나 남지 않는 방식. 여러분, 저는 백작을 두 달간 이 소식지에서 조롱해 왔고 그중 어느 것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이번 한 번은 모자를 벗어 인사드립니다. 어떤 사내들은 나쁜 놈으로 남는 쪽을 스스로 고릅니다. 그것이 가장 깔끔한 계산이기 때문이지요.&lt;br&gt;&lt;br&gt;파혼 소식이 알려진 그날 밤, 백작께서는 클럽에서 후작과 마주치셨다고 합니다. 두 분은 카드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술만 드셨지요. 백작께서 이탈리아어로 무어라 하셨고 후작께서 웃으셨다는 것만이 전해집니다. 통역해 주실 분이 없었으므로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자리에 계셨던 분의 말로는, 백작께서 나가시기 전 후작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셨다는군요. 위로였는지 경고였는지는 두 분만이 아실 겁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넷째 주 — 부두, 그리고 배표 두 장&lt;/b&gt;&lt;br&gt;&lt;br&gt;칠월 마지막 주. 밀라노행 배는 예정대로 부두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파혼했다 하여 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공작 각하께서는 여전히 피후견인을 대륙으로 보내려 하셨고, 짐은 이미 실렸으며, 새벽 조수에 맞추어 출항이 잡혀 있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그날 새벽에도 비가 왔습니다. 이 계절은 어지간히도 물을 좋아하는 모양이지요.&lt;br&gt;&lt;br&gt;부두에서 목격된 것을 옮깁니다. 짐꾼 넷과 세관 서기 하나, 그리고 새벽 생선을 나르던 여자 둘이 증인입니다.&lt;br&gt;&lt;br&gt;성이 없는 그 아가씨는 우산 없이 잔교 끝에 서 있었습니다. 승선하지도, 돌아서지도 않은 채로요. 후작께서는 그 뒤에 서 계셨고, 역시 우산이 없었습니다. 후작께서 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저는 이 소식지에 두 번 적었습니다. 세 번째로 적겠습니다. 몹시 싫어하십니다.&lt;br&gt;&lt;br&gt;후작께서는 무릎을 꿇지 않으셨습니다. 반지도 없었습니다. 대신 젖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그녀 앞에 펼쳐 보이셨답니다. 배표였습니다. 같은 배, 같은 항로, 두 장.&lt;br&gt;&lt;br&gt;&quot;I've got a spare ticket. Come with me?&quot;&lt;br&gt;(표가 한 장 남는데. 나랑 같이 갈래?)&lt;br&gt;&lt;br&gt;그리고 덧붙이셨다고 합니다. 밀라노든 어디든 상관없다고. 배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도 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 항구에서 자기를 버려도 된다고. 다만 이번만은 각하가 정한 곳도, 사교계가 밀어낸 곳도 아닌 그녀가 고른 곳으로 가자고요.&lt;br&gt;&lt;br&gt;여러분, 저는 청혼을 백 번쯤 기록해 왔습니다. 대부분은 재산 목록의 낭독이었고 몇 번은 협박이었으며 아주 드물게 시였습니다. 배표 두 장은 처음입니다.&lt;br&gt;&lt;br&gt;그 아가씨께서 무어라 답하셨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습니다. 빗소리가 컸고 갈매기가 시끄러웠으며 무엇보다 두 분이 너무 가까이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배가 예정대로 출항했다는 것, 그리고 그 배에 실렸던 짐이 다시 내려졌다는 것뿐입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칠월의 마지막 밤 — 특별 허가&lt;/b&gt;&lt;br&gt;&lt;br&gt;폐하께서 특별 허가장을 내리셨습니다.&lt;br&gt;&lt;br&gt;성이 없는 신부의 혼인을 위해 왕실 명의로 성을 임시 부여하는 절차 말입니다. 통상 여러 달이 걸리며, 대개는 그 사이에 신랑 쪽이 마음을 바꿉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사흘 만에 처리하도록 명하셨고, 서기관 셋이 밤을 새웠으며, 그중 하나는 다음 날 코피를 쏟았다고 합니다.&lt;br&gt;&lt;br&gt;그리고 그 아가씨는 부여받은 성을 쓰지 않았습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름이었고, 혼인 증서에 서명할 때 그녀가 적은 것은 단 세 글자였다고 합니다. 목사께서 잠시 펜을 멈추셨다지만, 신랑 쪽이 웃으며 그대로 두라고 하셨답니다.&lt;br&gt;&lt;br&gt;&quot;She doesn't need a surname to be mine. Wrong way round anyway. It's her name I'm taking.&quot;&lt;br&gt;(성 없어도 내 거 되는 데 지장 없어. 애초에 순서가 틀렸지. 이름을 가져가는 쪽은 나니까.)&lt;br&gt;&lt;br&gt;혼례는 조용했습니다. 대성당이 아니라 키스 대저택의 정원이었고, 하객은 서른을 넘지 않았습니다. 미스터 피츠로이께서 축포를 준비하셨다가 신부 본인에게 저지당하셨는데, 신부께서 하신 말씀이 &quot;그건 폭탄이잖아&quot;였다고 합니다. 미스터 피츠로이, 신부께서 옳으십니다.&lt;br&gt;&lt;br&gt;신부는 그날도 춤을 추지 못했습니다. 세 달이 지났는데도요. 신랑께서는 여전히 자기 발을 내주셨고, 여전히 자신이 틀린 척하셨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앞으로도 평생 저 모양으로 춤을 출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저 광경을 비웃을 만큼 용감한 자는 이 도시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gt;향후에 관하여&lt;/b&gt;&lt;br&gt;&lt;br&gt;새 후작 부인께서는 사교계의 다과회에 참석하지 않으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낮에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녁의 초대에는 응하실 것이며, 이미 어느 백작 부인께서 그 시각에 맞추어 만찬을 새로 짜셨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사교계는 결국 자기 시계를 고칩니다. 상대가 충분히 무서우면요.&lt;br&gt;&lt;br&gt;키스 후작 부부께서는 팔월에 대륙으로 떠나십니다. 신혼여행이라 불리고 있습니다만, 목적지가 공표되지 않았습니다. 남쪽 어딘가라고만 하지요.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이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세인트 제임스가의 그 금고 말입니다. 후작께서 손대지 않고 남기신 그 판돈. 후작께서는 결국 그것을 찾아가지 않으셨고, 대신 서면 지시를 하나 남기셨습니다. 도심 동편, 바깥에서 잠기는 문이 달린 방들이 있는 그 구역. 그곳의 아이들을 위해 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관리인은 익명이며, 후작의 이름은 어느 문서에도 올라가 있지 않습니다.&lt;br&gt;&lt;br&gt;여러분, 그는 이겼습니다. 그리고 딴 돈을 전부 그 여자가 열아홉에 걸어 나온 골목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실지 정산이라 부르실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아직도 어느 쪽인지 정하지 못했고, 아마 영영 정하지 못할 겁니다.&lt;/p&gt;&lt;hr data-ke-type=&quot;horizontalRule&quot; data-ke-style=&quot;style2&quot;&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이것으로 올해 사교철의 소식지를 마칩니다.&lt;br&gt;&lt;br&gt;한 계절 전, 저는 성이 없는 여자 하나와 판돈을 옮기지 않는 사내 하나에 관하여 썼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은 여전히 없고 판돈은 끝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요. 다만 두 사람이 같은 우산 아래 있지 않고 같이 젖는 쪽을 골랐을 뿐입니다.&lt;br&gt;&lt;br&gt;사교계는 이것을 해피 엔딩이라 부를 겁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부르겠습니다. 두 명의 바보가 마침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요.&lt;br&gt;&lt;br&gt;가을에 뵙겠습니다. 시골 영지에서 부디 지루해하십시오. 지루함은 이 소식지의 유일한 원료이니까요.&lt;br&gt;&lt;br&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여러분의 충실한 벗,&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lt;br&gt;&lt;/i&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lt;i&gt;레이디 매그파이&lt;/i&gt;&lt;/span&gt;&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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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aegise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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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2 Sep 2026 02:14:2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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